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어느 총장에 대한 단상
[인문의 창] 어느 총장에 대한 단상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0.06.19 17:0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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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사람이 가져야 할 미덕으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으로 꼽았다. 그렇다. ‘겸손’은 시대를 가리지 않은 불변의 덕목이다.
1. 어거스틴(354-430)은 서방 기독교의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사람이 가져야 할 미덕으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으로 꼽았다. 위키백과
어거스틴(354-430)은 서방 기독교의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또는 히포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라고도 불린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물론 서양 철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sm)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그의 신학이 그리스도교 발전에 끼친 영향은 구원에 대한 교리를 정리한 사도 성 바오로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위키백과

 

신임총장의 취임식 날이다. 아침부터 대강당 주변은 축하객들로 붐빈다. 11시가 되자 학군단(學軍團)의 호위를 받으면 알록달록 학위복장을 차려입은 군단(群團)들이 대강당 입구로 질서정연하게 들어선다. 그 군단들이 강당 출입구에 발을 드려놓자마자 꽉 메운 축하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물결쳐 오른다. 오늘 취임하는 총장은 걷기에도 벅찬 헐렁한 검정색 가운과 사각모자 차림이다. 연신 입가에는 옅은 웃음을 띤 채 가볍게 목례하며 오른 손을 들어 축하객들에 겸연쩍게 답례한다.

대강당 단상에는 신임총장을 중심으로 좌(左)로는 국회의원을 포함한 기관장이, 우(右)로는 학교 이사장을 비롯한 동창회 관계자들이 엄숙하고 상기된 채 자리했다. 의례적인 식순이지만 오늘따라 진중하게 진행되는 듯하다. 개회, 국민의례, 약력소개, 취임선서, 열쇠인계, 이사장 식사(式辭), 내빈소개, 내빈축사, 취임사로 식순이 이어진다.

곧이어 신임총장에게 건넬 축하꽃다발 증정순서가 되었다. 단상(壇上) 아래에는 숨죽이며 교직원대표 총학생회장 총동창회장 등이 꽃다발을 가슴에 안은 채 호명(呼名)순서를 기다린다. 대표들은 직함이 호명되자 빠른 걸음으로 단상으로 올라, 축하 꽃다발을 신임총장에게 건넨다. 함박웃음으로 축하 꽃다발을 받아든 총장은 연신 고마움의 표시로 악수를 청한다. 받아든 꽃다발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전(儀典)담당 여직원에게 숨 가쁘게 넘겨진다. 어디서나 많이 보던 광경이지만 받는 자와 주는 자, 이것을 지켜보는 축하객들의 마음이 덩달아 한껏 들떴다. 축하행위는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의 설렘이요 들뜸이 일기 마련이다.

맨 마지막으로 받아든 꽃다발은 멀리서 봐도 화려하고 고와 보였다. 노란색과 흰색, 진홍색의 소륜을 한 다발로 묶은 꽃다발이다. 꽃다발이 전해지는 순간, 축하객들의 박수소리와 가벼운 환성이 좁고 긴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도망치듯 강당 밖을 빠져나갔다.

오늘의 주인공인 신임총장은 마지막으로 받은 꽃다발을 의전담당직원에게 넘기지 않고 머리 위 허공으로 치켜세우더니 다시 한 번 축하객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한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축하객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받은 꽃다발을 가슴팍에 움켜잡은 채, 한참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무거운 침묵이 그 공간을 온전히 감쌌다. 축하객들은 너나없이 온통 주인공의 거동과 동선(動線)에 맞추어졌다. 사각모자와 헐렁하고 두꺼운 학위복을 차려입은 주인공은 흐려진 달빛 속을 걷듯 천천히 그리고 유유히 단상 아래쪽을 향하는 것이 아닌가. 이례적(異例的)인 퍼포먼스로 보이기 십상이다. 단상에는 유력 기관장들이 이 광경을 보고 있지 않는가.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귓속말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어디로 누구를 향해 가는 걸까하면서. 장내(場內)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는 축하객들이 앉아있는 단상(壇上)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더니, 객석 맨 뒤쪽 출구를 향했다. 취임식이 아니라, 퇴임식이 되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맨 뒷줄에서 엉거주춤 발걸음을 멈췄다. 어떤 일군의 아주머니들 앞에서였다. 아주머니들은 멀리서 보기에도 옷 추임새가 색 바랜 청색 유니폼(制服)차림이었다. 그는 공손히 아주머니들에게 다가가 목례를 하더니 가슴팍에 품고 있던 꽃다발을 한 분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아주머니는 어쭙잖게 일어나더니 얼떨결에 그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총장은 귀속 말로 무언가 속삭이며 악수를 청한다.

조마조마하던 그 순간, 한 두 명이 박수를 터트리자 영문도 모르는 축하들도 덩달아 가세하니 순간 박수바다가 되고 말았다. 사회자(司會者)도 연유를 알리 만무했다.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 아주머니들은 학교에서 외주(外注)를 준 하청업체의 계약직근로자이며 주로 청소와 잡초제거가 주업이었다.

제22회(2003년)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전 세계 174개국에서 4197명의 선수가 참여했다. 대회 슬로건은 ‘Dream for Unity(통합의 꿈)’ 이었다. 위키백과
제22회(2003년)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전 세계 174개국에서 4197명의 선수가 참여했다. 대회 슬로건은 ‘Dream for Unity(통합의 꿈)’ 이었다. 위키백과

 

2003년 하계유니버시아드(Universiade)대회가 이 지역에서 열렸다. 지구촌 젊은이들이 참가하여 힘과 기를 겨루는 세계적 대회이며, 북한에서도 선수와 임원단이 참여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세계적 대회인 만큼 각국의 대통령이나 수반(首班)들이 대회에 많이 참석했다. 이 대학 총장도 이 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참석했다. 대회당일 본부석 스탠드에는 우리나라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이 참석한 관계로 경호가 삼엄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 대학 A교수가 이 대회의 상임집행위원이라 본부석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개회식이 막 시작될 무렴 주위를 살펴보는 순간 일반관중석 스탠드에 자외선 차단 모자(sun cap)를 쓰고 앉아있는 머리 희끗한 그 총장을 발견했다. 황급히 그 교수는 본부 스탠드를 완벽히 통제하고 있는 청와대 경호실 담당자에 음소하듯 간청하여 간신히 본부석에 한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A교수는 날듯이 기뻤다.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해 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곧 바로 일반 스탠드로 내려가 총장에게 본부석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귀속 말로 청하였다.

“교수님, 고맙긴 한데 여기가 더 편해요. 들락거리는 사람들에겐 이곳이 제격입니다. 제 옆에는 우리 대학의 학생회장도 있어 심심하지도 않습니다.”

“총장님, 그래도 제가 얼마나 힘들게 구한 자리인데요. 저와 같이 갑시다.”

그 총장은 여러 번 간청에도 끝내 거절하였다. 순간 서운함과 섭섭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아첨이 아니라, 도리로 생각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사람이 가져야 할 미덕으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으로 꼽았다. 그렇다. ‘겸손’은 시대를 가리지 않은 불변의 덕목이다. 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글이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음식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인간이 있고,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부패된 상태를 썩었다고 말하고 발효된 상태를 익었다고 말한다

겸손과 발효는 일란성 쌍둥이가 아닐까?

의전과 격식을 싫어했던 그 분이 그리울 때가 있다. 조그만 직책만 가져도 교만해져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는 세태(世態)이니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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