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히틀러와 바그너
[인문의 창] 히틀러와 바그너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1.09.30 17:0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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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사랑한 바그너, 히틀러가 사용한 바그너 음악, 이스라엘에서는 들을 수 없는 바그너의 음악, 독재자들은 음악을 왜 정치에 활용할까
히틀러(1889-1945)는 독일의 대통령의 지위를 겸한 총통을 역임했다. 1944년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고 독일군이 패망의 길을 걷자, 1945년 총통 관저 지하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로 죽음을 맞이했다. 위키백과
히틀러(1889-1945)는 독일의 대통령의 지위를 겸한 총통을 역임했다. 1944년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고 독일군이 패망의 길을 걷자, 1945년 총통 관저 지하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도 바그너의 음악이 함께 했다.위키백과

최근 이스라엘 공영 라디오방송이 독일의 유명 작곡가 바그너(Wagner)의 음악을 방송에 내 보낸 후 청취자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이 곡은 '니벨룽엔의 반지' 중 마지막 곡인 '신들의 황혼'이었는데, 1991년 다니엘 바렌보임이 독일 '바이로이트 바그너 음악제'에서 지휘한 연주의 녹음본 이었다. 생전에 반유대주의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유대인 6백만명을 학살한 나치 독재자 히틀러가 광팬인 바그너였기에 이스라엘에서 그의 곡을 연주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기시돼 왔다. 히틀러와 바그너 그리고 반유대주의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수수께끼 같은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한자.

히틀러(Hitler)가 음악에 흠뻑 빠지기 시작한 것은 16세로 이때부터 오페라 하우스를 찾아 다녔다. 바로 오스트리아 비엔나 오페라 하우스였다. 바그너(Wagner)의 오페라 「로엔그린」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어린 나이에 40회 이상 관람한 걸로 전해지고 있다. 히틀러는 왜 바그너의 음악에 유독 빠졌을까? 히틀러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감정을 뒤흔들 뿐 아니라 독일인의 위대함과 독일정신을 드러내주고 게르만 민족의 단결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의 이유로는 바그너의 ‘반유대주의(antisemitism)者이기 때문”이라 밝힌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는 독일인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다. 독일국적을 얻기 위해 오스트리아 국적을 버리고 독일군에 입대함으로서 독일인이 됐다.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바그너(1813~1883)는 베토벤, 베버 등의 영향을 받고 종래의 가극에 대하여 음악, 시가, 연극 등의 종합에 힘써 장대한 악극을 많이 썼으며, 독일 낭만파를 대표하는 대작을 남겼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이가있다. 위키백과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바그너(1813~1883)는 베토벤, 베버 등의 영향을 받고 종래의 가극에 대하여 음악, 시가, 연극 등의 종합에 힘써 장대한 악극을 많이 썼으며, 독일 낭만파를 대표하는 대작을 남겼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이 있다. 위키백과

히틀러를 흠모하게 한 바그너는 음악작곡가다. 그는 작곡가 보다는 '반유대주의자'로 더 알려져 있다. 바그너는 왜 그리고 어떻게 반유대주의자가 되었을까?. 그는 37세이던 1850년에 가명(假名)으로 ‘음악 속의 유대주의’라는 에세이를 발표한다. 유대인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한 이 글은 56세이던 1869년에 바그너라는 실명(實名)으로 재출판하여 발표했는데, 이 글은 ‘근대적 반유대주의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중요한 몇 군데를 보면, “유대인은 이질적인 외모와 행동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불쾌감을 주며,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들과의 접촉에서 마음이 거슬리고 언짢음을 느낀다. 그들은 고유의 말(언어)이 없고, 고유의 나라도 없다. 그래서 유대인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그냥 앵무새 마냥 따라하고 예술을 모방할 뿐이며, 시를 쓰거나 예술작품을 만들 수 없다.” 라고 섰다. 바그너가 반유대주의 성향을 갖게 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유대인을 증오하게 된 본유로 들어가 보자. 이러한 배경에는 바그너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 체험이 자신의 가치관에 결정적 영향을 미첬다. 실제로 그가 경험한 두 케이스를 보자. 20대 후반의 바그너는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던 오페라하우스의 파산으로 도망치듯 파리로 거처를 옮기는데, 파리에 도착한 바그너는 당시 파리 오페라계의 명망 있는 유대인 출신 작곡가 마이어베어(Meyerbeer)에게 도움을 청한다. 당시 바그너가 마이어베어에게 보낸 편지를 훑어보면 당시 바그너가 처한 처참한 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음악을 하기 위해 힘을 얻으려면 나의 몸과 마음 모두가 당신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짐짓 알고 있습니다. 저는 충직하고 정직한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고용해주십시오, 절대로 가치 없는 구매는 아닐 것입니다. 당신의 소유물인 리하르트 바그너 올림”.

비굴하기 짝이 없는 읍소형 편지다. 이 편지에서 보듯 당시 바그너의 궁핍한 재정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편지를 받은 마이어베어는 연민으로 바그너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마이어베어의 호의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배신감을 갖게 된다. 유대인 출신 멘델스존을 향한 바그너의 증오도 개인적인 사감(私感)에 의해 시작되었다. 바그너는 1836년 자신이 존경하던 멘델스존(Mendelssohn)에게 「C장조 교향곡」의 원본 총보(總譜)를 멘델스존에게 선물로 보낸다. 바그너는 자신의 곡이 멘델스존에 의해 연주되기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고, 오히려 멘델스존은 이 악보를 잃어버린다. 이러한 지극히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바그너는 유대인과 유대인 음악가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우연히 이들 두 음악가는 공교롭게도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유대인을 조롱하고 우스꽝스럽게 희화화(戲畫化)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싹은 지극히 개인적 경험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그너가 창설한 독일 바이로이트의 축제 극장에서 거행하는 음악제로  1876년 처음 상연한 이래, 매년 또는 격년 7, 8월에 바그너의 업적을 기념하여 그의 악극만을 상연한다. 위키백과
바그너가 창설한 독일 바이로이트(Bayreuth)의 축제 극장에서 거행하는 음악제로 1876년 처음 상연한 이래, 매년 또는 격년 7, 8월에 바그너의 업적을 기념하여 그의 악극만을 상연한다. 위키백과

유대인을 향한 증오 측면에서 보면 히틀러와 바그너는 일란성 쌍둥이다. 똑 닮았다. 유대인을 증오하는 ‘반유대주의’는 1870년대를 살았던 바그너와 1930년대를 살았던 히틀러를 엮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다. ‘반유대주의’라는 왜곡 된 신념을 가진 두 사람이, 시대를 넘어 서로 연결되고 소통된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필연적 운명으로도 보인다(?).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시대를 초월하는 이 연결고리는 인연(因緣)이 아니라, 악연(惡緣)으로 볼 수밖에 없다.

바그너를 흠모했던 히틀러가 그의 음악을 실제로 어떻게 활용했는지 한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연합군이 베를린 총독 벙커 부근까지 육박해온 1945년 4월 30일, 패망을 예감한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서 아내 에바 브라운(Eva Braun)과 함께 동반자살 한다. 히틀러는 권총으로, 에바 브라운은 청산가리 캡슐로 각각 목숨을 끊는다. 그의 나이 56세, 그녀 나이 33세였다.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히틀러의 유언을 따라 부하들은 그의 시체를 화장한다. 그 순간 국가 공식추모 음악인 베토벤 「7번 교향곡」 대신에 바그너의 「지크프리트 장송곡」이 울려 퍼진다. 히틀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작곡가와 마지막을 함께한 것이다. 이 처럼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맹종하듯 좋아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광팬이었다.

히틀러와 그의 부인 에바 브라운(Eva Braun)이 1942년 그들의 별장에서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3년후에 그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위키백과
히틀러와 그의 부인 에바 브라운(Eva Braun)이 1942년 그들의 별장에서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3년후에 그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위키백과

히틀러는 독일이 하나의 민족주의 국가가 되기를 늘 꿈꿨다. 그는 예술의 어떤 장르보다 음악이 독일민족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독일민족의 우월성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도구로 보았다. 그래서 음악에 관한한 일가견이 있던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상시로 정치에 이용했다. 올림픽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히틀러는 침략자나 독재자로서의 이미지를 음악을 통해 벗어버리고자 올림픽 유치를 결정한다. 실제로 독일 베를린에서 제11회 하계 올림픽이 1936년 8월 1일 개막됐다. 이 개막식은 한 편의 드라마틱한 오페라와 같이 연출되었는데, 이 올림픽 무대의 연출에는 바그너 음악극에서 영감을 얻은 아이디어가 적용되었다. 누구보다도 선전의 효과를 잘 알고 있던 히틀러는 역사적인 광경을 올림픽 최초로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한다. 이처럼 히틀러는 모든 행사를 한 편의 드라마로 연출하고자 했고, 정치선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 정부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라디오를 독일에 보급 했는데, 이 라디오에서는 히틀러를 비롯한 당 지도자들의 메시지를 담은 연설이 정기적으로 방송되었다. 그리고 이 연설 전에는 항상 바그너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바그너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수많은 독일 시청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쉽게 수용됐다. 이정도면 히틀러는 바그너의 광팬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반유대주의라는 두 사람 간의 무언의 언약(?) 덕분이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1936년 제 11회 올림픽을 독일 베를린에 유치한다. 그는 이 행사를 정치선전 수단으로 이용했다. 위키백과
히틀러는 1936년 제 11회 올림픽을 독일 베를린에 유치한다. 49개국 3,962명이 참석했으며 독일이 1위를, 미국이 2위, 항거리가 3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손기정 선수가 일본국적으로 참가하여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히틀러는 이 행사를 철저히 정치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 위키백과

기이한 것은 히틀러는 현대음악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1938년 5월 뒤셀도르프에서 ‘퇴폐 음악 콘서트’를 열어, 난해한 현대음악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는 현대 음악을 다수의 일반인들이 싫어하는 ‘문화적 쓰레기’로, 현대 음악가를 ‘신성한 독일 예술의 샘물에 독을 뿌리는 자’로 낙인찍었다. 사실 이러한 배경에도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내재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현대 음악에 유대인 작곡가들의 정신이 깊게 뿌리 내려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불협화음, 불안한 정서를 조장하는 무조음악(無調音樂, atonal musics)과 불규칙한 리듬 등을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와 같다고 비난했다. 미국에서 흘러들어온 재즈도 현대 음악과 함께 히틀러가 수용할 수 없는 대표적인 소음(騷音)이었다. 재즈 음악이 미국적 정서를 조장 하면서 독일 민족의 자존심을 해칠 뿐 아니라, 색소폰 같은 악기가 불순한 성적(性的)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에서였다. 위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그저 정치적 수단으로 교묘히 악용했다. 어느 시대나 음악은 독재자의 의도에 따라 권장되기도 하고 금지되기도 했으니 음악이 동네북도 아닌데 가관이 따로 없어 보이기도하다.

바그너는 자신의 음악극 <지크프리트(Siegfried)>에서 주인공 지크프리트를 다가올 미래의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인간상으로 제시한바있다. 지크프리트는 가극 전체의 흐름에서 영웅이자 반유대인의 전형으로 그려지고 있다. 히틀러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에 자기 자신을 교묘하게 투영시켰다. 민족과 세계를 구원할 영웅이 바로 자기 자신이란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이 히틀러의 내면 깊숙이 뿌리박힌 영웅의식과 민족구원의 사명에 충실한 배경 음악이 됐다.

실제로 역사 속에 독재자들은 대부분 음악을 정치에 이용했다. 나폴레옹은 신화를 바탕으로 쓰이던 기존 오페라를 역사 속 영웅이 등장하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역사적 영웅이 바로 자기자신으로 둔갑시켰다. 마오쩌둥은 전통 경극(京劇)을 혁명영웅 이미지를 강조하는 현대적 경극으로 개조했다. 북한의 김일성도 음악을 우상화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북한 창작음악의 80%가 권력자의 공덕을 기리는 ‘송가(頌歌)’다. 독재자가 음악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음악의 본질적 속성 자체에 있다. 음악은 다른 어떤 예술보다 인간의 정신세계와 직접 맞닿아 있으며 독재자들은 대중을 통제하고 세뇌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공학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음악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히틀러도 여기서 예외는 아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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