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인생] 한평생 음악과 동거....콘트라베이시스트 임석희 씨
[나의 일, 나의 인생] 한평생 음악과 동거....콘트라베이시스트 임석희 씨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3.06.02 1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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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트럼펫으로 입문
군 시절 콘트라베이스 배워
교사로 악대부 만들어 賞福
대구시향 거쳐 후진 양성에 매진

 

대구시향 공연 전 리허설을 하는 모습.
대구시향 공연 전 리허설을 하는 모습.

콘트라베이시스트 임석희(83) 씨는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한평생을 보냈다. 음악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는 그. 어려서부터 집에 있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그냥 좋았다고 했다.

◆ 음악에 눈뜨다

처음 악기를 연주하게 된 것은 경북 김천에서 떨어진 아포중학교 입학하고부터였다. 음악 시간, 악대부를 창설하려 하는데 하고 싶은 사람 손들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나갔다. 악기 소리를 내보라는 테스트에서 소리를 제일 크게 냈고 먼저 손든 덕분인지 악장이 되었다. 그때 처음 시작한 악기가 트럼펫이었다.

시골 중학교에서 악기 마련은 쉽지 않았다. 악기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전교생이 사방공사장에 나가 일을 했고, 그 임금으로 받은 밀가루를 되팔아 악기를 샀다. 요즘으로는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다. 2월에 처음 악기를 배워 3월 졸업식에서 애국가와 교가와 졸업식 노래를 연주했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었다. 뒤이어 4월 입학 행사에도 연주를 맡았다. 중학교 때부터 트럼펫을 연주하며, 고등학교에서도 밴드부 활동을 이어갔다. 그에게 음대 진학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록 시골이었지만, 아버지는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는 귀한 트럼펫을 사주었다. 자기 악기가 생기고 더 열심히, 더 신나게 불었다. 대학 입학도 트럼펫으로, 전공도 트럼펫이었다. 시골 동네에서 아버지 친구들은 아들을 서울까지 유학 보내면서 딴따라 만드느냐고 말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게 행복한 삶이라며 그를 지지했다. 아버지의 확신은 정확했다. 그는 음악 없는 삶은 꿈꾸어 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개교 10주년 기념 공연에서 트럼펫 독주를 하는 임석희 씨.
고등학교 개교 10주년 기념 공연에서 트럼펫 독주를 하는 임석희 씨.

◆ 콘트라베이스에 매혹되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어느 장교구락부에서 흘러나오는 콘트라베이스 소리를 듣고 그 부드럽고 감미로운 소리에 반했다. 살며시 숨어 들어가 처음으로 콘트라베이스를 만났다. 부드러운 저음에 매료되어 꼭 저 악기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공군에 입대해서 공군군악대에 있을 때 기회가 왔다. 군악대중 유일하게 관현악단이 있는 공군심포니에서 콘트라베이스를 배우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귀한 악기였던 콘트라베이스가 있었고 연주자도 있었다. 조르고 졸라 연주자에게 스케일만 배워 혼자서 연습에 몰두했다. 배우고 싶었던 악기를 배워 맘껏 연습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때 생각에도 관악기는 나이가 들면 호흡이 딸려 힘들 것 같고, 현악기는 나이와 상관없을 것 같았다. 특히 그 부드러운 저음에 매혹되어, ‘콘트라베이시스트’가 평생 직업이 되었다.

◆ 콘트라베이시스트의 길

처음 대구 심인중학교 음악선생으로 발령받았다. 악대부를 만들고 싶었지만, 학교에 악기가 없었다. 집에 하모니카가 있는 학생 20여 명을 중심으로 학교에서 리코더 30개를 구입했다. 그렇게 도합 50명으로 구성된 악대부가 탄생하였다. 하모니카와 리코더만으로 된 악대부를 열심히 지도했다. 옆에서 지켜본 교장선생님이 제대로 된 악대부를 만들어 보라며 악기를 지원해서 25인조 밴드를 만들었다. 1년 만에 경상북도 악대 퍼레이드 경연대회에서 중등부 최고 특상을 수상했다. 6년 연속 최고 특상과 함께 지도자 우수상을 5회 수상했다. 그 후 대구시립교향악단에 입단하려고 교장선생님에게 얘기했더니 시향이 뭐 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그는 “시향은 무당이 굿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교장에게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내림굿이라면 시향은 내 굿하는 곳”이라 말했다.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7년간 시향 단원과 교사를 겸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정년퇴임 때까지 시향에서 연주 활동을 했다. 시향에 근무하면서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경북대학교에 출강하며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덕분에 한강 이남 ‘영남 지역 콘트라베이스의 대부’라는 명예로운 호칭도 얻었다. 1997년부터 2011년까지 영남 더블베이스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취미생활로 문인화와 서예, 색소폰을 즐긴다.
지금은 취미생활로 문인화와 서예, 색소폰을 즐긴다.

◆ 대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 하는 아이들 안타까워

돌아보면 긴 시간이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난 듯 짧기만 한 시간이었다. 콘트라베이스와의 만남은 큰 행운이었고 다시 태어나도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선택하리라. 스스로 하고 싶어서 찾아서 간 길이니, 후회도 여한도 없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원해서 하는 아이도 있지만, 부모의 강요나 공부가 부족하여 대입을 위한 수단이 된 것 같아 안타깝다. 또 무조건 유학부터 하러 가려고 든다. 사회적 인식의 문제도 있다. 유학파라면 무조건 가산점부터 주는 추세다. 진정한 실력이 우선되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음악과 함께 한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가족의 생계가 자연스레 해결되니 이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는 한국 음악협회 회원으로 대구원로음악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미술협회 회원 및 대구미술협회원, 한국서화작가협회 대구지부장 및 초대작가 심사위원, 영남미술대전 문인화 초대작가, 영남미술대전 서예부 초대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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