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중세 유럽의 잔혹사, 마녀사냥
[인문의 창] 중세 유럽의 잔혹사, 마녀사냥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1.12.31 10:00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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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이 정치학에서는 전체주의의 산물로, 심리학에서는 집단 히스테리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인간이 선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추악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이 새롭게 들리는 오늘이다
잔다르크(1412-1431)는 프랑스의 영웅적인 소녀로 백년전쟁 후기에 16세의 나이로 출전하여 오를레앙성을 탈환하는 등 승리를 거두고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하도록 하는 등 공을 세웠으나 1431년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을 당하였다. 가톨릭교회에서는 1920년에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위키피디아
잔다르크(1412-1431)는 프랑스의 영웅적인 소녀로 백년전쟁 후기에 16세의 나이로 출전하여 오를레앙성을 탈환하는 등 승리를 거두고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하도록 하는 등 공을 세웠으나 1431년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을 당하였다. 가톨릭교회에서는 1920년에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위키피디아

최근 주요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뜻밖의 저격을 당한 신기루(41. 개그우먼)측은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신기루는 11일 소속사를 통해 폭로 글은 사실무근이라며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장하는 당사자의 입장만 각종 포털에 기사화되어 마치 내가 재판도 없이 마녀사냥을 당하는 심정이다. 정말 억울하다”고 적극적으로 어필했다.’라며 만신창이가 된 악플에 억울해 했다. 중학교시절 신기루가 학폭(學暴)에 가담됐다는 기사다. 신기루는 2005년 KBS ‘폭소클럽’으로 데뷔하여, ‘웃찾사’등에 출연하며 인기를 끌고 있는 개그우먼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말은 ‘마녀사냥’이다. ’마녀사냥‘이란 말이 중세뿐 아니라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게 예사롭지 않다. 도대체 ’마녀사냥‘이 뭐기에 세기를 뛰어넘어 지금도 왕성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걸까?

‘마녀사냥’은 중세 중기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지역에 행해졌던 ‘마녀’(魔女)에 대한 추궁과 재판에 관련된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마녀사냥'을 흔히 '마녀재판'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경철 교수의 저서 『마녀』의 첫 문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마녀사냥은 유럽역사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현상 중 하나이다.” 당시 합리적인 이성을 강조하며 찬란한 문화발전을 이루어 냈던 문예부흥시기에 광기에 찬 마녀사냥이 난무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주경철 교수는 마녀 재판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가 이성의 빛과 세계의 진보를 거론하던 시대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마녀재판은 문명의 발전에서 잠깐 일탈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 내부에서 오랜 기간 준비돼 온 필연적인 발명품이란 것이다. 그는 마녀사냥의 기원을 기독교 교리의 재정비에서 찾았다. 로마제국 이래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부상하였지만, 여전히 기독교에 포섭되지 않은 방대한 민간신앙 체계가 잔존했다. 초기 기독교는 교리에서 벗어나는 이설(異說)들을 정리하고 기독교 체계를 분명히 정립하기 위해서 오직 예수와 사도성인들의 가르침만이 진짜 종교이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교는 허황되고 사악한 믿음이며, 사교(邪敎)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민중들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점쟁이, 혹은 민간 치료사와 같은 사람들이 ‘마녀’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규정되었으며 급기야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탄과 악마들의 사악함과 연결되기에 이른다.

《마녀의 망치》라는 책은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인 요하네스 슈프랭거와 하인리히 크래머가 쓴 마녀사냥 교본이다. 위키피디아.
《마녀의 망치》라는 책은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인 요하네스 슈프랭거와 하인리히 크래머가 쓴 마녀사냥 교본이다. 위키피디아.

실제로 중세 유럽에서 '마녀'라는 직종이 본래 사악하지 않았다. 공동체 내에서 출산이나 질병치료와 같은 의료기능을 담당하거나, 점을 치고 묘약을 만드는 주술적 기능을 수행한 자들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던 그들이 언젠가부터 신앙을 해치고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낙인찍히기 시작했다. 급기야 14세기부터 불어 닥친 ‘마녀사냥’으로 17세기까지 대략 20만~50만 명의 사람들을 처형대에 올려졌다. 마녀가 악의 화신이 되는 데는 1215년에 설립된 ‘도미니코 수도회’(Order of Dominicus)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를 질타하기 위해 예수와 대립된 존재로 마녀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 책에는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여자는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교회의 교세가 가장 약했을 때였다.

마녀사냥 이전의 종교재판은 믿음을 잃어버린 신자들의 회개나 전향을 이끌어내면 족했지만, 이제는 마녀라는 '보이지 않는 적'들과 교회는 상대해야 했다. 중세의 몰락으로 시작된 근대는 계몽주의와 합리성으로 포장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마녀 프레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마녀 식별법을 담은 『마녀의 망치』 라는 책은 독일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 덕분에 대량으로 출판돼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이는 마녀사냥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1490년 교황청, 그리고 1538년 종교재판 본부에서도 이 책의 ‘오류(誤謬)’를 공식 비난하는 입장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녀의 망치』 는 20쇄를 거듭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마녀의 망치』 득세의 이면에는 사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묵인하고 방조한 세속 권력과 교회가 도사리고 있었다. 기나긴 십자군전쟁의 패배로 혼란과 분열, 왕권에 대한 불만과 불신에 휩싸인 유럽 사회의 위기를 타개할 ‘희생양’이 필요했다. 지식과 과학이 발달했지만 그만큼 지식과 과학에 포섭되지 못하는 현상을 악마화하고 소멸시켜 버리려는 기제도 함께 작동했다. 마녀 용의자는 주로 엄청나게 부유한 과부들과 무신론적 지식을 갖고 있는 미혼 여성들이었다. 가족이 없으면서 돈은 엄청나게 많은 여자들이 마녀로 잡혀가는 경우가 많았다. 과부들이 많이 잡혀갔다는 말이다. 과부는 가족이 없기에 재판에 증인을 서 줄 사람이 없다는 약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녀로 붙잡힌 여성을 고문하는 장면으로 1577년 작품이다. 위키피디아.
마녀로 붙잡힌 여성을 고문하는 장면으로 1577년 작품이다. 위키피디아.

마녀재판을 하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뒬멘(1987)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로 ‘눈물 시험’이다. 『마녀망치』에는 ‘마녀들은 사악하기 때문에 눈물이 없다, 그래서 마녀가 눈물을 흘릴 수 있나 시험해보라’고 나와 있다. 눈물을 흘려서 죄가 없다는 것을 실증해 보여야만 했다. 두 번째는 ‘바늘 시험’이다. 타락한 악마들은 지울 수 없는 표식을 가지고 있으며, 마녀 또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따라서 재판관이 그들의 나체를 살펴본 후에, 관찰의 용이성을 위해 몸의 털, 음모, 눈썹을 깎거나 태웠다. 관찰에 의해 사마귀, 융기, 부스럼, 기미, 주근깨 등 마녀의 몸에 점이 발견되면 형리는 그 자리를 누르거나 바늘로 찔러 감각을 느끼는지, 피가 흐르는지 시험했다. 세 번째는 ‘불 시험’이다. 재판관은 혐의자에게 그들의 무혐의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달구어진 쇠로 지지는 것을 견딜 수 있는지, 불 위로 걸을 수 있는지를 시험했다. 이런 제안을 했을 때 용의자가 승낙을 한다면 그녀는 마녀가 된다. 마녀는 이 난관을 악마의 도움을 받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물 시험’이다. 일반적으로 물은 깨끗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형리들은 혐의자를 단단히 묶고 깊은 물에 빠뜨린다. 물은 깨끗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녀가 들어올 경우에는 물 밖으로 내쳐진다고 믿었다. 만약 용의자가 물에서 익사한다면 그녀는 혐의를 벗게 되겠지만, 물에서 떠오른다면 마녀로 간주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마녀든 아니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영국의 포로가 되자 프랑스 국왕은 그녀를 버렸다. 영국은 잔 다르크가 악마의 힘을 빌려 전투에서 이겼다며 마녀 혐의를 씌워 화형에 처했다.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영국의 포로가 되자 프랑스 국왕은 그녀를 버렸다. 영국은 잔 다르크가 악마의 힘을 빌려 전투에서 이겼다며 마녀 혐의를 씌워 화형에 처했다.위키피디아.

마녀재판의 대표적 피해사례로 프랑스의 잔 다르크(1412-1431)가 있다. 백년전쟁 때 종교재판에서 마녀로 판결을 받아 화형을 당했으나, 훗날 명예회복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바 있다. 유럽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공식적으로 마녀 재판이 사라졌다. 2003년 3월 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시에 따라 교황청은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해 과거 교회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핑계로 인류에게 저지른 각종 잘못을 최초로 공식 인정했다.

‘마녀사냥’이란 말은 지금도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마녀사냥에 대해 정치학에서는 전체주의의 산물로, 심리학에서는 집단 히스테리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사회학에서는 집단이 절대적 신조를 내세워 개인에게 무차별한 탄압하는 행위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히틀러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일제 강점기에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부르며 학살을 저질렀으며,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와 반공주의에 기댄 '매카시즘'이 그랬고, 현재도 진행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무장 이슬람조직인 탈레반의 폭력과 학살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인터넷의 발달로 마녀사냥의 양상도 진화되어, 집단이 특정개인을 상대로 근거 없이 악성댓글로 무차별 공격해서 '인격 살인'하는 것이 현대판 마녀사냥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턱대고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프레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가 되고, 이로 인해 마녀사냥을 더 용이하게 만들었다.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이라는 말이 이젠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누구나 마녀사냥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차이를 빌미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혀 집단광기에 빠질 때 인간은 괴물보다 못한 상태로 떨어질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선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추악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이 새롭게 들리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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