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세 마리 개를 몽땅 팔아 버릴까?
[인문의 창] 세 마리 개를 몽땅 팔아 버릴까?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0.02.24 23:10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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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동굴의 비유’(Plato’s Cave)에 따르면 동굴에 갇힌 인간은 굴 안에 켜진 촛불로 인해 벽에 비추인 그림자를 진리로 여긴다. 자신들이 평생 봐온 그림자를 진짜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편견과 선입견을 운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청년 플라톤(Platon)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러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스승'이 아니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연상의 '친구'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제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본 뒤 일생을 철학에 바치기로 결심했으며, 그의 합리적 방법과 윤리적 관심을 이어받았다.
청년 플라톤(Platon)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본 뒤 일생을 철학에 바치기로 결심했으며, 그의 합리적 방법과 윤리적 관심을 이어받았다. 출처: 위키백과

누구나 마음속에 세 마리의 개를 키운다. 여기서 ‘개’란 뜻은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볼 견(見)자’를, ‘개 견(犬)자로 바꾸어 비유적으로 사용했다. 이 세 마리 개의 이름은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그저 웃고 넘기기에는 예사롭지 않은 개들의 이름이다. 누구든 ‘편견’과 ‘선입견’은 각자의 마음속 동굴에 꽈리를 틀고 앉아 함께 살아간다.

가볍게 이야기해서 편견과 선입견이지, 이 두 마리의 개는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갖는다는 뜻의 ‘벽견(僻見)’ 이나 ‘색안경’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하다. 문제는 일이 생기게 되면, 이 두 놈은 오로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해 버리는 주관적 태도가 문제다.

이와는 다른 한 마리의 개가 있긴 하다. 늘 고개를 숙이지 않고 꼿꼿이 대상(對象)만을 응시한다. 그러니 다루기도 쉽지 않고 외통수에 가깝다. 이 개의 이름은 부르기가 좀 길긴 한데,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는 개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는 데 방점을 두며, 사교성에는 다소 둔감한 충견(忠犬)이다. 이 개는 언제나 느지막이 주인의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이 개의 애칭으로 흔히 ‘일견(一見)’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놈은 늘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간다.

‘일견’이 어느 날 느지막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선입견’과 ‘편견’은 슬슬 자리를 피하지만 둘을 완전히 쫓아낼 수는 없다. 구태여 쫓아낼 필요도 없다. 대장균은 우리 몸 대장(大腸)에 기생하며 살아가지만 인체에 필요한 성분들을 합성해주고, 소장(小腸)에서 내려온 음식물 찌꺼기를 분해하여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러니 대장균과 사람은 공생관계이며 필요악이다. ‘편견과 선입견’도 마찬가지다. 필요악이란 말이다.

편견과 선입견이란 개는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 개는 사람의 마음속에 ‘미리 들어가 대상을 보고 가치를 판단해주는 역할’을 한다. 미리 들어가 있는 개 없이는 실제로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 예로 갓난아기는 마음속에 ‘미리 들어가 무엇을 보는 견해나 관점’이 전혀 없다. 텅 비어있다. 미리 들어가 있는 개가 없으니 편견과 선입견도 있을 리 만무하다.

가다머(Gadamer)는 저서 '진리와 방법'에서 "틀을 깨면 안보이던 세계가 보인다"고 했다.여기서 틀이란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고정관념을 뜻한다. '우물 안에 개구리'라는 속담처럼 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의 한계를 말한다. 출처: 위키백과
가다머(Gadamer)는 저서 '진리와 방법'에서 "틀을 깨면 안보이던 세계가 보인다"고 했다.여기서 틀이란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고정관념을 뜻한다. '우물 안에 개구리'라는 속담처럼 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의 한계를 말한다. 출처: 위키백과

미리 들어가 있는 개의 가치관은 스스로 직간접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다. 어떤 경험들이 갓난아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그 아이의 삶의 존재방식이나 인생관과 가치관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시시각각 맞닥뜨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선택과 판단은 미리 들어가 있는 개의 숫자와 질에 따라 결정되니 참 무서운 개다. 먼저 들어와 꽈리를 튼 개의 마리 수와 질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갓난아기 때 서둘러 들어와 있는 개들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누구에게나 똑 같은 모습과 내용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서로 다른 개성의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아이들뿐 아니라 소년이 된 학생들도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개를 학습 받는가에 따라서 그 학생의 ‘보는 눈(관점)’이 결정되며, 그 ‘보는 눈’이 그의 가치관을 결정하게 된다. 일란성 쌍둥이도 유전학적으로 똑같지만 생각이 다른 것도 같은 이치다. 인간 세상이 닫힌 세상이 아니라, 열린 세상인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말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인간이다. 말하자면 먼저 들어가 있는 개, 즉 선입견이 시키는 대로만 보게 되고, 시키는 대로 사리 판단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동굴에 사는 속박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실체'의 '그림자'이지만, 그것을 실체라고 믿어 버린다. 똑같이, 우리가 현실에 보고 있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즉, 세상 만물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고 동굴 밖에 실체가 존재하며 인간은 그 실체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굴에 사는 속박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실체'의 '그림자'이지만, 그것을 실체라고 믿어 버린다. 똑같이, 우리가 현실에 보고 있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즉, 세상 만물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고 동굴 밖에 실체가 존재하며 인간은 그 실체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처: 위키백과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따르면 동굴에 갇힌 인간은 동굴 속에 켜진 촛불로 인해 벽에 비추인 그림자를 진리로 여긴다. 자신들이 본 그림자만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오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각자의 선입견, 즉 동굴의 우상(偶像)을 가질 수밖에 없다.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사물의 실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란 것이다.

서로 다른 우상을 갖게 되는 원인은 그가 받은 교육이나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에 근거한다. 또한 그가 읽은 책이나 존경하는 사람의 권위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타인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능력이나 인품보다는 출신 학교, 학위, 용모, 성별, 연령, 종교, 직위나 계급 등을 더 우선시 하지나 않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전적으로 마음속에 들어있는 선입견이란 개에 의해서 조종당한 결과이니 하는 말이다. 이런 선입견이나 편견이 개입되지 않고 얼마나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 곱씹어 보게 된다.

사회적 편견도 만만치 않다. 중국인들은 자신을 ‘중화’(中華)라하고 한국 사람들을 ‘동이’(東夷·동쪽의 오랑캐)로 호칭한 것 역시, 편견과 선입견이란 개가 처 놓은 덫에 걸린 결과다.

‘최악의 연애는 독일 여자와 영국의 레스토랑에서 데이트하는 것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영국 음식은 맛이 없고 독일인은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편견에서 비롯된 말이니 독일인이나 영국인이 들으면 짜증이 날만도 하다.

매주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벌어지는 각종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미리 들어와 있는 개의 조종에 의해서 참석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유럽에서는 버스나 기차에 경로석이 없다. 나이를 기준으로 위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누가 가장 불편한 사람인가에 오직 위계를 두고 있다. 우리 속담에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이 유럽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오직 갈증(渴症)의 정도에 따라서 위아래가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유교(儒敎) 철학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3마리의 개를 몽땅 팔자니 영혼 없는 사람이 될 것 같고, 데리고 살자니 왠지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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