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시를 느끼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3.02.15 10:1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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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모델이 된 남광주역
작품의 모델이 된 남광주역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사평역에서[2016년 ㈜창비]

곽재구 시인
곽재구 시인

 

곽재구 시인은 1954년 1월1일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과, 숭실대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가 있고 산문집들과 동화집들이 있다. 詩뿐 아니라 기행산문, 동화 등 다양한 문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과 제9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곽재구 시인은 화려한 문구로 현란하게 꾸미거나 치장하기보다는 삶 속에서 드러나는 소소한 일상을 소박한 언어로 담담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이 詩에서 등장하는 사평역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광주에 있는 남광주역이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작품 속의 사평역에서는 막차를 기다리는 소시민들이 고달픈 삶 가운데서도 따뜻한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면서 詩가 시작되고 있다. 그때는 기차가 연착되는 것이 다반사였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시골의 간이역이 배경이었으니까.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면서도 사람들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 않고 졸거나 감기로 쿨럭이고 있다. 화자 역시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한 줌의 톱밥'을 난로 속으로 던지고 있다. 내면의 할 말들은 가득해도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함은 모든 상황을 순리대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어려운 가운데서도 삶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몽롱하기만 했나 보다 기쁨도 슬픔도 객관화 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한 두름의 굴비와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집으로 향하는 그들은 굴비나 사과보다 더 큰 가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가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시인의 소박한 언어 속에 담긴 보석같은 시어들을 살펴보았으면 한다. 잠에 겨워 조는 모습도 그믐처럼 졸고, 한 줌의 톱밥도 난로에 던진 것이 아니고 불빛 속으로 던졌다.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자면 '시린 손을 불에 쬐다'가 아닐까.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는 표현도 너무나 멋지지 않은가.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이 대목이 이 詩의 백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자정이란 죽음의 저편을 이야기 하는 것 같고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이란 말은 모두 무위하게 지워진다는 뜻이 아닐까.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이라 함도 너무나 기발한 발상이 아닌가. 덜컹거리는 차창이 애처롭게 지는 단풍잎으로 보였나 보다. 한 방울의 눈물이 아닌 '한줌의 눈물' 역시 '한줌의 톱밥'과 서로 이어져 통하게 함이 아니던가. 평범하지만 의미만은 결코 가볍지 않은 시어들이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아주 좋은 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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