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물동 꽃할매, 김영자 씨
범물동 꽃할매, 김영자 씨
  • 노정희 기자
  • 승인 2020.04.24 20:4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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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 뒷골목의 꽃길
꽃 보며 우울증 치료
꽃할매는 꽃 살리는 '꽃 의사'
꽃 가꾸는 꽃할매, 김영자 씨. 노정희 기자
꽃 가꾸는 꽃할매, 김영자 씨. 노정희 기자

대구 수성구 범물동 주택가 뒷골목의 담장 아래 꽃 피어났다. 사람들이 흔히 다니는 길은 아니다. 주변 사람들과 등산객들이 가끔 오가는 뒷길이다.

두세 겹으로 놓인 화분은 도자기, 옹기, 플라스틱, 나무상자 등이다. 꽃은 담벼락을 따라 줄지어 있다. 현관 입구의 조그만 화단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을 터, 응달 골목을 채우고, 골목을 돌아 양지쪽 담장으로 터를 넓히고 있다.

담벼락 아래 화분들. 노정희 기자
담벼락 아래 화분들. 노정희 기자

꽃 종류도 다양하다. 야생화, 외국에서 들어온 꽃, 과일나무 등이 계절마다 저마다의 사연 몽우리를 주저리주저리 달고 피어난다.

꽃을 들여다보며 검색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모싯대, 돌단풍, 산딸나무, 용담, 타래붓꽃, 산매발톱, 꿀풀, 윤판나물, 은방울, 으아리, 초롱꽃, 홀아비바람꽃, 둘글레, 엉겅퀴, 비비추 등의 야생화와 명자꽃, 꽃사과, 수국, 데이지, 다알리아, 개양귀비, 수선화 등의 이름을 읊다 보면 어느덧 꽃과 친구가 된다.

꽃을 돌보는 김영자 씨. 노정희 기자
꽃을 돌보는 김영자 씨. 노정희 기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김춘수 ‘꽃’

꽃나무 주인은 어떤 분일까, 외진 골목에 드나드는 사람 많지 않으나 환한 기쁨을 나눠주니 고맙기 그지없는 분이다. 일부러 문을 두드릴 수도 없어 두어 번 골목에서 발길을 서성였다. 세 번째 발길을 향했을 때 골목 한편에 앉아 화분 갈이 하는 분을 만났다.

김영자(75. 대구 수성구 범물동) 씨는 화사한 핑크 빛깔 패딩을 입고 꽃잎 같은 스카프를 두르고 꽃을 만지고 있었다.

산매발톱.
산매발톱.

-꽃이 예쁩니다. 꽃을 키우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

▶일본 고베에서 15년 정도 살았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지도 일본에서 살았던 세월만큼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곗돈 떼이고, 그때 금액으로 200엔 정도였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우울증으로 고생하자 딸아이가 꽃을 키워보라고 하더군요.

-일본에도 계를 하나요?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살고 있으니까요. 살아온 이야기 하려니 눈물 나오려고 합니다.

-네, 아픈 과거는 묻지 않겠습니다. 꽃을 가꾸는 분이 궁금했었는데, 역시 꽃처럼 고우십니다. 화분이 많은데 종류며, 화분 개수는 아시는지요?

▶한국에 와서 병원에 다녔어요. 우울증이 심해지자 딸아이가 야생화부터 가꿔보라고 해서 꽃을 사고, 산에서 캐어다 심고 했습니다. 꽃은 다 예뻐서 가꿉니다. 한겨울에 집안에 들여놓을 수 없어 냉해에 강한 꽃만 돌봅니다. 화분은 많지만 세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디에 어느 꽃이 있다는 건 압니다. 꽃나무가 넘쳐나서 시골 친지 댁에 한 트럭 보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화분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본인 집에서 시들어간다는 화분도 가지고 옵니다. 그 화분을 싱싱하게 살려서 돌려주기도 합니다.

-시든 꽃을 살리니 ‘꽃을 살리는 의사’이십니다. 예전에 어르신들 말씀에 ‘거름 손’이 있다고 하던데, 어르신이 그런 분인가 봅니다. 그런데 경로당에는 가지 않으시는지요?

▶내 유일한 친구는 꽃입니다. 나는 꽃만 가꿉니다. 꽃을 가꾸고 바라보면서 나의 병을 고쳤습니다. 어제도 지나가다가 꽃이 예뻐 화분 한 개를 샀습니다. 집에서 가꾸기 힘들거나 시들어가는 화분 있으면 가지고 오세요. 내가 잘 살려서 돌려드릴게요. 나는 꽃 보며 병이 나았으니, 시든 꽃은 내가 치료해야 겠지요.

양귀비. 노정희 기자
양귀비. 노정희 기자
현관 앞, 핑크 빛깔 꽃.
현관 앞, 핑크 빛깔 꽃.

어르신이 가리키는 핑크 꽃이 가득 달린 화분은 현관 앞에 앉아있었다. 어제 사온 화분이란다. 앞집 아저씨가 어르신께 인사를 건넨다. 이웃들 미소가 꽃처럼 환하다. 어르신은 앞집 수국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자 꽃가지가 부러진 게 아닌가 걱정하며 꽃나무 아래로 가서 가지를 만져본다. 다행이다. 꽃가지가 부러진 게 아니라고 한다.

외진 골목, 지나가는 길손은 꽃을 보며 힐링한다며 어르신께 인사한다. 김영자 씨는 범물동의 꽃할매이며, 꽃을 치료하는 '꽃 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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