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기억과 망각
[인문의 창] 기억과 망각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0.01.03 12:48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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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이란 도대체 뭘까? 예컨대, 어제 본 사람이 지금 보는 사람과 같기 위해서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아야 하며, 심지어 어제의 나뿐 아니라 어제의 사람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오직 이 경우에만 ‘같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같음을 찾아내는 능력이 기억력이다. 기억력으로 모든 능력이 평가되는 세상, 부와 명예와 권력을 독차지하는 세상을 우린 왜 수용할 수 밖에 없을까?
케이트 윈슬렛(Kate Winslet)은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라는 영화의 여주인공이다. 이 영화는‘기억’을 지워주는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신선한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전체 스토리는 사랑의 고통을 피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방법은‘망각’이란 흐름으로 전개된다.  출처: 위키백과
케이트 윈슬렛(Kate Winslet)은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라는 영화의 여주인공이다. 이 영화는‘기억’을 지워주는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신선한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전체 스토리는 사랑의 고통을 피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망각’이란 흐름으로 전개된다. 출처: 위키백과

 

우리는 기억과 망각을 늘 마주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또 남과 여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찾아오니 어쩌면 세상이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과 망각, 둘 중에 어느 것이 생존하는데 더 유리할까? 어리석은 우문을 던져본다. 부부가 기 싸움을 할 때 오래전에 기억해두었던 아내나 남편의 허점들이 갑자기 생각나질 않을 때의 억울함은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회의와 낭패감까지 들 때가 많다. 이 모든 망각의 주범을 세월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씁쓸함과 자존감이 상하는 일이다.

오늘날처럼 극단적 자본주의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경쟁으로 시작하여 경쟁으로 끝이 나는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니 무한경쟁시대에는 무조건 이겨야 산다. 무기를 들지 않을 뿐 전쟁이나 다름없다. 1점 차이로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오직 기억이라는 기제에 종속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예로 학교시험이나 행정고시와 사법고시, 각종 다양한 자격시험, 기업체의 입사시험도 기억력의 장기보존 여부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 여기서 패자는 그 사회에서 늘 루저(loser)로 취급받게 되는 시스템에 우리는 길들여져 있을 뿐 아니라 갇혀있다.

결국 머릿속 뇌에 저장된 데이터들을 시의 적절하게 잘 끄집어내는 능력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지만,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불공정함이나 불합리함을 항의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기억력이 엄청 떨어지는 사람을 어쨌든 1급이나 2급 기억력장애자로 구분하지도 취급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법정 장애의 종류는 15가지 유형이 있는데,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로 크게 나뉜다. 신체적 장애는 내부장애와 외부장애로 구분된다. 장애의 등급에 따라 각종혜택이 국가기관으로부터 받는데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선천적인 인과관계가 성립됨에도 말이다.

그저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숭고한 신이 부여한 만고의 진리로 믿는다. 기억력은 마치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선과 악, 승자와 패자를 구별해주는 아킬레스건과도 같다.

사실 그렇다면 기억력이란 도대체 어떤 실체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예컨대, 어제 본 사람이 지금 보는 사람과 같기 위해서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아야 하며, 심지어 어제의 나뿐 아니라 어제의 사람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오직 이 경우에만 나는 사람에 대해서도 혹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같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같음을 찾아내는 능력이 기억력이다.

기억이 망각보다 우월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는 견해는 이미 플라톤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 뿐 아니라, 작금의 현학들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가 서양철학의 주류였다면, 니체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기존의 플라톤적 이분법을 전도시키고 있어서 한편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역설적이게도 기억이 부정적이고 수동적 활동이라면, 망각은 능동적이며 창조적 활동력을 돕는다는 것이다.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기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망각의 기능이 파손되거나 멈춘 인간은 심지어 소화불량 환자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에 한편으론 고개가 끄떡여진다.

니체(Nietzsche)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기존의 플라톤적 이분법을 전도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역설적이게도 기억이 부정적이고 수동적 활동이라면, 망각은 능동적이며 창조적 활동력을 돕는다는 것이다.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기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망각의 기능이 파손되거나 멈춘 인간은 심지어 소화불량 환자로 비유하기도 한다.
니체(Nietzsche)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기존의 플라톤적 이분법을 전도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역설적이게도 기억이 부정적이고 수동적 활동이라면, 망각은 능동적이며 창조적 활동력을 돕는다는 것이다.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기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망각의 기능이 파손되거나 멈춘 인간은 심지어 소화불량 환자로 비유하기도 한다. 출처:위키백과

 

여기서 말하는 니체의 망각 개념은 기억을 초월하는 능동적인 힘, 기억을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으로 보고 있다. 가령, 지난여름 바닷가 해수욕 중에 끔찍하게 죽은 친구의 모습을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면, 바다는 지금도 참기 힘든 괴로움과 악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망각이 기억을 넘어 내적 투쟁으로까지 발전할 때, 비로소 과거의 괴로움과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 두뇌가 컴퓨터처럼 과거에 입력된 모든 데이터들을 내가 필요하든 말든 그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떠오른다면, 하루도 온전하게 살기 힘들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두뇌에는 기억이라는 견고한 기제도 내장되어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망각의 기제도 함께 작용한다는 것이 참 다행이고 행운이다. 막무가내로 검색만 하면 언제든지 저장된 내용이 끄집어내지는 컴퓨터적 기억능력 보다, 우리 두뇌는 취사 선택적 기제에 의해서 작동된다는 점에서 한결 더 인간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홍용선이 쓴 아래 글을 보자.

 

“우리는 기억을 못해 낭패를 당하지만, 망각 때문에 평안키도 한다. 기억을 해서 욕 나오고, 망각해서 욕을 먹는다.”

 

어쨌든 망각과 기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오래전에 본 영화가 생각난다. 짐 케리와 케이트 윈슬렛 그리고 커스틴 던스터가 주연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이다. 이 영화는 ‘기억’을 지워주는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신선한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평범하고 소심하며 착한 조엘과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클레멘타인은 서로의 다른 면에 끌려 사랑하게 되었는데, 결국 어느 날 그들은 심하게 다투고 나서 헤어지고 만다. 그런데 조엘은 뒤늦은 후회를 하고 그녀를 찾아가 사과를 청한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거듭된 두 사람간의 갈등에 지친 클라멘타인이, 잊고 싶은 기억만 지워준다는 ‘라쿠나사’라는 첨단기법 서비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고통을 피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망각’이라고 주장한다.

타자와의 만남 자체는 늘 기쁨뿐 아니라 고통도 함께 수반되기 마련인데, 이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은 결국 망각에 의존될 수밖에 없다. 진은영은 ‘장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기억의 불편함을 토로한 것이 참으로 진지해 보인다.

 

“신발이 꼭 맞으면 발을 잊는다. 허리띠가 꼭 맞으면 허리를 잊는다. 마음이 편안하면 시비를 잊는다. 만남이 편안하면 안으로 흔들림을 겪지 않고 밖으로 쫓아다니지 않는다. 처음부터 편안해서 불편함을 한 차례도 느끼지 않은 것, 이것이 편안함조차도 잊는 편안함이다.”

 

이상의 글에서 보면,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불편하다는 증거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문열의 소설 『레테의 연가』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내일이면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 그 남자는 건강하고 쾌활하고 성실하다.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의 이름은 앞으로의 내 삶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있어서 결혼은 하나의 레테다. 우리는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강 이편의 사랑을 잊고, 강 건너의 새로운 사랑을 맞아야 한다.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오직 그 새로운 사랑만으로 남은 삶을, 그 꿈과 기억들을 채워야 한다.

내가 새삼 이 낡은 일기장을 펴드는 것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미혼 시대를 향한 결별의 허심한 목례, 또한 여기에 담겨진 기억들을 망각의 불 속으로 던져버리기 위한 마지막 작별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레테(Leth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강으로, 아케론(슬픔), 코퀴토스(비탄, 탄식), 플레게톤(불), 스틱스(증오)와 함께, 망자가 건너야 하는 저승에 있는 다섯 개의 강 가운데 하나다. 망자는 누구든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되는데, 강물을 마신 망자는 과거의 모든 기억이 깨끗이 지워지며 전생의 번뇌를 모두 잊게 만든다는 것이다.

청춘남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이 레테(망각의 강)를 건너야함을 이 소설은 비유적으로 그리고 있다. 여성만이 레테의 강을 건너게 하고 남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걸 보면, 남성 우월적 시각이 투영된 것 같아서 한편 씁쓸하다. 요즈음은 남성도 결혼을 하게 되면 레테의 강을 건너야하는 시대가 도래한지 벌써 오랜데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억만큼 망각도 이승이나 저승에서 대단한 능동적 삶의 존재방식임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 앞에 ‘라쿠나사’의 서비스가 성형수술만큼 일상의 평범한 모습으로 언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기억만이 우대받는 현실에서 보면 아이러니하지만, 망각 또한 삶에서 필수불가결하고 존중받아야 할 기제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오직 기억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공룡처럼 보이지만, 망각 또한 기억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망각 역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기억을 지우고 싶을 때가 더 많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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