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인문의 창]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2.07.01 17:0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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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초판·재판이 매진, 독일 중고교(김나지움) 교과서 수록, 독일인들에게 한국을 동경하게 만든 소설
이미륵
이미륵(1899-1950)은 황해도 해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세 누이를 둔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해주보통학교를 졸업하던 만 11세 때 6년 연상의 아내를 맞아 1남 1녀를 두었다. 위키백과

1946년 5월,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 뮌헨의 피퍼출판사에서 출간됐을 때, 독일 전역의 신문들은 일제히 찬사를 쏟아냈다. “올해 독일어로 씌어진 가장 훌륭한 책은 외국인에 의해 발표되었는데, 그가 바로 이미륵이다”라고 썼다. 그가 잠든 지 72년이 지났지만, 독일인들은 여전히 그의 묘소를 찾고 그의 책을 읽는다. 전후(戰後) 독일 문학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이미륵(1899-1950)이 ‘한국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썼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더욱이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초판은 물론이고 재판까지 매진될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평론가들의 서평이 100편 넘게 독일신문에 실렸다. 독일인들은 지금도 막스 뮐러의 소설『독일인의 사랑』만큼 이 책을 아낀다. 독일 학자들의 눈에도 그의 독일어 문장구사능력이 탁월하기에, 외국인이 쓴 소설이라고 믿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더욱이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중·고등학교(김나지움)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문학성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그가 죽은 뒤에 영국의 BBC 등 유럽 방송들은 이미륵의 이야기를 앞다투어 방영했다.

압록강은 흐른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우리말 번역본으로 2016년에 발행됐다. 박균이 번역했다. 살림출판사.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압록강은 흐른다』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45년 5월은 세계 2차 대전의 패배로 히틀러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독일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 몰락과 실향(失鄕)의 지독한 상실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미륵의 소설은 집단적 우울증에 시달리던 독일인들에게 순수한 영혼에 대한 동경(憧憬)과 이상향을 회복시켜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원래 전공이 의학도(醫學徒)였던 청년 이미륵은 1919년 3·1 항일운동 참가 이후 일본경찰에 쫓기자, 급히 도피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상하이(上海)까지 가게 된다. 그곳에서 다시 독일 행 선박에 승선한다. 그는 서울을 떠난 지 3개월 30일 만에 독일 땅을 밟았다. 마침내 독일 망명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역만리 혈혈단신 고아와 다름이 없었다. 우여곡절 가운데도 삶은 꿈틀거렸다. 처음에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1925년 뮌헨대학으로 옮겨와서 ‘동물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이겨내지 못한 나머지, 그는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선회했고, 1946년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하면서 마침내 작가로 데뷔하며 큰 성취를 이루게 된다. 이미륵은 이 소설을 통해서 독일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휴머니스트라는 찬사를 얻었고, 지금껏 그들의 기억 속에 깊게 남아있다. 당대 찬란한 지성과 순수예술을 꽃피웠던 전혜린(田惠麟)이 이 책을 1960년 우리말로 번역하여 펴내면서 이미륵이란 존재가 국내에도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알다시피 전혜린도 국내에서 하던 법학공부(서울대 법학과)를 던져 버리고, 뮌헨대학에서 독문학분야로 전향한 여류작가다.

1888년의 뮌헨대학 전경. 위키백과
1888년의 뮌헨대학 전경. 위키백과

그의 30년에 걸친 독일 생활(1920∼1950)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 향수 추억 우수(憂愁) 등으로 점철돼 있다. 이런 정서적 감성 덕분에, 한국을 낯선 미지의 땅으로만 알고 있던 시대에, 이미륵은 문학 활동을 통해 한국과 한국인의 이미지를 독일에 찬란하게 드높이는 선구자가 됐다.

독일인들에게 이미륵은 ‘위대한 한국의 아들’이었다. 그는 언제나 전통이나 인간을 부정하거나 절망적인 태도로 관망하지 않았다. 절대 존중했다는 말이다. 그는 외유내강의 전형적 성격으로 온화하지만 불의에는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반나치 운동에도 가담했다. 이미륵의 생애에 큰 충격을 준 것으로 꼽자면, 첫째 일본의 침략과 독일망명이었으며, 둘째 그가 독일서 겪은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히틀러 출현이었고, 셋째는 말년에 그를 덮친 병마였다.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에서는 이런 제반 악조건들을 극복하는 인도주의적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이다. 소박하고 간결한 표현법과 친근감 가는 작가의 유년시절 묘사는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독일인들에게 인간 본성에 대한 원초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장롱 위의 꿀을 훔쳐 먹다 들켜 혼난 일화며, 손톱에 봉숭아 꽃물들이던 기억, 쑥 뜸의 공포, 잠자리채 이야기 등은 아주 토속적인 한국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갖고 있을 유년시절에의 동경의 대상이 아니던가.

올해로 출판 된지 76년이 되는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인데, 이 작품 속에 면면히 배어있다. 소설 마지막 부분을 여기 옮겨본다.

백장미 사건
뮌헨대학 본관 앞 잔디밭에 설치되어있는 백장미단의 기념조각품이다. 그 당시 뿌린 전단지(삐라) 모양이 그대로 재현되어있다. 맞은편 잔디밭에는 그 당시 학생들과 함께 처형된 후버(Huber)교수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흉상이 높다란 제단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미륵은 후버교수와 반나치의 가치관을 공유한 절친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

“언젠가 우편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알지 못하는 집 앞에 섰다. 그 집 정원에는 한 포기 꽈리가 서 있었고, 그 열매는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그처럼 많이 봤고 또 어릴 때 즐겨 갖고 놀았던 이 식물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였던가. 나에겐 마치 고향의 일부분이 내 앞에 현실적으로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 집에서 어떤 부인이 나와서 왜 그렇게 서 있는지 물었다. 나는 가능한 한 나의 소년 시대를 상세히 이야기했다. 그 여자는 한 가지 꺾어서 나에게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랐다. 얼마 후에 눈이 왔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자 나는 성벽에 흰 눈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흰 눈에서 행복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 고향 마을과 송림 만(灣)에 휘날리던 눈과 같았다. 이날 아침, 나는 먼 고향에서의 첫 소식을 받았다. 나의 큰 누이의 편지였다. 지난 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병을 앓으시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사연이었다.”

그가 ‘독일인들에게 한국의 얼과 문화를 어떤 외교관보다 깊이 심어준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1950년 3월 20일 이미륵은 뮌헨에서 위암으로 짧지만 강렬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51세였다. 그는 독일인 친구와 제자, 그리고 양어머니 자일러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통제를 맞고 나서, 애국가 중에서 ‘우리나라 만세’를 낮은 목소리로 불러 좌중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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