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기획] 오래된 친구, 이제 그녀와 작별해야 한다
[테마기획] 오래된 친구, 이제 그녀와 작별해야 한다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0.09.21 10:00
  • 댓글 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쨌든 그녀와 작별해야한다. 그 흔한 통속적 작별공식인 성격차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치사한 금전문제는 더 더욱 아니다. 그러니 괴롭다.
별
소설가 최인호(1945-2013)가 쓴 장편소설로 1972년 9월 5일부터 1973년 9월 14일까지 모모신문에 연재되었는데, 한 젊은 여성의 성적 편력을 통해 1970년대 소비문화의 문제점을 노출시킨 애정소설이다. 매일신문 DB

그녀와 어쨌든 작별해야 한다. 그 흔한 통속적 작별공식인 성격 차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치사한 금전문제는 더 더욱 아니다. 그러니 괴롭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하면, 유식한 이별법이라며 냉소나 조소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답해야만 할 것 같다. 믿어 줄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늦가을이었다. 연상녀(年上女)였다. 단풍이 곱게 물들 즈음으로 기억된다. 누구의 소개도 없이 느닷없이 스치듯 만났다. 운명의 덫이라고나 할까. 내 작은 눈으론 예지와 지성미가 넘쳐 흘렸다. 만나자마자 오감이 망가질 정도로 푹 빠졌으니 오죽했겠는가. 콩깍지 낀다는 말이 그리 흉볼 일 아님을 순간 직감했다. 콩깍지는 아무나 끼나 하면서 말이다.

하루 출발은 그녀로 시작해서 그녀로 끝이 났다. 척박한 권위주의 시대는 길고도 암울했지만, 함께 있는 걸로 행복했고 외롭지 않았다.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 출입이 잦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조국의 앞날과 현실을 연계시키며 완곡하게 현실참여를 만류했다. 지금이 데모나 할 정도로 한가한 때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조국과 애국이 그녀의 심장이었고 지지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늘 거대 담론에 갇혀 사는 듯도 했다. 변화와 저항에는 무감각해졌으니 늘 편하고 포근했다. 세상을 보는 그녀의 시선은 날카로웠고 논리는 정연했다. 그런데 그 논리를 뛰어 넘을 대안도 식견도 내겐 없었다. 그러니 하루하루 끌려 다니며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미증유 마력에 의해 내 영혼마저도 조종당하듯 로봇이 따로 없었다.

‘소설(小說)’엔 문외한으로 일찌감치 먼발치로 밀쳐놓았지만, 그녀 덕분에 설렘만은 호수에 일렁이는 잔물결처럼 늘 내겐 아른거렸다. 신춘문예라는 장르가 서울 한복판 종로에 물결치던 시절이다. 신인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신년 초면 거의 모든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당선작을 선발하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곤 하였다. 이병주, 박종화, 최인호, 이문열과 같은 작가들도 이 물결 속에서 힘껏 노를 젓고 있었다.

여류작가 신경숙, 정이현도 이에 뒤질세라 곧이어 쪽배에 합류했다. 당찬 우상(偶像)과도 같았던 그녀는 이들 소설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니 그녀는 소설 텔러(teller)였고 난 리스너(listener) 역할에 만족하며 살았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 읊는다'는 옛말도 있지 않던가. 그저 난 풍월을 읊는 반풍수 노릇이었다고나 할까. 하기야 반풍수가 집안 망친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소설 세계로 조금씩 눈을 뜨게 해준 건, 진한 쌍꺼풀 진 그녀 덕분이었다. 이런 모든 게 버거웠지만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일간신문 연재소설 실타래의 하루치에 긴장감을 야기하는 극적 반전은 늘 끄트머리에 놓여있음을 그녀는 넌지시 알려주었다. 지금 모 방속국의 연속극 ‘기막힌 유산’이 보여주듯 하루치 마지막 장면은 진짜 그랬다. 다음 얘기를 듣게 만드는 얕은 잔꾀임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서로의 사랑흐름을 확인하는 통로 구실을 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을 얘기해줄 때는 혼줄을 놓게 만들었다. 주인공 경아의 찌그러진 편력에 내 일상을 포개 보기도 했다. 경아의 당돌함이 알의 껍질을 벗는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의 고뇌처럼 오히려 포근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달콤한 나의 도시'는 소설가 정이현(1972~)이 쓴 장편 소설로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일간신문에 연재되었다. 이 소설은 서른한 살의 오은수를 주인공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미혼 여성들의 일과 연애, 친구와 가족, 그리고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내었다. 문학과지성사
'달콤한 나의 도시'는 소설가 정이현(1972~)이 쓴 장편 소설로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모모신문에 연재되었다. 이 소설은 서른한 살의 오은수를 주인공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미혼 여성들의 일과 연애, 친구와 가족, 그리고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내었다. 문학과지성사

 

곰팡이 냄새 풍기는 다방 구석에 넋 놓고 앉아, 정이현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를 그녀로부터 듣노라면, 서른 한 살의 주인공 오은수의 불투명한 미래가 나의 내일과 겹쳐지며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다. 젊음이라 한들 낭만까지 담보되지 않음을 은근히 암시하는 것 같아서 그녀도 작가도 한편 얄미운 생각이 일기도 했다. 그런들 어찌하겠는가만. 한때 쳇바퀴 도는 일상에 무료하고 따분해하는 나를 달래주려고 ‘광수생각’이란 만화(漫畫) 콩트 시리즈물을 자주 밀애하듯 보여주었다. 만화는 세태를 비꼬는 내용이었고, 여야(與野)를 가리지 않고 비틀었다. 아찔했으나 후련함이 더 컸다. 저급한 것으로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사만화에 언제부터인가 흠뻑 취해 비틀거리는 팬이 되고 말았다.

이런 발칙한 그녀와 작별해야 한다. 처음 그녀와 만나는 날도 오늘처럼 가을비가 내렸다. 가을비는 예나 지금이나 스산하고 오싹하다. 바로 그날 그녀는 쪼글쪼글한 흰 비닐우의를 몸에 둘둘 말아 입고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의 밖으로 삐쭉이 터진 실밥 사이로 매캐한 휘발유 냄새가 내 코 끝을 자극했다. 아직도 그 진한 냄새가 내 뇌리 속에 눌러 붙어 떠나질 않는데, 작별이라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달라 만났건만, 그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니 뭔가 잘못된 것 같기도 하다. 남이 봤을 때 이별통보 구실을 찾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두렵기는 하다. 구차와 궁색이란 낱말이 허공에 맴돈다. 공식 작별의 멘트를 맘속으로 작성했다. ‘세상은 변했는데 너는 여전히 한 곳만을 바라보는구나. 세상을 움직이려는 자(者)는 쪼잔하게 한 곳만을 보지 말고, 크고 멀리 그리고 넓게 세상을 봐야하지 않겠니.’ 검은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온통 세상이 검게 보인다는 걸 그녀는 알고나 있는지 측은한 생각도 든다. 근래에는 하루종일 대안없는 비판만 쏟아내니 너의 존재 이유를 더욱 잊게 만들어 버렸다. 그건 그렇다고 치자. 쌓여진 그리움의 찌꺼기는 어쩔 것인가. 그걸 담아두기에는 내 가슴이 너무 작고 왜소하다. 처음 만난 날 우의(雨衣) 입은 그녀의 교복명찰을 스치듯 얼핏 보니 ‘모모신문(某某新聞)’이었다. 그녀의 호적상 이름이다. 그녀와 어쨌든 작별해야 한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