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도정일 '만인의 인문학'
[장서 산책] 도정일 '만인의 인문학'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1.06.14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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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은 우리 시대의 공적 지식인
도정일이 던지는 '뜨거운 실천이성'의 인문 에세이

이 책의 부제는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로서의 인문학'이다. 저자 도정일은 전 경희대학교 영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문화운동가이며, 우리 시대의 대표적 인문학자다. 2011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설립을 주도하여 초대 대학장을 역임했다. 2001년 시민운동 단체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과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어린이 전문도서관인 '기적의 도서관'을 전국 14개 도시에 건립하였고, 2006년 이후 전국 각지에 70여 개의 학교도서관 설치를 지원했으며, 영유아를 위한 '북스타트' 운동 및 교사를 위한 독서교육연수 프로그램을 주도해왔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인문학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처럼 삶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을 '삶의 인문학'으로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삶의 인문학은 삶을 살아가는 기예이자, 예술로서의 인문학을 의미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시학'이란 말로 부르고자 하는 것도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로서의 인문학이다.

삶을 성찰하고 창조해나가는 인간, 자기 존재의 확장을 부단히 시도하는 인간, 공생의 윤리 위에 만물을 서로 연결하는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시학이라는 생각을 저자는 갖고 있다.

목차는 '1부 만인의 시학, 2부 만인의 인문학, 3부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되어 있으며, 1부에는 '사람은 누구나 작가' 외 10편의 에세이, 2부에는 '행복의 경제학' 외 29편의 에세이, 3부에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했는가' 외 6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저자가 1990년부터 2014년까지 각종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한 원고들을 한 권으로 묶은 것이 이 책이다.

1. 사람은 누구나 작가

우리 중에 이야기로 친구들을, 남과 나를, 나와 세상을 연결짓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형식의 연결끈으로 세상을 배우고 사람들을 알게 되고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나 자신을 이야기하고 친구들을, 사업을, 사랑을, 꿈을 얘기하고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나눈다. 이야기할 뿐 아니라 우리는 이야기를 원하고 이야기를 요구한다. 재미난 이야기에 깔깔 웃고, 슬픈 이야기에 울고, 감동적인 이야기에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고약한 이야기에는 분노한다. 세상은 온통 이야기의 그물망으로 덮여 있고, 인생살이는 이야기의 그물망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며 진행된다. 인생은 이야기다. 할머니들은 "내 인생을 이야기로 쓰면 소설 10권으로는 모자라"라고 곧잘 말한다. 우리 작가들에게는 "내 얘기를 써달라"며 엄청난 분량의 이야기 소재를 들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게 누구의 인생이든 인생은 이미 이야기보따리다. 이렇게 보면 인생살이가 이야기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도, 새로운 통찰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ㅡ 인생이 한 편의 혹은 여러 편의 이야기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라는 것의 중요성을 오히려 잘 인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노상 공기 마시며 살면서도 그 공기의 중요성을 잘 모르듯 말이다.(28~29쪽)

우리의 아이들에게, 자라는 세대에게, 그들이 자기 이야기의 작가이고 주인공이라고 말해주는 것도 시학의 눈으로 인생을 대하는 사람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너는 네 자서전의 작가이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준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자라 모두 위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위인이 안 되어도 좋다. 그가 한 사람의 아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면 그보다 더 큰 성공과 성취가 있을까? 진작부터 전기 쓰듯, 자서전 쓰듯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아이들은 반드시 삶의 '모델'을 찾아 나설 것이고, 그 모델을 찾기 위해 과거의 인물들과 자기를, 친구들과 어른과 자기를 끊임없이 연결할 것이다. 그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자신을 모델링하면서 위대함의 감각을 키우고 공존의 정의를 배우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는 영웅을 마뜩찮게 생각하지만, 성장기의 아이들에게는 영웅이 필요하다. 영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위대함에 대한 모든 감각은 모든 도덕의 초석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위대함의 감각은 교과서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웅담, 신화 같은 것에서 직관적으로 얻어진다는 말도 그는 덧붙였다. 영웅담·신화 말고도 전기·자서전·모험담·성장소설 등을 거기 보탤 수 있다. 세상이 나쁜 이야기들로 뒤덮이지 않도록 어른들이 신경써야 하는 것은 그런 세상에서는 아이들을 아름다운 인간으로 키워내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33~34쪽)

2. 행복의 경제학

'행복'만큼 주관적인 것도 없다. 사람마다 행복의 모양새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다. 가난한 섬마을 아이들은 개펄에 뒹굴며 놀아도 행복하고, 비단옷 입은 제왕은 용상에 앉아서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경우가 허다하다.

행복이라는 것이 학문, 특히 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여겨져 온 것은 행복의 이런 높은 주관성과 가치 연관성 때문이다. 과학은 검증과 측정과 체계화의 단단한 절차들을 요구한다. 이 사람에게는 행복인 것이 저 사람에게는 행복도 아무것도 아니라면 행복을 측정할 객관적 기준을 뽑아낼 길은 막막해 보인다.

그런데 요즘 사정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사회과학자들이 행복 연구에 뛰어들고 있고, '행복학'이란 것을 새로운 학문영역으로 올려세워보려는 움직임도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경제학자들의 행복 연구다. 이 분야의 개척자 가운데 하나인 리처드 이스털린, <행복의 경제학>을 쓴 마크 애니엘스키는 모두 경제학 교수이다. <행복과 경제학>의 저자 브루노 프라이도 취리히대학교 경제학자다. 최근 프랑스어로 변역되어 꽤 많은 독자를 얻었다는 <행복: 신학문의 교훈>의 저자 리처드 레이어드는 런던 경제대학교의 저명 교수다. <행복의 역설>을 쓴 그레그 이스터브룩도 경제학자다.

행복 연구에 뛰어드는 것은 행복의 결정자 가운데 경제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행복의 경제학'을 말하는 경제학자 중에 어느 누구도 부의 축적이 행복의 열쇠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에 따르면 돈은 행복을 결정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인간자본, 사회자본, 자연자본, 환경자본, 재정자본) 중의 하나이다. 다른 요소들이 모자라거나 찌그러져 있을 때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행복의 파랑새는 물 건너간다는 것이다. 지난 50년간 전 세계적으로 소득 증대와 경제 번영이 진행되었지만, 그 덕분에 사람들이 더 행복해졌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이것이 '행복의 역설'이다. 물질자본은 증가했으나 행복감은 증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역설의 골자다. 부가 증대하면 할수록 오히려 불행감은 더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를 내놓는 경제학자도 있다.

이런 역설은 왜 발생하는가? <행복과 경제학>의 저자 브루노 프라이의 진단은 "돈보다 민주주의가 행복에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공동체를 함께 일구고, 운명을 자기 손으로 결정하는 민주적 '자율성'이다. 다른 경제학자들도 예외 없이 행복과 공동체, 행복과 민주적 시민사회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언급한다. 진단이 이 경지에 이르면 행복의 문제는 경제학을 넘어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요즘 영향력이 대단한 하버드대학교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웰빙'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적 덕목, 연결망, 공동체의 안전 같은 무형의 '사회자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해온 사람이다. 이런 주장과 경제학자들의 진단 사이에는 상당한 친연성이 있다. '웰빙'을 말하는 지금의 한국인들이 곱씹어볼 대목이다.(159~161쪽)

3.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했는가

현대 생물학의 발견 가운데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했는가?"라는 질문의 생물학적 추구와 해답이다. 생물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과 신인류(Homo sapiens sapiens)의 결정적인 차이가 '인간의 언어능력'이라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네안데르탈인들도 현생인류처럼 직립보행에 도구 사용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그들 나름의 소통수단(일종의 언어)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해부학적으로 밝혀져 있다. 언어가 결정적 차이였다면 그 결정성은 네안데르탈인의 언어능력과 신인류의 언어능력 사이에 존재했던 차이의 폭으로 좁혀진다. 언어학과 생물학 쪽의 결론은 네안데르탈인들이 '외마디' 언어 또는 극히 단순한 기호구성력을 가졌던 반면, 신인류는 복합적이고 복잡한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전자가 낱말로 소통했다면, 후자는 그 낱말들을 꿰어 '문장'을 만들고, 그것도 복잡한 문장을 만들 줄 알았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사냥을 나간 네안데르탈인들은 사냥감이 나타났을 때에만 소리를 질러 그것의 출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인류의 사냥방식은 다른 것이었다. "저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멧돼지가 나타나면 이쪽으로 몰아라. 우리가 이 바위 뒤에 숨었다가 몽둥이로 때려잡겠다." 이 사냥방식은 '계획'과 '전술'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네안데르탈인들의 방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하고, 이 우수성은 생존경쟁의 승자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 우수한 계획, 전술, 음모를 가능하게 한 것은 복잡한 언어 구사능력이다.

현대 생물학의 이 인간 발견이 교육과 문화에 던지는 함의는 크다. 우선 그것은 인간에게 정교한 언어교육이 왜 중요하며, 정확한 언어구사력 훈련이 왜 필요한가를 새삼 깨우치게 하고, 문학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무언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 그것은 지금의 영상문화적 '단순 문장의 시대'가 문화적으로 인간 퇴보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320~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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