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헨리 8세의 야욕 ·······이혼이 종교개혁을 이끌다
[인문의 창] 헨리 8세의 야욕 ·······이혼이 종교개혁을 이끌다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2.05.31 09:37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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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보다 힘든 이혼을 통해 종교개혁을 어거지로 이끌어내다. 이혼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대립하다 영국 국교회인 '영국성공회'를 설립하다
헨리 8세(1491-1547)는 16세기 영국왕국 튜더 왕조의 왕이며,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형의 죽음으로 왕좌에 올랐고, 적자녀 셋은 모두 왕이 되었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간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위키백과
헨리 8세(1491-1547)는 16세기 영국왕국 튜더 왕조의 왕이며,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형의 죽음으로 왕좌에 올랐고, 적자녀 셋은 모두 왕이 되었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간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위키백과

SK그룹 최태원 회장(61)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딸 노소영(61)과 결혼했으나 현재 이혼 소송 중이다. 그는 2015년 12월 《세계일보》에 서신을 보내 혼외자(婚外子)가 있다는 사실과 노소영과 이혼을 계획 중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편지 내용이 세간에 알려지며 동거인(同居人)의 존재와 이혼통보 그리고 재혼의지 등이 화제가 되었다. 그는 2017년 법원에 이혼조정을 신청했으나, 상호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해 2018년 7월부터 이혼 소송 절차에 돌입했다. 그러나 노소영은 이혼에 반대해 왔다. 2019년 12월, 노소영은 이혼에 응하겠다며 맞소송을 내면서 3억원의 위자료와 최태원의 SK 보유 주식 가운데 42.29%(548만주, 1조 천억 원)를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법조계에서는 양 측의 입장이 첨예하고 재산분할 등의 사안이 복잡하기 때문에 이혼소송이 길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영국의 국왕 헨리 8세(Henry Ⅷ)가 불현듯 떠오른다. 이혼은 언제나 새 연인(戀人)이 나타나면서 생기지 않던가. 최태원 회장은 현재 법원에서 이혼소송 중이라면, 15세기의 헨리 8세(이하 헨리)는 로마 교황청의 수장인 교황과 다투어야했다. 이혼이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아귀다툼 자체가 제3자의 입장에선 꽤나 흥미롭고 호기심을 유발한다.

헨리는 영국국왕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왕위 승계자였던 맏형 아서(Arthur)가 15세 나이로 요절하자, 둘째인 헨리가 얼떨결에 왕이 되었다. 그는 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엄격한 왕세자 수업도 받지 못했다. 그런 탓으로 그의 성격은 변덕스럽고 다혈질이며, 키는 188cm인데다 힘이 세었으며 사냥과 춤에 능했다. 형 아서가 결혼 한지 불과 5개월 만에 병사(病死)하자, 헨리는 형의 부인인 스페인 출신 캐서린(Catherine) 형수와 패륜적인 결혼을 해야만 했다. 헨리의 아버지는 스페인과 우호적인 관계유지하기 위해서, 차남과 맏며느리와 결혼을 밀어 붙인 결과였다. 세계역사에 없는 괴이한 일이다.

캐서린(1485-1536)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무효를 승인하지 않음에 따라 헨리 8세와 교황청의 관계가 단절되고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위키백과
캐서린(1485-1536)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무효를 승인하지 않음에 따라 헨리 8세와 교황청의 관계가 단절되고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위키백과

그런데 캐서린은 보통 왕비가 아니었다. 스페인 북부 사람들의 특성인 하얀 피부, 파란 눈과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기에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이라 표현했고,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는 ‘그녀를 따라갈 여자가 없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헨리의 형 아서도 ‘아리따운 신부의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남편이 된 헨리는 그녀를 탐탁찮게 생각했다. 캐서린은 헨리보다 여섯 살 연상인데다가, 결혼생활 20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3남 3녀를 낳았지만 살아남은 아이라고는 외동딸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왕위계승을 위해 아들에 유별나게 집착했다.

앤(1507-1536)은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다. 위키백과
앤(1507-1536)은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다. 위키백과

그 무렴 헨리의 눈에 딱 들어온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공교롭게도 캐서린 왕비의 궁녀였는데, 앤(Anne)이란 여자였다. 노래와 춤에 뛰어나고 플루트를 비롯한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알며, 영국출신이지만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헨리와 공통점이 많았기에 속 빠졌다. 그녀를 곁눈질하는 남자들이 유독 많았다. 하지만 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남자는 헨리가 유일했다. 헨리가 적극적으로 치고 들어오자 앤은 ‘왕비가 되기 전에는 전하의 품에 안길 수 없어요.’라며 교태를 부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막상 그녀와 결혼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 영국은 가톨릭 국가였기에 교황청의 허가가 필요했다. 구약성경 레위기 20장 21절에 ‘누구든지 그의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구절 때문에 헨리는 형의 아내이던 캐서린과 결혼할 때 교황청과 부딪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캐서린과 형의 결혼이 ‘완성(consummate)’ 되지 않았다는, 즉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교황의 허락을 받아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 즈음해서 실제로 형은 와병 중에 있었다. 우스꽝스럽게도 이번에도 똑같은 성경구절을 근거로, 캐서린과의 결혼이 가족 간 패륜으로 맺어진 혼사라 무효라 주장해야만 했다. 예컨대 형수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해준 것 자체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기에 당시 교황청의 특별 결혼허가는 무효처리 되어야 한다며 교황청에 탄원했다.

하지만 1527년 이런 헨리 왕의 탄원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즉각 거절했다. 왜냐하면, 이때만 해도 로마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의 권력에 종속되어 있어서, 교황은 황제의 명을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더욱이 지금의 부인 캐서린은 황제 칼 5세의 고모였으니 교황은 이 이혼을 승인할 수 없었다. 이 이혼을 허락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던 교황은 ‘한 번 내린 특별허가는 번복할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다급해진 헨리가 영국의 추기경 토머스 울시를 로마로 보내 여러 술수로 교황을 설득했으나 소용없었다. 이혼이 불가능하니 결혼도 할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1534년 영국의 추기경 울시가 죽고 나서, 핵심권력을 잡은 크롬웰이 헨리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강구하게 된다. 결론은 이른바 ‘수장령’이었다. 수장령(Acts of Supremacy)이란 영국의 왕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영국교회의 모든 권한이 영국국왕에게 있음을 선포한 법령이었다. 이 법에 따라 영국은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새로운 개신교인 ‘영국 성공회’를 탄생시키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 3번째로 큰 《종교개혁》으로 기록되고 있다. 의회에서 순조롭게 통과된 수장령에 의해 영국의 왕이 영국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반역법’에 의해 처벌받게 되었다. 이혼이 《종교개혁》을 어거지로 이끈 꼴이 됐다.

새로운 ‘수장령’ 법에 의해서 헨리는 캐서린과 이혼할 수 있게 됐다. 결혼은 무효가 되었다. 새 연인(戀人)인 앤이 임신하는 바람에 서둘러 올렸던 결혼은, 뒤늦게 합법이 되었다. 로마 교황은 화가 나서 헨리와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Cranmer)에게 파문(破門)을 내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게 됐다.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국왕이다, 유럽 변방의 조그마한 섬나라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초를 다진 통치자다.  위키백과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국왕이다, 유럽 변방의 조그마한 섬나라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초를 다진 통치자다. 위키백과

헨리와 앤이 결혼식을 올린 지 3개월 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왕실의 의사들과 점성가들은 아들일 것이라 예언했기에, 왕손의 탄생을 위한 축하예식이 성대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딸이 나왔다. 앤은 헨리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 흐느껴 울었고, 헨리는 낭패감과 당혹감에 빠진 나머지 그 자리를 떠났다. 로마 교황청과 단절하고,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아무런 죄 없는 첫 부인을 매정하게 버리고, 저명한 학자들과 성직자까지 처형했는데 말이다. 이 모든 일들의 결과는 딸 하나를 낳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이 딸이 후에 영국을 ‘황금의 시기’로 이끌고 대영제국의 기반을 마련하며, 영국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여왕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Ⅰ)’가 될 것을 그때 헨리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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