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남자로 살아가기
경상도 남자로 살아가기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0.09.16 10:0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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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료를 넣지 않은 토종 된장찌개는 당장 식감을 돋우지 못해도 물리는 법은 없다. 바로 이 '맛'(味)이 경상도 사나이의 '멋'(美)이다.
해병대를 버금가게 용감하고 무뚝뚝함이 경상도 사나이의 매력이고 절제된 멋이며 넘치는 박력이라 흔히 생각해왔다. 상남자의 전형처럼 말이다. 사진(위)은 용감하기로 유명한 미해병대(美海兵隊)의 훈련모습이다. 위키백과
해병대를 버금가게 용감하고 무뚝뚝함이 경상도 사나이의 매력이고 절제된 멋이며 넘치는 박력이라 흔히 생각해왔다. 상남자의 전형처럼 말이다. 용감하기로 유명한 미 해병대(海兵隊)의 훈련모습. 위키백과

만추가 가까워지고 있다. 세간에 이런 말이 있다. 잘 생긴 남편을 만나면 1년이 행복하고 돈 많은 남편을 만나면 10년이 행복하고 마음이 따뜻한 남편을 만나면 평생 행복하다고 한다. 또 예쁜 아내를 만나면 3년은 행복하고 착한 아내를 만나면 평생 행복하다고 한다. 부부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최고라는 이야기다. 따뜻한 사람과 착한 사람이 되려면 원만한 소통이 전제되어야 함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경상도 남자들은 퇴근 후 집에서 딱 세 마디 말만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아는! 밥도! 자자!’라는 말이다. 주석을 달지 않아도 대충 감이 잡힌다. 아이들은 별일 없고, 지금 배가 고프니 밥을 주고, 집안일 다 봤으면 잠이나 자자라는 해학적 말이 아니겠는가. 무뚝뚝하고 무식함이 베어나도록 만들어낸 우스갯소리가 경상도 남자의 가슴에 멍을 때린다. 은근슬쩍 싸잡아 비하하는 말로도 들린다.

아내가 오랜만에 동창회에 다녀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왜 이래 늦었노’라고 말하는 표현법에 익숙하다. 별 생각 없이 그냥 담백하고 가식 없이 내뱉은 어투다. 듣기에 따라서 아내에게 염장 지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해본 것 같다.

오랫만에 딸 가족이 귀국했다. 별일 없었느냐는 인삿말을 해놓고는 침묵모드를 유지하거나 내 방으로 간다. 내 방에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갈 뿐이다. 그것을 대화법이나 처세술의 하나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사위와도 의례적 인사를 하고나서는 더 더욱 별다른 할 말이 없다. 그냥 각자 스마트폰에 열중함으로써 침묵의 공간을 애써 메워나가기 일쑤다.

직장 옆방의 동료는 서울 출신이다. 점심식사 후에 그의 방에 잠시 들렀다.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어투로 봐서는 연인에 가까울 정도로 음성이 조곤조곤 정겹게 들린다. 점심식사는 무엇으로 했는지부터 시작하여 소소한 얘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웃 방 동료가 왔는데도 힐끗 쳐다만 볼 뿐 전화를 끊지 않는다. 눈만 끔뻑일 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와의 통화였다. 경상도 남자와 달라도 많이 달라 보인다. 점심식사 후에 안부조로 부인과 통화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지만, 옆방 동료가 왔으면 얼른 전화를 끊는 것이 경상도식 예법이 아니던가. 이런 처신이 군대에서 흔히 사용되는 야전교범(Field Manual)이다.

부부간 안부 차원의 통화내용은 누가 들을까봐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이 경상도 남자들의 일반적 정서이다. 지금껏 그 무뚝뚝함이 경상도 사나이의 매력이고 절제된 멋이며 넘치는 박력이라 생각해왔다. 상남자의 전형처럼 말이다.

무뚝뚝함과 과묵함은 다른 것 같다. 무뚝뚝함은 다정하지 못하고 뻣뻣하며 멋대가리 없다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게 배어 있다면, 과묵함은 말수가 적고 침착하다는 긍정적 의미가 강하게 풍겨져 나온다. 경상도 남자들은 무뚝뚝함일까 아니면 과묵함일까. 어쩐지 오금이 저려오다 못해, 간담이 서늘해진다.

시대가 변했다. 소통과 공감이 중요해졌다. 더 이상 무뚝뚝함이 경상도 남자의 표상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 같기도 하다.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은 속마음은 없는 것과 진배없지 않는가.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속마음은 무(無)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태껏 눈치, 직관, 행간 읽기, 암시와 같은 선문선답식 소통방식을 경상도 사나이의 표상으로 여겨왔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마음)로 비유한다면, 혼네의 대화법에 가깝다.

평생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앞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영웅담 삼아 하는 말이 아니라 쑥스럽고 간지러워 못할 뿐이다. 아내가 동창회에 다녀왔을 때 ‘왜 늦었노!’ 라는 표현법도 늦음을 책망하거나 질책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걱정과 관심이 짙게 깔려 있다. 단지 화려한 표현법을 사용하지 못했을 뿐인데.

조미료를 넣은 된장찌개는 향신료 맛에 물려 재빨리 넌더리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미료를 넣지 않은 토종 된장찌개는 당장 식감을 돋우지 못해도 물리는 법은 없다. 바로 이 맛이 경상도 사나이의 멋이다. 위키백과
조미료를 넣은 된장찌개는 향신료 맛에 물려 재빨리 넌더리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미료를 넣지 않은 토종 된장찌개는 당장 식감을 돋우지 못해도 물리는 법은 없다. 위키백과

경상도 남자들도 변명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항변이 있다. 이런 비유를 곁들이면서 말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는 어떤 것일까. 조미료와 향신료를 많이 넣은 된장찌개는 물론 맛이 좋다. 일반 대중식당에서 늘 경험할 수 있는 요리법이다. 아무리 소문난 맛집이라 해도 줄곧 그곳에서 식사할 수는 없다. 그 얕은 향신료 맛에 물려 재빨리 넌더리가 나기 때문이다. 조미료를 넣지 않은 토종 된장찌개는 당장 식감을 돋우지 못해도 물리는 법은 없다. 바로 그것이다.

화려함보다는 구수한 감칠맛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 경상도 남자들의 외롭고 애처로운 분석법이고 해석이 아닐까. 이런 단풍잎이 물들어가는 계절에, 이런 궁색한 비유까지 들어가며 항변하자니 왠지 초라하고 궁상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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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숙 2020-09-25 17:11:13
장기자님의 구수한 된장찌개 같은 글 공감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부부란 오래 살다보면 말 안해도 알게되고 이해되는 부분도 많지요. 그래도 조금만 표현해 주면 그야말로 생활의 윤활유 같이 일상이 좀 더 매끄러워지지 않을까요? 모든건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아요. 처음이 어렵지 하다보면 익숙해 집니다. 말로 하기가 쑥스럽다면 문자를 남겨 보세요.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결국엔 다 떠나고 부부만 남게 되는데 꼭 할 말만하면 너무 무미건조하고 대화가 단절될 것 같아요. 장기자님의 알콩달콩한 제2의 삶을 응원합니다.

김철환 2020-09-17 13:15:31
재미있는 기사 잘 읽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다소 다르겠지요.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재미나게 읽었네요.

정영태 2020-09-17 07:37:05
남자는 섹스를 원하고 여자는 사랑을 바란다고 하잖아요.
자질구레한 여러 말보다는 “아는, 밥도, 자자.” 세 단어에 모든 걸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경상도 사람이 아니면 이해 못 할걸요.
잘 읽었습니다.

강세정 2020-09-17 00:07:45
경상도 남자로 살아가기도 하나의 생존법으로 굳어진 문화로 보입니다. 서울문화,전라도 문화가 있듯이 말이지요. 유머가 곁든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기다리겠습니다.

강현아 2020-09-16 22:44:44
공감합니다.조미료를 넣지 않은 토종 된장찌개는 당장 식감을 돋우지 못해도 물리는 법은 없다는 비유법이 멋집니다. 다음 글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