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행복 찾기의 기술
[인문의 창] 행복 찾기의 기술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1.07.07 10:00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존재가치에 치장과 포장을 통해서 새롭게 창조된 나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여성의 경우, 동창회나 결혼식에 명품핸드백을 들고 참석한다거나, 남성의 경우에는 고급자동차를 타고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꾸밈을 통한 나의 모습을 극대화시켜, ‘감추어진 나’가 ‘본래의 나’를 덮어주길 갈구하기 때문이다
자아노출을 통해서 상대방과 더 친밀해질 수 있고 두 사람 간의 피상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아노출의 핵심은 노출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적절히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Pixabay
자아노출을 통해서 상대방과 더 친밀해질 수 있고, 두 사람 간의 피상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아노출의 핵심은 노출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적절히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Pixabay

우리는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늘 타인과 어떤 관계로든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이때 자아노출(self-disclosure)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효과적인 자아노출을 의식하며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나의 모습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비쳐질까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조하리(Johari)의 말을 빌리면,‘나’라는 모습은 하나가 아니라 네 개라는 것인데 언뜻 보면 생뚱맞은 말로도 들린다. 평소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다르다는 걸 은연중에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내 모습에 무척 신경쓰며 살아간다. 어떤 한 세일즈맨은 본래 낯가림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고객들로부터는 밝고 명랑하고 유쾌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고객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가면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면을 벗고 집에 돌아오면 이내 녹초가 되어 쓰러지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주말이면 밖에 나가지도 않는 집돌이, 집순이 되기 십상이다. 한 몸에 어쩔 수없이 본래의‘나’와 가면 쓴‘나’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예이다. 어디 세일즈맨뿐이겠는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비슷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니 말이다.

조하리는 모든 사람의 자아(自我)는 한 개가 아니라, 네 개의 창(窓)으로 만들어져있다는 게다. 이 네 개의 창을 통해 내 모습을 꼼꼼히 살필 때 원만한 대인관계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네 개의 창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조하리의 창’(Johari window)이라 일컫는다. 말하자면 ‘나’라는 존재의 이미지는 한 개가 아니라 네 개의 모습이란 말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도 알고 있고 나도 아는 자아를‘열린 자아(open)’라 부르며(성별, 키, 피부색), 또 남은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는 자아를‘눈먼 자아(blind)’라 부르고(몸에 밴 습관), 남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비밀스런 자아를‘숨겨진 자아(hidden)’라(비밀, 욕망) 한다. 마지막 남은 창은, 남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자아를 ‘알 수 없는 자아(unknown)’로(무의식 세계) 정의하고 있다. 좀 복잡해졌지만 아무튼 ‘나’라는 존재는 타인에게 네 개의 모습으로 비쳐진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내 자아는 하나야’ 하고 우긴다면 효율적 소통은 말할 것도 없고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남은 모르나 나만 알고 있는 내 자아’에 늘 관심을 갖게 되는데,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나만의 비밀스런 자아다. 앞에서 말한‘숨겨진 자아’를 말한다. 그러니 이 영역은 매일 매순간 타인에게 나를 어떻게 윤색(潤色)하여 보여 줄 것인지를 골몰하는 창이다. 어떤 방법으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왜를 의식하면서, 우리는 노출의 질과 양을 각색(脚色)하려 부단히 애를 쓴다.

자아의 존재가치를 치장과 포장을 통해서 새롭게 창조된 자아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여성의 경우, 동창회나 결혼식 모임에 명품핸드백을 들고 참석하여 꾸밈 영역을 최고도로 높여, 이런 모습이 ‘본래의 자아’로 착각하게 만든다. Pixabay
자아의 존재가치를 치장과 포장을 통해서 새롭게 창조된 자아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여성의 경우, 동창회나 결혼식에 명품핸드백을 들고 참석하여 꾸밈의 영역을 최고도로 높여, 이런 모습이 ‘본래의 자아’로 착각하게 만든다. Pixabay

이 영역의 창을 좀 더 넓혀보면, 자신의 본래 자아에 꾸밈과 장식이 추가되어, 새로운 ‘또 다른 자아’가 하나 더 만들어져 타인에게 노출되는 셈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모습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질지에 신경을 쓴다. 그렇다고 이런 욕구를 표리부동의 성정(性情)으로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타인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본능에 가까우니까.

우리가 문화권을 분류할 때도, 자아의 꾸밈 정도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으뜸 구분은 누가 뭐래도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다. 개인주의는 우리(국가) 보다는 나(개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협력이나 눈치보다는 개인의 개성이 훨씬 존중되는 사회이다. 그래서 ‘한 사람을 위해서 모두(국가)가 존재 한다’는‘all for us’란 말이 여기에 어울린다. 이런 문화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반면에 집단주의는 개인의 자유나 개성보다는 집단의 이익이나 조화가 우선된다. 그러니‘전체(국가)를 위해 개인이 존재 한다’는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따라서‘one for all’의 정신이 그 사회를 지배하는 토양이 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문화가 여기에 가깝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자아에 어떤 가면을 씌우며 사는지 한번 보자. 가면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집단주의 사회는 체면문화가 상대적으로 존중되기 마련이다. 자아의 존재가치를 치장과 포장을 통해서 새롭게 창조된 자아를 보여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우, 동창회나 결혼식 모임에 명품핸드백을 들고 참석하여 꾸밈 영역을 최고도로 높여, 이런 모습이 ‘본래의 자아’로 착각하게 만든다. 남성의 경우에는 고급자동차를 타고 모임에 참석함으로써, 가면 쓴 자아의 모습을 극대화시켜보려는 심사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감추어진 자아’가‘본래의 자아’를 덮어주길 갈구하기 때문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고급자동차를 타고 모임에 참석함으로써, 가면 쓴 자아의 모습을 극대화시켜보려는 심사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감추어진 자아’가‘본래의 자아’를 덮어주길 갈구하기 때문이다. Pixabay
남성의 경우에는 고급자동차를 타고 모임에 참석함으로써, 가면 쓴 자아의 모습을 극대화시켜보려는 심사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감추어진 자아’가‘본래의 자아’를 덮어주길 갈구하기 때문이다. Pixabay

장례식장에 가면, 식장 입구부터 길게 늘어선 조화행렬은 체면문화의 한 단면이다. 그 공간에는 양적으로 많이 전시되면 될수록, 자아나 체면이 상승하는 걸로 판단하는 문화다. 이런 사회는 자신의 행복을 객관적 자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과시를 통해서 체면과 행복을 찾게 된다. ‘상대의 거울’에 비쳐진 내 모습이 진정한 ‘자아’이고, ‘자신의 거울’에 비쳐진 내 모습은 오히려 초라한 ‘타자’로 취급되는 꼴이다. 어떤 장례식장에는 입구부터 분향소까지 30여개 이상의 조화를 도열해 둔 곳도 있다. 30여개의 조화 하나하나가 나의 존재가치를 대신한다고 믿는 문화이다. 30여개 하나하나가 내 자아로, 내 훈장으로 간주한다는 말이다. ‘내 진정한 자아’의 모습이 이런 거야 하면서 우쭐함에 빠져들기도 한다.

문화란 그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말한다. 우리 경조사 문화에서는 화환이나 조화의 수에 따라서, 그 집안의 가세나 체통을 가늠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짙게 깔려있다. 이런 형태의 문화를 우리사회는 어색하거나 생경스럽게 보는 경우는 드물다. 문화이기 때문이다. 문화라는 것은 구성원들이 만들어놓은 미덕이요 덕목이다. 문화권에 따른 가치체계는 그 사회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규정하는 행동의 준거가 된다. 가면에 의해 비춰진 자아에서 진정한 행복과 체면을 찾으려니 왠지 버겁고 힘들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