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시를 느끼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4.01.15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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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픽사베이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 [2004년 민음사]

 

박인환 시인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956년 3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195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었다. 명동신사, 명동백작으로 불릴 만큼 당대의 최고 멋쟁이였고 명동에서 예술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노래하며 풍류를 즐기는 또한 당대 최고의 낭만가객이었다고 전해진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멋진 삶을 살다간 시인이었다.

‘세월이 가면’ 이라는 이 詩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목마와 숙녀’와 함께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다. 또 詩보다 박인희의 노래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명동 어느 술집에서 박인환이 詩를 써서 옆에 있던 이진섭작곡가에게 보여주자 그 자리에서 곡을 붙이고 함께 있던 나애심이 바로 불렀다고 한다. 나애심이 먼저 나가고 나중에 온 테너 임만섭이 그 악보를 보고 다시 노래를 부르자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몰려들어 노래를 감상했다고 한다. 그 때는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박인희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詩보다 노래로 더 잘 알려졌다. 불행하게도 시인은 이 詩를 쓴지 얼마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누군들 이렇게 잊을 수 없는 애틋한 사연이 없으랴마는 詩로 쓰고 곡조를 붙여 노래로 불려지니 더욱 절절함이 사무치는 것 같다. 이 詩의 첫 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남아있네. 눈동자와 입술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찌 그 이름을 잊었으랴. 그만큼 머리로 기억하는 사랑이 아니라 온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시각과 촉각 등 온몸이 기억하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란 뜻이 아닐까.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가로등 그늘의 밤 또한 잊을 수 없다고 되뇌고 있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라고 노래한 세 번째 연이 이 詩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어려운 말 하나 없이 술술 나열해 나간 행간에서 필자는 그 잊지 못하는 사람의 부재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나뭇잎처럼 떨어져 나뭇잎에 덮여 흙이 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연도 첫 연과 같은 반복이지만 내 서늘한 가슴에 있다고 한 행을 더하고 있다. 그 서늘함이 어쩐지 죽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두 번째 연의 그늘의 밤과 세 번째 연의 흙이 되고 마지막 연의 서늘한 가슴 모두가 죽음의 이미지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도 가고 그도 가고 추억의 쓸쓸한 노래만이 남았다. 오늘도 비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 사람들의 촉촉한 가슴을 더욱 풍성한 감성으로 채워주는 詩이며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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