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의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 [2004년 민예원]
김남조 시인은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2023년 향년 96세로 타계했다. 학력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고 서강대학교 문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 연합신문 시 ‘성숙’ ‘잔상으로 등단했고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였으며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연구소 소장, 대한민국 건국60년 기념사업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수상은 제2회 구상문학상, 제21회 김삿갓문학상, 제29회 정지용문학상, 제25회 김달진문학상, 제11회 만해대상 문학부문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저서도 많이 있어 무려 도서가 145건에 이른다고 한다.
우선 김남조 시인하면 한국여성시단에 최고원로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 얼마 전 타계한 김남조 시인의 생명이란 詩 한 편을 우연히 발견한 기쁨을 누리게 되어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해설을 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생명은 따뜻함에서 싹이 트고 발아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인은 특이하게도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고 읊고 있다. 일반적인 시선이 아니라 그 반대의 시선으로 합리성과 타당성을 진술하고 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詩를 詩답게 하고 시인에게는 새로운 창조의 묘미를 더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며오고,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니 이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자꾸 음미하노라면 실 같이 가느다랗게 잡히던 뜻이 점차 확대되어 오는 느낌이다. 진실이라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사실과 내면의 참 진실은 확연히 다름을 이르는 것이리라. 눈에 보이는 겉의 사실은 부서지고 불에 타서 순전한 진실만이 오롯이 남아야 한다는 뜻이리라.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함도 그러자면 고통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겨울나무들도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니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그것은 살을 에이는 추위가 나무에겐 너무나 가혹한 미움의 대상이지만 그 적과 같은 미움의 대상도 자신을 다듬고 성장시키는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으니 잘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라는 뜻으로 읽혀진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 충전의 부싯돌임을 보라고 했다. 이 또한 잎은 자연의 순리대로 떨어져 또 다른 자기의 역할을 다하게 되고 남은 줄기는 내일의 충전의 부싯돌이 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라고 말해 주는 듯하다.
금가고 일그러진 것을 사랑할 줄 모르면 친구가 아니고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춤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친구를 흠 있고 못났다고 외면해서는 결코 안 되며 친구의 아픔에 동참하며 상처를 보듬어 낫게 도와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마지막 연에서 다시 한 번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고 읊고 있다. 그래서 이 詩는 수미상관을 잘 맞춘 수작이라 할 수 있겠다. 두 번이나 강조한 이 문장에서 추사의 세한도가 떠오름은 나만의 생각일까. 여름날에는 모든 나뭇잎들이 푸르지만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이 오면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변함없이 푸름을 보게 된다. 사람들도 잘 나갈 땐 진정한 벗인 냥 하지만 곤경에 처했을 때 과연 어떤 사람이 진정한 벗인가를 알게 된다는 세한도가 눈앞에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