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샐러드볼과 멜팅포트
[인문의 창] 샐러드볼과 멜팅포트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1.08.06 10:00
  •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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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과 통합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샐러드볼에 기반한 통합만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어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 사회를 용광로 사회 또는 멜팅포트(Melting Pot)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여러 가지 재료들을 냄비 속에 넣고 녹여내듯 이민자들을 미국적인 가치와 문화 속에 통합·흡수하려는 정책을 표현한 용어이다. 출처 Pixabay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 사회를 '용광로 사회' 또는 '멜팅포트'(Melting Pot)라부르는데, 이것는 여러 가지 재료들을 냄비 속에 넣고 녹여내듯 이민자들을 미국적인 가치와 문화 속에 통합·흡수하려는 정책을 표현한 용어이다. Pixabay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30대의 원내교섭단체 사령탑이 된 이준석(36) 대표는 당선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공존입니다. 다양한 사람이 샐러드볼에 담긴 각종 채소처럼 고유한 특성을 유지한 채 같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가 샐러드볼입니다.” 여기서 ‘샐러드볼’은 무얼 말하는 걸까. 신임 대표가 말한 ‘샐러드볼’이란 서양 사람들이 즐겨먹는 ‘샐러드용 접시’(salad bowl)를 말한다. 샐러드볼에 담긴 다양한 야채들은 각자 고유한 맛을 잃지 않고 유지한다는 데 있다. 자신의 몸과 맛을 뭉개버리는 야채의 죽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샐러드볼 이론은 1970년대 캐나다에서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퀘벡州(Quebec)에서 처음 대두되어, 미국과 호주 등 이민자의 나라에서 활발히 논의되면서 국가통합의 한 방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세계화와 국제화가 날로 확산되면서 한 국가 내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빈번해졌고, 이것에 걸맞게 모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해야한다는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주류 문화로 군림해온 서구문화와 백인문화 중심에서 벗어나 비서구, 소수 인종 문화도 동등하게 존중하며 공존할 것을 주장하는 일종의 샐러드볼의 반영이다.

샐러드볼 사회와 대응되는 개념으로 ‘용광로’를 뜻하는 ‘멜팅포트’(melting pot)가 있다. 멜팅포트 이론은 인종, 민족 등 다양한 개별문화를 무시하고 하나의 커다란 공룡문화로 주조(鑄造)시키고자하는 것을 일컫는다. 뭉크러진 야채죽을 연상시킨다. 국가를 거대한 하나의 용광로로 보고, 수많은 이민자를 철광석에 비유하여 용해(溶解)시킨다는 논리다. 70년대 서구 모든 국가가 그러했듯, 현재 중국은 56개의 소수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국민의 다수인 한족(漢族)중심 통합정책을 쓰면서 하나의 거대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용해시키고 있다. 이는 멜팅포트(용광로이론)에 입각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쨌든 국가통합의 한 가지 방법이다.

멜팅포트라는 술어는 1908년 영국의 극작가 쟁윌(Zangwill)이 쓴 희곡 'The melting pot'에 기원한다. 여기서 그는 "미국은 신의 위대한 용광로입니다. 유럽의 모든 인종은 녹아서 새롭게 주조됩니다"라는 말을 했다. 출처: 위키백과
'멜팅포트'라는 술어는 1908년 영국의 극작가 쟁윌(Zangwill)이 쓴 희곡 'The melting pot'에 기원한다. 여기서 그는 "미국은 신의 위대한 용광로입니다. 유럽의 모든 인종은 녹아서 새롭게 주조됩니다"라는 말을 했다. 위키백과

미국은 현재 수많은 이민자들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인구 3억3천만 명의 나라로 백인의 비중이 70%이며, 흑인은 12%, 아시아계(3.5%)와 히스패닉 등 기타 민족이 10%를 형성하고 있어 그야말로 인종의 종합세트라 할 만 하다. 미국 내에서도 멜팅포터(용광로)와 샐러드볼 이라는 두 통합이론에 대해 찬반견해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미국인들은 자신을 국가의 일원으로보다는 독립된 개인으로 보는 경향이 크고 민족이나 인종은 자신을 구별 짓는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이 다양한 민족과 인종으로 구성되면서 다문화주의, 즉 샐러드볼에 대한 필요성이 점차 커지고는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미국의 분열을 우려해 멜팅포트 이론을 주장하는 의견 역시 상당하다.

한국에서도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이 일상화 된지 오래다. 법무부 출입국 자료에 의하면,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인 외국인은 2백20만 명으로 대구광역시 인구(현재 240만 명)에 버금간다. 이 중에 중국인이 1백만 명(47%), 베트남인이 20만 명(9%), 태국인 18만 명(8.4%), 미국인이 14만 명(6.5%), 우즈베키스탄인 7만 명(3%)에 이른다. 매년 유입되는 외국인은 계속 증가일로에 있다. 한때 단일민족과 단일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대한민국도 다인종, 다문화라는 세계적 추세를 거역할 수 없게 되었다.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슬로건으로 자부심을 가졌던 과거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어째든 국가통합의 가장 높은 단계는 샐러드볼에 기반한 사회적 통합에 있다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이 세계적 추세이다. 세계화 시대의 중심 세력은 다양한 문화의 공존을 자신들 활동의 기본 전제로 설정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다양성에 바탕한 통합은 각 문화의 차이를 기반으로 문화적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채죽, 말하자면 멜팅포트(용광로)가 1+1=1 이라면, 샐러드볼은 1+1=2가 되니 시너지효과가 명료해 보인다. 인종이나 민족의 다양성을 이용해 각 문화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토록 하는 게 관건이다. 이런 시대조류에는 통합에 대한 창의성과 유연성이 생존의 핵심 역량이 된다. 창의성과 유연성은 다양한 관점, 다양한 의견, 다양한 해석 없이 고양되지 않는 법이다. 미국 NBA 농구의 전설적 감독 필 잭슨(P. Jackson)의 일화는 문화적 다양성을 통합해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그는 시카코 불스에서 9년간 여섯 번이나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그의 명성은 마이클 조든(M. Jordan)이라는 최고의 농구스타 제조기가 아니라 조든과 로드먼(D. Rodman) 그리고 다른 팀원들과의 완벽한 팀워크를 만들어낸 데 있었다. 그는 조든의 출중한 개인 플레이 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조든의 역할을 낮추는 대신 팀원 전체의 고른 역할 안배에 충실했다. 한국의 축구를 세계적 반열에 올려놓은 히딩크(G. Hiddink)의 일화도 한몫한다. 그 역시 개인플레이가 아니라 팀 중심의 축구문화를 구현했다. 통합의 핵심어는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샐러드볼 이론은 이민자들을 기존문화에 통합 및 흡수시키려는 멜팅포트 이론과 달리, 다양한 문화들의 독립성과 공존을 중시한다. 출처: Pixabay
'샐러드볼 이론'은 이민자들을 기존문화에 통합 및 흡수시키려는 '멜팅포트 이론'과 달리, 다양한 문화들의 독립성과 공존을 중시한다. Pixabay

유대인들의 교육철학은 세상이 인정한다. 그들의 자녀 교육은 ‘남보다 뛰어나게’가 아니라 ‘남과 다르게’에 중점을 둔다. 우열을 다투는 경우 승자는 언제나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저마다 남과 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진작 깨달은 민족이다. 남해의 한려수도나 캐나다 온타리오의 천 개의 섬이 아름다운 것은 다른 모양의 섬들이 한데 어울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통합의 핵심어는 ‘다양성’이다.

지구상에 이념갈등이 사라지고 난 뒤 새롭게 등장한 종교갈등을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종교적으론 진작 높은 단계의 샐러드볼 대열에 합류했다는 말이 나온다. 전 세계에서 불교와 기독교, 유교, 천주교를 골고루 믿으면서 서로 조화롭게 융화하며 지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는 것 같다. 실제로 불교의 비구니, 천주교의 수녀, 원불교의 정녀들이 정기모임을 가질 정도로 종교문화가 샐러드볼처럼 성숙했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오히려 당황해할만하다(?). 멜팅포트(용광로)처럼 모든 문화를 녹여서 새롭게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샐러드볼처럼 양상추는 양상추대로 땅콩은 땅콩대로 사과는 사과대로 자기 맛을 잃지 않는 조화로움이 성숙한 통합이고 공존이다. 통합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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