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지의 국어시간 //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 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 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 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시간이여.
*히노마루-일본 국기
*기타나이-더러운
*조센징-한국인을 낮추어 부르는 말
*센세이-선생
땅의 연가 [1981년 창작과 비평사]

문병란 시인은 1935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했고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국민운동본부 대표, 한국작가회 이사, 다형김현승문학기념사업회 상임고문, 용아박용철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79년 전남문학상을 시작으로 요산문학상, 금호예술상 한림문학상, 제1회 박인환 시문학상을 받았고 2015년 향년 8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대표작으로는 '식민지의 국어시간', '인연서설', '견우와 직녀', '새벽의 차이코프스키', '벼들의 속삭임', '5월의 연가' 등 수많은 작품이 있다.
필자가 문병란 시인의 시 중에서 '인연서설'을 처음 접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성인줄 알았다. 이름도 그렇지만 시어들이 너무나 섬세하고 감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의 국어시간'이란 詩는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크게 어렵지 않게 서술하듯이 쉽게 썼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글날을 지나고 보니 우리 한글의 고마움과 자랑스러움이 사무쳐 이런 시를 지어서 우리에게 한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느끼고 깨닫게 해준 시인에 대한 감사와 이 시를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번에 이 시를 선택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 태평성대에도 한글은 언문이란 이름하에 천대를 받았다. 사대부들은 진서라는 한문만을 공부했고 과거시험도 한문으로만 치러졌다. 겨우 성균관 몇몇 유생들과 아녀자들만 배우는 글이 되었다. 그러다가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더하여 글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학교에서는 한글을 배우기는커녕 한국말도 못하게 했다. 숨어서 한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숨어서 지켰고 들키면 그대로 범법자가 되었다. 이러고 보니 한글을 지키는 것은 독립운동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겨우 해방이 되어 나라를 찾았으니 글도 찾고 말도 찾아 우리 국어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하건만 또 다른 복병이 있었다. 그건 영어였다. 영어를 잘 해야만 출세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영어를 많이 섞어 쓰면 유식하게 보아주니 상품 이름이나 가게 이름까지 영어가 대세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아이 이름까지 영어식으로 짓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의 언어가 너무나 왜곡되어 있고 비속어가 난무하고 있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뜻도 통하지 않게 줄여쓰거나 이상하고 상스런 조어를 만들어 쓰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인 것은 지금은 독립된 자유 대한민국이 되었고 국력도 자타가 공인할 만큼 커졌으니 세계인들이 한글을 배우려고 엄청 노력한다고 들었다. 자기나라 글이 없는 나라에서는 한글을 자기나라 글로 만들겠다는 나라도 있고 소위 내노라고 뽐내던 나라 국민들도 케이 팝 덕분에 한글을 앞 다투어 배운다고 들었다. 한국이 무역 대국이 되면서부터 경제적인 이유로도 한글을 배운다고 한다. 아무튼 신나고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세계적인 추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자탄만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더욱 갈고 닦아서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언어가 되도록 합심하여 노력해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