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적당한 거리두기의 기술
[인문의 창] 적당한 거리두기의 기술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1.03.24 10:0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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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은 비즈니스 상대와 사이에 책상을 두는 것에 익숙하지만, 남미인은 책상의 존재를 장애물로 여긴다. 거리두기는 문화에 따라 다르며, 옳고 그름은 아니지만, 의사소통의 단절을 야기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똑같은 병을 가진 연인의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둘은 6피트 이하로 접근해서도, 접촉해서도 안 되는 병을 가진 ‘스텔라’와 ‘윌’의 이야기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안전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빠져든다. 거리두기가 문제였다.위키백과
영화 '파이브 피트'(Five Feet Apart)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5피트의 거리를 통해서 풀어내고 있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안전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빠져든다. 거리두기가 문제였다. 위키백과

'거리두기’하면 언뜻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Five Feet Apart'라는 영화인데, 우리나라에는 2019년 봄에 ‘파이브 피트’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바 있다. 미국의 로맨스 영화로, 손익분기점의 3배가 넘는 6천만 달러의 대흥행을 거두었다. 제목만 봐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5피트’의 거리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선천성 희귀병을 앓고 있는 두 남녀는 사랑하지만, 접촉했을 땐 감염균을 전염시킬 수 있기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늘 5피트(약 1.5m)의 거리를 둬야 하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이지만 허그도 키스도 할 수 없고 손조차 잡을 수 없다. 제목이 그렇듯 5피트는 요즈음 회자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와 우연히 일치한다. 2019년은 코로나가 지구상에 없던 때다. 주인공 둘은 그토록 ‘친밀한 거리’를 갈구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로 만족해야 했으니 억지춘향이 따로 없어 보인다. ‘거리두기’가 도대체 뭐길래 사랑도 못하게 하는 걸까?

‘거리두기’는 인간관계의 친밀도를 측정하는 척도로 사용되는 ‘침묵의 언어’다. ‘침묵의 언어’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무언의 행동이나 거리두기로 소통하는 ‘공간언어'(proxemics)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타인과 대화하고, 같이 산보하고, 같이 웃고, 같이 춤을 추기도 한다. 상대와 늘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이때 심리적 밀당이 생기기 마련이다. 밀당은 정말 힘든 싸움이다. 코로나 시대에 사용되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단순히 물리적 거리로 ‘비말이 튈 수 있는 거리’만을 의미하기에 여기서 말하는 심리적 거리와는 다르다.

에드워드 홀(1914-2009)은 4가지 인간관계 거리를 처음 제시했다. 4가지는 다음과 같다. 밀접한 거리(Intimate Distance),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공적인 거리( Public Distance). 위키백과
에드워드 홀(1914-2009)은 4가지 인간관계 거리를 처음 제시했다. 4가지는 다음과 같다. 밀접한 거리(Intimate Distance),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공적인 거리( Public Distance). 위키백과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Hall)에 의하면, 상대와 통상적 대화를 나눌 때 북미사람들은 50cm를, 남미사람들은 36cm를, 중동지역 사람들은 22cm 거리로 떨어져 얘기하는 게 가장 편안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가까이 접근하려는 브라질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럴 수 있다. 심리적으로 편하지 않으니까. 이런 미국인들의 거리두기를 브라질 사람들은 내심 냉담함이나 차가움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무의식적 신체 움직임은 브라질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특별히 의식적으로 친해지기 위한 것도, 상대를 피하려고 것은 아니다. ‘문화적 환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학습되고 체득된 된 것을 그저 단순히 실행한 것뿐이다. UN과 같은 국제회의장에서 칵테일 파티가 열릴 때에는 195개국의 195개의 문화가 서로 문화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실제로 어떤 외교관은 대화 상대 앞으로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또 다른 외교관은 겸연쩍어하면서 뒤로 물러서기도 하며, 또 다른 외교관은 옆으로 바싹 붙어 귓속말로 속삭이며 다가서기도 하기에, 마치 상대를 떠보는 ‘곤충의 교미’를 연상시킨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아닐까. 홀은 다음과 같이 거리두기를 4가지로 구분한다. 한번 새겨볼 만하다. 거리두기에서 첫째는 ‘친밀한 거리’이다. 이성 간 구애 행위를 할 때나, 위로와 보호가 필요한 경우에 사용되는 거리두기인데, 신체적으로 완전 밀착상태인 0cm에서 45cm까지 거리를 말한다. 상대방에 대한 신체적 체취나 체온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거리로, 아무리 동료나 선후배 사이라고 하더라도 이 공간을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이 공간은 자기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사적인 공간이므로 이 영역을 침범 당하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나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

둘째로 ‘개인적 거리’는 45cm에서부터 1.2m까지이다. 양팔을 벌려 원을 그렸을 때 만들어지는 거리로, 가족이나 친한 친구 사이의 일상적 대화를 할 때 허용되는 거리다. 이 경우에는 두 대화 당사자의 허락 없이는 대화에 끼어들 수 없는 거리다. 격식과 비격식이 공존하는 경계지점이다. 셋째로 ‘사회적 거리’는 1.2m에서 3.6m까지의 거리이다. 직장에서 공적인 업무로 대화할 때 주로 사용되며 참여자들 간에 이탈이 자유롭다. 대화 중에 제3자가 끼어들기도하고 빠지기를 허용하는 거리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지극히 개인적 질문이나 스킨십이 허용되지 않기에, 정중한 격식과 예의가 요구된다.

넷째로 ‘공적인 거리’는 4m에서 8m사이의 거리인데, 대화 상대를 특별히 의식할 필요가 없으며 큰 목소리나 제스춰을 통해서만 대화가 가능한 거리다. 연설이나 강연할 때 주로 사용되는 거리이기에 참여자들의 정중한 격식과 예의가 요구된다. 청와대나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할 경우에 대통령과 기자 사이의 거리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4m이상 떨어져야, 기자도 대통령도 편안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대인관계를 할 때 상황에 맞는 적절한 거리두기를 해야, 서로가 쾌적하고 편안함을 가질 수 있다. 거리두기는 이처럼 신비롭고 이색적인 침묵의 언어다. 모든 개별 문화들은 거리두기라는 공간언어에 대해 일정한 행태와 태도를 갖고 있다. 이런 중요한 암묵적 규범이 아이러니하게도 무의식 중에 학습된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어린이에게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50cm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나라는 없다. 저절로 학습된다는 말이다. 보통 일상대화를 할 때 적절한 거리를 대륙별로 봤을 땐, 똑 같은 대화상황을 전제한다면 남유럽 문화권의 사람들은 북유럽권의 사람들보다도 거리를 가깝게 유지하며, 남미와 아시아 사람들은 아랍인과 미국인이 취하는 거리의 중간이다. 거리두기의 크기를 대륙별로 보면, 미국, 북유럽 > 남유럽 > 아시아 > 남미 >중동 순으로 좁아진다.

거리두기는 특히 국제 비즈니스를 수행할 때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자신의 사무실 내의 공간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지 않을 경우, 비즈니스 상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워진다. 미국인은 자신과 비즈니스 상대 사이에 책상을 두는 것에 익숙하지만, 남미인 대부분은 책상의 존재를 불필요한 장애물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인이 유지하고자하는 개인적 공간에 자꾸 끼어 들어가려고 하고, 미국인은 반대로 개인적 공간의 침해로 받아들이며 불쾌감을 느낀다.

또 하나 극단적인 예로 독일인은 자신의 개인적 거리유지를 자아의 연장선상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지키려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 일반적으로 사적인 합의가 있을 경우에만 사무실 문을 닫는 미국인과는 달리, 독일인은 사무실 문을 언제나 닫으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인들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지 않는 걸로 생각한다. 더욱이 독일인은 상대가 대화 중에 의자를 자신 쪽으로 가까이 이동시키려하면 매우 불편하게 여긴다. 그래서 독일인은 사무실에 붙박이 가구를 설치해 두는 걸 선호한다. 그렇게 하면 상대가 제멋대로 의자를 움직일 수 없으며, 개인적 공간에 자의적으로 침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례로 미국에 특파된 독일 신문기자는, 상황에 따라 의자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방문객들의 행동을 견디지 못해, 자기 사무실 방문객용 의자를 바닥에 나사로 고정시켜 버린 경우도 있다. 사무실 문을 열어두어야 하는지 닫아두어야 하는지, 거리두기 문제는 그 나라의 문화에 따라 다르며,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지만, 심각한 의사소통 단절을 야기할 수 있다. '거리두기의 다름'을 하찮은 불안감과 애매모호한 감정을 유발하는 걸로 간과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런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커뮤니케이션의 성공기회나 직업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찬스로 작용하는 건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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