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해인사는 불타고 있는가?
[인문의 창] 해인사는 불타고 있는가?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1.06.03 17:0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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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안 떨어뜨리면 항명죄, 떨어뜨리면 역사의 죄인! 항명 결과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노발대발, 김영환, 내 이놈 죽여, 살려? 인류 역사에서 집단의 오류는 신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죽음을 미화(美化)했다
김영환 장군(1921-1954)은 명령불복으로, 이승만이 대노하여 즉결처분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배석하고 있던 공군참모총장 김정렬(김영환의 형)이 팔만대장경의 중요성과 그간의 공적을 역설하여 즉결처분은 모면했다. 매일신문DB
김영환 장군(1921-1954)의 명령불복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대노(大怒)하여 그는 즉결처분 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배석하고 있던 공군참모총장 김정렬(김영환의 형)이 팔만대장경의 중요성과 그간의 공적을 역설하여 즉결처분은 모면했다. 매일신문DB

합천 해인사(海印寺) 일주문(一注門)을 향해 오르다 보면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보이기 전 오른편에 가로로 세워진 사각형의 비석을 볼 수 있다. 스님이 아니라, 어느 장군의 공적비다. 해인사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2년에 비석를 세웠다. 공적의 내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여기 짧은 생(33세에 사망)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 김영환 장군이다. 그는 1921년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형인 김정열 장군과 함께 우리 공군 창설에 신명을 기울었으며 6.25 한국전쟁 중에는 탁월한 결단으로 우리민족의 성보(聖寶) ‘고려팔만대장경판’을 포화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 모습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면에서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팔만대장경은 2007년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Pixabay 

‘고려팔만대장경판’은 고려 말 몽고병(蒙古兵)을 물리치려는 호국의 얼이 담긴 민족의 성보이다. 조선 세종 때에는 왜(倭)의 끈질긴 기증 요구에 신하들은 응하려 하였으나 세종의 결연한 의지로 보존되어 오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의 빨치산들이 북으로 퇴각하는 과정에 낙오자 900여 명이 해인사에 숨어듬으로써 민족의 성보는 위기일발에 휩싸이게 된다. 인민군 900명을 어쨋든 즉각 괴멸시켜야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1951년 7월 경남지구 공비토벌에 참여한 김영환 장군은 같은 해 9월 18일 오전 6시 30분 지상군 부대(육군)의 긴급 항공지원 요청에 따라 4기편대로 합천 상공에서 정찰기와 만나라는 무전명령을 받는다. 정찰기로부터 지시된 훈령은 해인사의 인민군 공비소굴에 폭격하여 지상군을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막 도착하니 정찰기에서 떨어뜨린 연막탄의 노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폭격 표적지로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앞마당이었다.

화염용 폭탄인 네이팜탄 1발이면 팔만대장경은 물론 해인성지가 곧 잿더미로 바뀔 찰나에 놓였다. 바로 이때 김 장군은 목숨 건 상부의 폭격명령을 어기고 편대 비행하던 요기(僚機)에게, “각기는 나의 뒤를 따르되 나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트탄을 투하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바로 그 무렵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경무대(景武臺)에서 다급한 무전이 왔다. “김영환 장군, 해인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확인독촉이었다. 하지만 김 장군의 뜻은 단호했다. ​다만 그는 사찰 상공을 몇 바퀴 선회한 뒤 해인사의 뒷산 능선 너머로 폭탄과 로켓트탄을 투하하고 귀대하고 만다. 팔만대장경이 보존되는 장엄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상관의 명을 거부한 명령불복이었다.

파리시내
프랑스의 에펠탑을 배경으로한 수도 파리(Paris)의 전경이다. 파리는 인류문화재의 보고(寶庫)이다. Pixabay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파리는 개전통보 1개월 만에 별 저항 없이 독일군에게 점령되고 만다. 프랑스의 중심가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본 파리 시민들은 울분을 삼키며 독일군에게 손을 흔들어야 했다. 굴욕이었다. 하지만 1944년 6월 6일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해서 프랑스 노르망디에 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이 상륙했다. 이것이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이른바 ‘인천 상륙작전’이다. 1950년 9월 15일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6ㆍ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작전인데, 노르망디 작전과 매우 닮았다.

연합군의 성공적인 노르망디상륙으로, 독일군은 프랑스 북부지역인 노르망디와 캉 지역에서 연합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해 8월 15일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파리가 독일점령군으로부터 해방되기 직전,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한 독일의 점령군사령관 콜티츠(Choltitz)에게 파리를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파리를 적의 손에 넘겨줄 바에는, 차라리 완전히 파괴하여 더 이상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한 고약하고 괴팍한 심사였다.

독일점령군 병사들은 에펠탑,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등 파리의 주요 유적지와 베르사유 궁전 같은 건축물에 폭약을 설치하였으며, 점령군 사령관인 콜티츠 중장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콜티츠(Choltitz)장군
나치의 콜티츠(Choltitz)장군. 위키백과

콜티츠는 고민에 빠졌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군인은 전시에 최고사령상관의 명령을 무조건 복종해야하지만, 파리를 송두리째 파괴한다면 세계적으로 아름답고 낭만적인 도시가 일순간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콜티츠 중장은 오랜 고심 끝에 파리를 파괴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한 명 한 명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 무렵 독일 총사령부의 히틀러 총통에게서 전화가 왔다. 히틀러의 다급하고 화난 음성이 수화기를 통해서 계속 흘러 나왔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계속된 독촉에도 콜티츠는 대답을 유보한 채, 그는 2만 명의 부하들과 함께 연합군에 투항하고 만다. 하지만 상관의 명을 거부한 명령불복이었다.

아이히만(Eichmann, 1906-1962)은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대령)로 6백만 명의 유대인학살을 총괄했다. 나치에 협조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는 성실히 일하면서 승진을 꿈꾸었던 평범한 독일인이었고, 평생 조직에서 명령하는 대로 열심히 자신에게 부여된 일에 최선을 다했다. 수용소에서 일과가 끝나면,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가족과 저녁시간을 보낸 남자였다.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유대인들에게 소집통지서를 성심껏 전달했고,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실어 나를 기차의 운행시간과 배차간격을 조정하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너무 성실하게 살아온 죄밖에 없어 보이기도하다.

아이히만이 2차 대전이 끝나고 전범재판정에 섰을 때 세계 언론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를 보기 위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괴물’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그의 모습에 아연실색하였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재판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나?

아이히만: 나는 나치친위대 장교로서 상부의 명령을 받고 청소했을 뿐이다. 나는 죄가 없다.군인의 신분으로서 국가에 충성한 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만을 숙지했고 그 명령권자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상부의 명령은 늘 선(善)이기에 그에게는 숙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전 생애를 칸트(Kant)의 ‘실천이성’에 따라 살아왔고, 집단이라는 톱니바퀴의 작은 톱니가 되어서 그 집단이 요구하는 대로 그저 성실하게 수행했다. 

군에서 상관의 명령은 무조건 따르는 것이 충성이다. 전시(戰時)에는 전시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상명하복이 금과옥조처럼 지켜지는 곳이다. 김영환과 콜티츠는 명령복종에 따른 결과가 자신과 인류의 양심에 비추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자못 간파하고 있었다. 반대로 아이히만은 명령복종이 군인의 충성으로 간주하고 따랐다. 아렌트(H. Arendt)는 이러한 상태를 ‘무사유’(無思惟) 혹은 ‘사유능력의 부족’이라 했다. 그런 삶 자체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명령에 따랐고, 그 결과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무사유가 바로 범죄인 셈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거대한 국가권력과 자본주의의 맹목적 신봉자가 되어, 삶의 모든 척도나 기준을 오직 그곳에 맞추어 사는 것을 절대적 선(善)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추하게 된다. 영혼 없는 충직성과 맹종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니 말이다. 이상철 교수가 말한 ‘집단의 오류’를 다시금 여기서 인용해 본다. “인류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죽음의 명제를 기억해보라. 신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되지 않았던가. 악(惡)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구 도처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지금의 버마에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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