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이육사의 '광야'
[시를 느끼다] 이육사의 '광야'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2.12.15 08: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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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수인복 입은 옆 모습과 수인 번호
이육사의 수인복 입은 옆 모습과 수인 번호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한국의 애송시 [2007년 글로북스]

이육사의 형제들
이육사의 형제들

이육사 시인은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나 1944년 그가 그렇게 염원하던 대한의 독립을 한해 앞두고 이국땅 베이징감옥에서 애석하게 순국하고 말았다. 그의 본명은 이원록인데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처음으로 수감되었을 때 대구감옥의 수인번호 264(이육사)를 필명으로 사용하면서 본명보다 이육사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시인은 1931년 중국에서 의열단 단원인 윤세주를 만나 그의 권고로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했다. 그곳에서 군사학. 통신법. 폭탄제조법. 총기사용법 등을 교육받았다. 1943년 국내의 항일조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국내에 무기 반입을 시도했다. 1943년 7월에 모친과 형의 소상에 참여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또 검거되었다. 그는 17번이나 검거되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검거가 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그는 일찍부터 각종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하여 열렬하게 항일 투쟁을 하였고 문학으로도 일제에 저항했던 대단한 애국지사였다. 우리가 일러 우국시인이라고 부르는 시인들도 거의가 글로 일제에 저항했는데 여러 독립단체에 들어가 온몸으로 또 글로 자신의 전부를 고스란히 나라를 위해 바친 사람은 흔치 않은 것 같다.

그의 작품으로는 광야, 청포도, 파초, 절정, 황혼, 독백, 꽃 등이 있다. 그는 양심이 이끄는 대로 몸과 글로 행동한 위대한 우국지사였고 그의 詩처럼 절정을 살고 간 진정한 대한의 남자요 시인이었다.

광야라는 詩 첫 행은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시작되고 있다. 까마득한 날이란 하늘이 처음 열리는 태초를 이름이리라. 그 태초에는 어디 닭 우는 소리만 안 들렸을까. 그 때는 생명체 자체가 없으니까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다툼도 없고 빼앗고 빼앗길 일조차 없는 평화로운 고요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광야만은 범하지 못하였으리라 하였는데 그 광야가 우리의 터전인 국토가 아니었을까.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강물 따라 길도 생겨났으리라.

4행이 말한 때가 바로 그때였으리라. ‘지금 눈 내리고’라고 했으니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모진 추위가 덮쳐왔을 때였고 우리가 자유를 빼앗기고 어둠속에 갇혀 고통당하는 일제 강점기였으리라.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다 하니 옛 시조 한 구절이 떠오른다.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고 했으니 어떤 고통의 세월에도 결코 지조를 버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우국지사의 마음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여기에서는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가난한 노래의 씨란 시인의 詩일 것이다. 온 몸으로 부딪쳐 봐도 거대한 바위와 같은 현실에 무력보다 강한 펜으로 저항하겠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낮추어 가난한 노래의 씨라 했지만 그 얼마나 튼실하고 알찬 알곡이든가. 그 알곡이 열매를 맺어 오늘날까지 아니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이어져 나가야 하리라.

마지막 행에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고 다짐하고 있다. 비록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지만 잘 가꾸면 튼실한 알곡이 되듯 땅덩이는 작지만 잘 지켜 나가면 세계 최강국도 될 수 있다고 예언하듯 말해주는 듯하다. 시인은 어느 특별한 한 사람의 초인을 원했을까. 우리 모두가 시인이 갈망했던 초인이 되어 그의 노래를 목 놓아 부르며 광야 같은 조국을 지켜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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