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오세진 '다산의 법과 정의 이야기'
[장서 산책] 오세진 '다산의 법과 정의 이야기'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1.08.23 1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살인사건 수사일지

편역자 오세진은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다산학사전팀 보조연구원으로 일했으며 한국고등교육재단 한학 연수 과정을 수료했다. 조선과 중국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집필하거나 번역하고 있으며, 강의도 겸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36건의 살인사건을 기초로 조선의 과학수사 지식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역작 <흠흠신서(欽欽新書)>를 편역한 것이다.

다산은 법과 관련된 직책으로 형조참의라는 관직에 있었는데, 정3품 관직인 이 자리는 오늘날 법무부 차관보에 해당하는 중책이다. 다산은 여기서 전국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보고서들을 직접 살피면서 형법에 관한 나름의 식견과 안목을 키웠을 것이다. <흠흠신서>에는 그러한 경험들이 녹아들어 조선 최고의 판례집이자 수사방법 안내서가 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권력의 정점으로서 살인사건의 최종 판결을 내렸지만 무조건 왕의 뜻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았다. <흠흠신서>에 실린 정조의 판결문과 다산의 논평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상호 견제, 납득, 인정(人情)을 사법 행정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목차는 '1장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면 안 된다, 2장 나라에 법이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3장 법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4장 조선판 유전무죄 무전유죄, 5장 법이란 억울한 백성을 살리는 것이다'로 되어 있다.

본문은 1~4장에서는 각 7건, 5장에서는 8건의 살인사건에 대하여 사건 개요, 지방 관서의 수사 보고서, 정조의 판결문, 정약용의 비평과 편역자의 해설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36건의 사례 중 3가지를 소개한다.

1. 패륜아의 화해법, 그리고 은밀한 거래

1) 경상도 순흥(順興, 영주의 옛 지명)에 사는 치걸이란 자는 어느 집의 머슴이었는데, 동네 사람 김후선과 치고받고 싸우다가 그를 죽게 했다. 그러자 김후선의 아들 김암회는 아버지가 목매어 죽었다고 가장하여 재빨리 매장하고는 치걸과 사사로이 합의를 하겠다며 금품을 요구했다. 이에 치걸은 그가 요구하는 대로 평생 뼈가 빠지도록 일해서 번 돈을 갖다 바치고 겨우 처벌을 면했다. 그런데 웬걸, 김암회가 무려 14년이 지난 뒤에 다시 찾아와 금품을 요구했다. 이에 치걸이 응하지 않자 김암회는 당장 관아로 달려가 치걸이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라고 고발했다.

2) 정조 임금은 치걸은 사형을 감면하여 특별히 가벼운 쪽으로 처리하여 먼 곳에 귀양을 보내라 명하고, 오히려 김암회는 저지른 죄악이 윤리에 크게 어긋나며 흉악하고 교활하기에 엄한 형벌로 처벌하라고 분부했다.

3) 다산이 말하다: 조사 내용에 따르면, 김암회는 아버지의 원수와 사사로이 화해하고 아버지의 시신에 목을 맨 모양으로 조작했습니다. 이는 아버지를 제 손으로 직접 살해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이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아버지의 시신을 돈과 바꾼 것이고, 그것도 모자라 14년이 지난 후에 재물을 요구하다가 받지 못하자 고발한 것입니다.

초검과 재검에서는 모두 치걸에게만 중점을 두고 조사하고, 김암회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나치게 격식에 얽매어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사로이 화해한 일에 대한 처벌의 조문이 있고,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일에 대한 처벌의 조문도 있습니다. 김암회는 이 두 가지 죄목에 모두 해당하는데, 특히 그에게는 시역(弑逆)의 죄를 물어 엄히 다스려야만 나라의 윤리와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53~55쪽)

2. 짦은 순간의 자기 결정과 그 책임

1) 황해도 어느 고을에서 도둑이 김성빈이라는 사람의 집에 몰래 들어가 부엌의 솥을 열고 고기를 훔치다가 붙잡혔다. 김성빈이 멱살을 움켜쥐자 궁지에 몰린 도둑은 들고 있던 칼로 그를 찔렀고,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사건이 한밤중에 일어났고, 이튿날 피의자가 곧바로 죽었기 때문에 사건 자체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러던 중 은단이라는 여자아이가 한밤중에 뒷간에 가느라 밖에 나왔다가 허둥지둥 달려가는 이삼봉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동네 아이들에게 하였다. 관원이 당장 이삼봉을 불러 그날 밤의 행적을 캐묻자 우물쭈물 변명을 하다가 끝내 자백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의문에 빠졌던 이유는 피살자 가족이 김성빈의 피살에 대해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성빈의 아내와 딸은 그의 죽음을 관아에 알리지 않았고 신문을 할 때도 그때의 상황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

2) 정조 임금은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고기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발각되어 다급한 마음에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게 한 것은 우발적인 일이었다고 판단했다. 정상을 참작해볼 때 이삼봉에게 애초에 죽일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엄하게 형장을 친 다음에 석방하라고 분부했다.

3) 다산이 말하다: 황해도 산골 백성들의 풍속에서는 도둑의 칼에 가족이 찔려 죽은 경우에 피살자의 가족은 훗날 범인으로부터 보복당할 것을 걱정하여 관아에 고발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예입니다. 수령이 명명백백하게 범인을 적발하여 극형에 처하지 않으면 후에 범죄자는 석방이 되어 가족에게 앙갚음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웃집에 들어가 고기를 훔친 이삼봉은 본래 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급한 상황에 처해 칼로 위협한 뒤에 도주하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합니다.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그러한 정황을 충분히 헤아려볼 수 있지만 '잠시라도 선하다면 즉시 성불할 수 있고, 잠시라도 악하다면 의롭고 용맹한 사내라도 끝내 살인을 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삼봉의 경우는 저지른 죄가 너무 악랄하니 사형을 면할 수 없다고 봅니다.(87~89쪽)

3. 그를 어떻게 벌할 수 있겠는가?

1) 평안도 정주에 사는 동방녀라는 여인이 남편 몰래 이명철이라는 사내와 간통을 했다. 남편 문중진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명철이 도리어 몽둥이를 들고 찾아와 문중진을 죽여버리겠다고 설치며 온갖 악다구니와 함께 협박을 했다.

이에 분노한 문중진은 며칠 뒤 동방녀의 오빠 동방영과 함께 동방녀를 앞세우고 이명철을 찾아가서 다짜고짜 폭행을 했다. 이명철은 얼마나 심하게 얻어맞았던지 꼼짝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8일 만에 죽고 말았다. 문중진, 동방영, 동방녀 이렇게 세 사람이 모두 폭행에 가담했기에 주범을 누구로 봐야 할지 판단하기가 무척 혼란스러운 사건이었다.

2) 정조는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문중진을 어떻게 벌할 수 있겠는가? 문중진은 본디 남편이고, 이명철은 간통한 사내다. 간통한 사내가 본디 남편을 찾아가 겁박을 하고 몽둥이를 들고 패악질을 했기에 문중진은 너무나 분해서 폭행할 때 더욱 매섭게 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철이 8일만에 죽었다는 사실로 보아 현장에서 죽일 생각으로 폭행을 가한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원칙에 따라 문중진의 목숨으로 살인 행위를 보상시킨다면 앞으로 못나고 연약한 보통의 사내들이 아내를 빼앗기고서 감히 누구에게도 따져 묻지 못할 것이다. 문중진을 잡아다가 형장을 때린 뒤에 석방하라. 동방영은 특별히 석방할 것이나 동방녀는 애초에 사건의 발단이 되었으므로 엄히 형장을 때린 뒤에 유배지로 보내도록 하라.'

3) 다산이 말하다: 신이 보기에 '간통한 사내를 죽인 경우 목숨으로 보상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대명률(大明律)>과 우리나라 법전 어디에도 이런 규정은 없고, 그저 옛날부터 백성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명률>에서는 간통한 아내는 본래 간통한 사내와 죄가 같다고 했습니다. 간통한 사내만 혼자 죽고 간통한 여자는 아무 죄도 묻지 않는다면 법률에 어긋납니다. 따라서 여자는 간통죄로 처벌한 뒤에 남편의 뜻에 따라 돈을 받고 다른 사내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간통한 사내를 죽인 경우에 그에게 사형을 내려 목숨으로 보상하도록 하는 것은 온당한 판결이 아닙니다.(130~132쪽)

책을 읽고나서 정조가 사형 판결을 내린 사건이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조는 의혹이 많아서 결론을 내기가 어려운 사건에 대해서는 최대한 가벼운 형을 내린다는 원칙에 따라 관용적인 판결을 내렸다. 정조가 친히 점검하고 판결을 내린 1,112건의 사건 중에서 사형 판결은 단 36건(3.2%)에 그칠 정도여서 이런 원칙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알 수 있었다.(12쪽)

정조 시대의 살인사건에서 정조와 다산은 모두 법과 인정을 함께 고려하여 판결해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살인을 저질렀을 때 법대로 죄를 적용하면 사형이지만 인정을 고려하여 사형을 면해주는 일이 많았다. 법이 판결의 기준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을 절대시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전근대 시대의 왕정에서 인정을 고려하여 일반 백성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