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나’란 무엇인가?(2)
[인문의 창] ‘나’란 무엇인가?(2)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0.04.29 13:19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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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연결망이 끊어지는 것이니, 무수한 사람이 동시에 죽는 것과 같다. 장례식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망자(亡者)에 대한 가지고 있던 분인의 1/n이 빠져나감을 또렷이 의식하기 때문이다.
영화 ‘원 데이’(One Day)의 주인공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이다. 서로가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함께 있지 못한 다는 것 보다 더 불행한 게 어디 있을까. 단 하루(one day)만이라도.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 문장이 깊이 각인 되어있다. “Whatever happens tomorrow, we’ve had today”(내일 어떻게 되던, 우린 오늘 함께 있잖아). 죽음의 슬픔을 피하려는 단출한 문장이다. 출처=위키백과
영화 ‘원 데이’(One Day)의 주인공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이다. 서로가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함께 있지 못한 다는 것 보다 더 불행한 게 어디 있을까. 단 하루(one day)만이라도 하면서 말이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 문장이 깊이 각인 되어있다. “Whatever happens tomorrow, we’ve had today”(내일 어떻게 되던, 우린 오늘 함께 있잖아). 죽음의 슬픔을 피하려는 단출한 문장이다. 출처=위키백과

세속적으로 볼 때 죽음은 일단 모든 것의 종말이다. 그 토록 애지중지 간직해왔던 갖은 추억과 관계들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니 말이다. 처음엔 가족과 작별을, 그 다음엔 세상과 결별하는 순서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의 전부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왜 슬플까? 그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과 그리움이 사리지고, 앞으로는 더 이상 추억을 만들지 못할 거란 아쉬움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가지는 슬픔의 공통점은 어쨌든 ‘대체(代替) 불가능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체 불가능성’이란 오직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앞으로는 어떤 추억도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일 게다. 그는 지구에서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란 의미다. 그러니 슬플 수밖에. 죽음이 주는 슬픔을 이같이 애달프게 이해하며 우리는 여태껏 살아왔다. 제1部에서 ‘나란 무엇인가?’는 ‘나’의 존재를 중심으로 살펴봤다면, 한걸음 나아가 2部에서는 ‘죽음의 슬픔’을 또 다른 측면인 ‘분인’(分人)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리는 매일 주위의 타자(他者)들과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거듭해간다. ‘나’라는 개인은 이런 소통을 통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분인(分人)들의 덩어리인 셈이다. 그래서 인적(人的) 네트워크라는 망(網)을 통해 확보한 집합체가 바로 ‘나’이며, 동시에 한 ‘개인’이며 한 ‘인간’이란 뜻이 된다. 좀 어렵게 설명됐지만, 결국 ‘나’란 바로 ‘분인들의 집합체’다. 분인은 반드시 살아있는 몸을 가진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인터넷으로만 교류하는 어떤 대상이어도 괜찮고, 자기가 좋아하는 문학, 음악, 미술 일 수도 있다. 반려동물인 개나 고양이와의 연결되는 ‘분인’도 우리는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구를 어떻게 사귀느냐에 따라 ‘나’ 속의 분인들의 구성 비율이 바뀌게 되지만 그 총체인 n이라는 ‘자아’ 즉 ‘나’는 하나이다. 10년 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달라졌다면, 그 까닭은 교제하는 사람들이 많이 바뀌었다는 말이며, 따라서 망(網) 크기가 바뀌고 읽는 책이나 살고 있는 장소가 바뀌어서 분인의 양과 질의 구성 비율이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가깝게 지내던 연인(戀人)과 헤어져서 다른 연인과 사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당신 자신이 연인을 대하는 분인들에 변화가 왔을 게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개성이나 과 인격은 날 때부터 타고난, 일생 동안 불변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말이다.

죽음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잃으면 왜 그토록 여러 사람들이 슬픈가. 망자(亡者)를 통해 생성된, 분인들 가운데 1/n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그 사람 앞에서만 냉큼 나타나던 분인의 삶도 마침내 끝났다는 말이다.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고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지인의 죽음이 끔직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인들의 망(網)이 모두 끊어졌다는 의미다. 한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들의 연결망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연결된 네트워크의 그물들이 연쇄적으로 끊어짐을 뜻한다. 예로 망자(亡子)와 연결되어있던 지인(知人)의 숫자가 만 명이라면, 만 명들이 각자 따로 그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분인들이 동시다발적 대규모 죽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실연(失戀)보다 훨씬 큰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일 게다. 실연의 경우에는 비록 작게나마 ‘나’ 안에 분인으로 남아있지만, 죽음의 경우에는 분인이 사라져 더 이상 연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대체 불가능한 상황에 빠졌다는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상대와의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갱신(업데이트)되면서 활성도(活性度)가 유지되지만, 상대가 죽어서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면 이제 두 번 다시 분인을 갱신(更新)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을 이제껏 구성하던 분인 하나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1/n이 사라졌으니, 그 상실감에 대한 슬픔이 클 수밖에 없다.

부고(訃告)의 슬픔은 대개 뒤늦게 밀려온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순간에 바로 눈물 흘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충격은 받았지만, 얼마동안은 도무지 실감이 안 날 때도 있다. 분인이 빠져나가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우연한 순간에 고인(故人)을 떠올리며, 그의 부재(不在)를 통감하고 내가 사랑했던 타자(他者), 요컨대 고인과의 분인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의 분인은 망각 속에서만 존재할 뿐 갱생될 기회는 더 이상 없다. 갱생이 불가능한 분인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이다.

한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들 끼리의 연결망이 끊어지는 것이니, 무수한 사람들 속에 간직하던 분인들이 동시에 죽는 것과 같다. 장례식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망자(亡者)에 대한 가지고 있던 분인의 1/n이 빠져나감을 또렷이 의식하게 된다.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오든(W.H.Auden)의 시(詩)가 울려 퍼졌을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먹먹해지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 모두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까. 사진은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 ‘앤디 맥도웰’(Andie MacDowell)이다. 출처=위키백과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오든(W.H.Auden)의 시(詩)가 울려 퍼졌을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먹먹해지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 모두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사진은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 ‘앤디 맥도웰’(Andie MacDowell)이다. 출처=위키백과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는, 오든(Auden)의 시(詩)가 나온다. 「장례식 블루스」(Funeral Blues)라는 제목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분인의 상실을 통한적(痛恨的)으로 읊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못해 아려온다.

그는 나의 북쪽이고, 나의 남쪽이며, 동쪽이고 서쪽이었다,

나의 일하는 평일이었고, 일요일의 휴식이었다.

그는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대화, 나의 노래였다.

사랑이 영원한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

별들은 이제 필요 없으니; 모두 다 꺼져버려.

달을 싸버리고 해를 철거해라,

바닷물을 쏟아버리고 숲을 쓸어 엎어라;

이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왜 슬플까? 그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과 그리움이 사리지고, 앞으로는 더 이상 함께 추억을 만들지 못할 거란 아쉬움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분인(分人)의 상실이 그 요체이고 근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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