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허영자의 '무지개를 사랑한 걸'
[시를 느끼다] 허영자의 '무지개를 사랑한 걸'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2.09.15 08:4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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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에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것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1998년 좋은 날]

허영자 시인의 강연회를 마치고 애독자들과 함께
허영자 시인의 강연회를 마치고 애독자들과 함께

허영자 시인은 1938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했고 1962년 목월선생 추천으로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월탄문학상, 허난설헌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을 받았다. 성신여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여성문학 회장,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성신여대 명예교수다.

직접 만나 본 시인은 여든이 훌쩍 넘었는데 여든 중반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단아하고 정갈하며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좀 마른 듯한 몸이었지만 목소리만은 카랑카랑하게 힘이 있었고 두 시간을 서서 강연을 하면서도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물 흐르듯 조근 조근 친절하게, 때로는 추상 같은 호령이 질타하듯이 내리꽂히는 비수와도 같이 폐부에 스며들었다. 시인을 직접 만나고 세 번 놀랐다. 고운 모습에 비해 나이에 놀랐고 유명 시인답지 않게 겸손하면서도 다정다감함에 놀랐고 예리하게 시대를 읽어내는 안목에 또 놀랐다.

시인의 소개는 이쯤으로 하고 詩로 한번 들어가 보자. 곱고 여린 詩語들이 수줍은 소녀가 커텐 뒤에서 살포시 얼굴을 반쯤 내민 듯 부끄러워하면서 내면을 고백하는 듯하다. 무지개를 사랑한 걸 부끄러워하지 말자면서 자기가 한 때 무지개를 사랑했음을 살짝 고백하고 있다. 그 무지개가 어찌 비온 뒤 하늘에 뜬 무지개 만이랴. 덧없고 허황되거나 아니면 아주 어리고 유치한 그런 것들이리라. 스크린 속의 멋진 배우일수도 있고 동화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일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가당치도 않게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천사처럼 날아다니는 꿈일 수도 있으리라.

또한 풀잎에 맺힌 이슬과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 같은 미물에 마음 빼앗김도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한다. 무엇이든지 사랑한다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마음 속에 사랑이 있다는 건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요소가 아닐까. 그 덧없고 사소하고 하잘 것 없음도 사랑하던 그때에는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잊지 말자고 말한다.

'눈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이 부분이 이 詩의 절창이며 클라이맥스가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는 거의 첫사랑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첫사랑 그 순간은 모두가 눈이 멀지않았나 싶다. 그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며 어여쁨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그 때는 절대적이었던 그 무엇이 지금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절대적으로 몰두했던 그 때 그 사랑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고 잊지 말자고 한다. 추억은 부끄러움이 아니고 고이 간직해야 할 자신만의 보물인지도 모르겠다. 소녀 같은 감성의 순수하고 고운 詩지만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할 여지와 추억을 동시에 한아름 안겨주니 결코 가벼운 詩가 아님을 알아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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