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혼네와 다테마에
[인문의 창] 혼네와 다테마에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1.02.03 17:00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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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은 언어 못지않게 중요하다. 해당 국가의 외국어를 아무리 완벽히 구사해도 상대 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이 부족하면 소통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기모노(着物)는 일본의 전통 의상이다. '일본 옷'이라는 뜻의 와후쿠(和服わふく)라고도 한다. ‘기모노’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입는 것’ (きるもの)으로 메이지 유신을 거쳐서 서양 의복이 도입된 이후 현대에 와서는 일본만의 독자적인 전통 의상을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일본문화의 전통적 의복이라 결혼식 등의 예복으로 사용된다. 위키 백과
기모노(着物)는 일본의 전통 의상이다. '일본 옷'이라는 뜻의 와후쿠(和服わふく)라고도 한다. ‘기모노’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입는 것’ (きるもの)으로 메이지 유신을 거쳐서 서양 의복이 도입된 이후 현대에 와서는 일본만의 독자적인 전통 의상을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일본문화의 전통적 의복이라 결혼식 등의 예복으로 사용된다. 위키 백과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특징짓는 말 가운데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라는 게 있다. 대인관계에서 '혼네'란 마음속에 있는 본심이라면, '다테마에'는 이와 반대로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로 돌려서 말하는 겉마음, 즉 포장언어을 말한다. 이런 일본인들의 이중적 언어구사 행태를 일본 관광여행 해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느 곳에든 친절하게 대하거나 웃는 모습에서 잘 들어난다. 일본인들은 혼네를 숨기고 다테마에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유난히 타테마에의 정도가 심한 곳은 도쿄 지방 사람들인데, 무사계급인 사무라이의 영향이 큰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사무라이는 다테마에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일본은 1192년부터 1868년까지 676년간 사무라이가 통치했다. 사무라이는 일본 봉건시대의 무사(武士)를 뜻한다. 본디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의 단어 시(侍)에서 나온 말로써 귀인을 경호하는 사람을 가리켰으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후 일반적인 무사를 가리키게 되었다. 주군(主君)을 잃은 사무라이는 로닌(浪人)이라 불리며, 칼솜씨를 제외하면 기술이 없어 특별한 직업 없이 유랑하거나 걸식하며 살인청부와 도적질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살육과 강간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았던 그들은 일본 다수의 평민 그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목을 쳤던 무자비한 패거리다. 대부분의 평민들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긴장된 위기의 나날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사무라이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었으며,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그들 나름의 방편으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하고 난해한 언어구사를 하거나, 아니면 속마음을 철저히 숨기고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의사소통 방법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런 대화법은 그들만의 자기 방어적 언어관습으로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문화를 배태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생존과 이웃과의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지금껏 일본에 자리 잡은 셈이다.

1443년(세종 25년) 신숙주(1417~1475)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을 다녀왔다. 그의 나이 26세 때다. 그가 돌아와서 쓴 '해동제국기' 에, 어떤 사무라이를 만났는데 오늘은 3명을 죽였다고 자랑하더라는 일화가 이 책 속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신숙주에겐 허튼소리를 함부로 했다간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 매사에 말조심하라는 뜻으로도 들렸을 게다. 늘 대인간 대화에서도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극단적인 말을 삼가하며, 가급적 서로 간 조화를 추구하려는 일본인의 기질특성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먼저 생각하고 조심하는 차원의 의사소통방법이다. 이런 대화법이 혼네와 다테마에의 역사적 탄생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요즈음에도 한국인 세일즈맨이 일본인과 상거래를 할 때, 일본인은 속마음으론 삼성스마트폰을 구입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지만 상대의 면전에는 싫다는 말을 하지 않고‘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라며 우회적으로 돌려 말함으로써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대화법을 사용한다. 일본인 간에도‘언제 한번 지나는 길에 우리 집에 한번 들러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다분히 서로 간의 조화를 깨지 않으려는 겉치레 포장언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길에 정말로 들렸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요?’하면서 되물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돌려 말하기 대화법을 내밀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주도적으로 평가해야할 기준점이 상대방의 시각에 맞춰져있음을 알 수 있다. 하여튼 일본사람들은 공사를 막론하고 친절해 보인다. 표면적으로 친절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 같기도하다.

독일 베를린공원에 설치된 孔子동상: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의 학문을 이르는 말이다.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名敎)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체면문화는 유교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위키 백과
독일 베를린공원에 설치된 孔子동상: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의 학문을 이르는 말이다.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名敎)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체면문화는 유교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위키 백과

일본에‘혼네’와‘다테마에’문화가 있다면 한국에는‘체면문화’가 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영향이 그 속에 강하게 배어있어 선비나 양반일수록, 이런 문화를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이런 문화는 소위 말하는 ‘고배경문화’(high context culture)의 전형이다. 고배경문화란 일반사회 구성원들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정보가 명백하지 않더라도 배경을 통해 은연중에 전달되는 문화를 말하는데,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암시적 의사전달방식에 의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유교문화와 체면문화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 볼 수 있다. 양반은 체면 때문에 소낙비가 내려도 절대로 뛰어서는 안 되며, 냉수를 마시고도 이를 쑤시며, 가난할수록 기와집을 짓는다든지,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식의 의식들이 전형적 체면문화 행태다. 사대부 가문에서는 아무리 어린 자식이 귀여워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을 금기시했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연스레 가질 수 있는 희로애락의 감정표현들이 체면문화로 억제되었다. 이런 유교적 의사소통구조를 보면, 평가하는 기준이 일본처럼 자신의 관점이 아닌 상대방의 시선과 관점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의 경우는 오로지 자신의 시선이나 관점에 기대어 행동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다.

연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독일에서 체류할 때 한국에서 꽤 평판이 높은 원로교수 한분이 뮌헨을 방문했다. 대학을 두루 구경하고 나서 나를 초청해준 독일인 교수와 환담을 나누게 되었다. 한국인 교수는 당시 우리나라 유교(儒敎)관련 학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라, 그의 명함에는 국학관련 직책과 각종 유림단체장의 직함들이 다채롭게 매달려 있었다. 명함을 받아든 독일 교수는 매우 놀라워하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내후년 1년간 연구년(안식년)인데 동아시아지역 연구투어의 일환으로 일본과 중국 대학으로부터 초청장을 이미 받아 두었다고 했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한국인 교수도 자신이 속한 학회에 그를 초청하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독일인 교수는 흡족해하며 자신의 수첩에 초청사실을 꼼꼼히 메모하며 강연발표논제를 이메일(e-mail)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한 학기가 지나갔다. 그는 나에게 발표주제를 건네주면서 한국인 교수로부터 공식초청장을 받고 싶다고 했다. 연구년 기간 동안에 연구투어 계획을 대학본부에 제출하면 여행경비가 지원될 뿐 아니라, 현지 주재 독일 대사관으로부터 편의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급히 한국인 교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초청장관련 일정조율과 발표주제 때문이다. 그때 아주 난감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 교수는 그때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를 끊으면서 내뱉은 마지막 말은 더욱 놀라웠다. 체면치레로 한번 해 본 말인데, 그 교수에게 잘 말씀드려달라는 것이다. ‘잘 말씀드려 달라’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습 불가능한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독일인 교수와 나의 관계는 서먹서먹한 사이로 변해갔다. 미국과 유럽 같은 저배경문화(low context culture)권에선 대화상대와 주고받는 메시지 자체에 모든 주요정보가 담겨있지만, 우리나라와 일본 같은 고배경문화권에는 메시지 자체에 정보가 거의 없다는 걸 간과한 결과였다.

외국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현지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문화를 잘 이해하는 것이 언어 못지않게 중요하다. 해당 나라의 외국어를 아무리 완벽히 구사해도 상대 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이 부족하면 소통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우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빚어지는 갈등과 마찰이라는 일종의 문화충돌(cultural clash)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 그 사회 구성원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에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할 때, 나의 기준과 시선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어떤 A라는 사회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상이 B라는 사회에서는 잘못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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