[시를 느끼다] 윤동주의 '자화상'
[시를 느끼다] 윤동주의 '자화상'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2.05.30 18:3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자화상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2004년 민예원}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윤동주 시인은 일제 강점기를 살았고 또 일제에 의해 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글로 끝없이 일제에 항거했기에 민족시인, 또는 우국시인으로 불린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는 직접 독립운동에 앞장서 행동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글로만 자신의 뜻을 피력했기에 언제나 자신감 없이 의기소침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언제나 자신을 학대하듯이 질책하면서 참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회록이란 詩에도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며 즐거운 날까지 참회록을 써야한다고 적고 있다. 길이란 詩에도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도 푸르다’라고 했으니 얼마나 자신이 당당하지 못하고 부끄럽다고 느꼈던 것일까. 서시란 詩에는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어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수 있단 말인가. 하여 유추해 보면 윤동주 시인은 정말 흠 없이 고결하게 살고 싶었던 증류수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맥락에서 이 詩를 음미해보면 과연 윤동주 시인다운 詩라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는 자아성찰이 있기 때문이다. 독립에 대한 염원은 누구보다 강했으나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자기의 우유부단함이나 비굴(자신의 생각)함을 질책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가엾게 생각하는 자기연민도 남다른 것 같다. 보통 사람이라면 근사하게 자기를 합리화 시켜 오히려 글로 자기를 아름답게 포장했을 것이다.

이 詩 첫 연에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본다. 로 되어 있다. 마을 안에 있는 우물도 아니고 외딴 우물을 그것도 여럿이 아닌 혼자 가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인을 한번 상상해 보라. 누구와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근원적인 고독과 자기 연민에 젖어있는 사람 같지 않은가. 그리고 우물 속에 비추어지는 것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다. 펼쳐진 하늘과 달과 구름이 있고 가을까지 있다. 바람마저 파아란 바람이 불고 있다니 얼마나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가. 파아란 바람을 확장 해석해 보자면 그 의미는 끝없이 무궁무진할 것 같다. 파아란 바람이란 두 단어만으로 이 詩 한편을 다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한 사나이가 있다. 그 사나이는 자신이기에 미워서 더 이상 보기 싫어 돌아선다, 돌아서다 다시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져 도로 가 다시 들여다본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지고 다시 그리워지는 걸 반복하고 있다. 이런 일연의 행동들이 자기애착과 자기연민이 끝없이 되풀이 되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괴로워하며 자신을 끝없이 성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윤동주 시인다운 멋진 詩가 아닌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