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벤야민의 ‘아우라’, 그 예술의 정치화(Ⅱ)
[인문의 창] 벤야민의 ‘아우라’, 그 예술의 정치화(Ⅱ)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2.03.22 08:18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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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 대해 무조건 흠모하던 아우라의 시대는 지나가고, 오히려 그 작품의 구도나 색채 그리고 모티브에 대해 누구나 비판하고 비평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평등화와 민주화가 예술작품에 불어 닥친 것이다
니체
사람들은 진리나 가치로 믿었던 근본을 뒤흔들어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삶의 밑바닥이 흔들리는 근원적 상실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걸 니체(1844-1900)는 ‘허무주의’(Nihilismus)라 불렀다. 그는 세상에 난무하는, 있지도 않은 형이상학적 신념들을 깨부수고 허구적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의 길로 나아가야한다고 보았다. 허무주의란 전승된 모든 가치들이 파괴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가치들이 얼마나 허위적인 것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위키백과

인터넷에서 ‘아우라’를 검색하면 상품이름, 상호명칭, 메이크업, 피부 관리, 포토 스튜디오, 카페이름을 비롯한 가수의 이름도 등장한다. 왤까? 고객유치에 암튼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게다. 사실 ‘아우라’(Aura)라는 용어는 발터 벤야민(W.Benjamin)이 처음 언급한 이래로 세계적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아우라’를 ‘전통적 예술작품’이 갖는 본질적 성격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술작품을 벗어나, 일반 사람이나 사물에도 ‘아우라’를 투영시켜 사용하고 있다. 현실에선 실제로 신체에서 발산되지만 보이지는 않는 기(氣)를 뜻할 때도 있고, 고고한 분위기란 뜻으로도 사용되며, 성인(聖人), 천사, 부처 등과 같은 존재가 내뿜는 후광(後光)이나 광배(光背)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물론 원래 ‘전통적 예술작품’이 갖는 본질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들은 그 위대함의 서열을 매기기엔 분명 무리가 있다. 그런데도 루브르가 이토록 『모나리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것은, 그래야 이 그림의 신화화가 더 오랫동안 확실하게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수없이 밀려드는 많은 인파와 고압적인 경비원들 탓에, 신비로운 미소와 눈썹 없는 여인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하는 일은 분명 역부족으로 보인다. Pixabay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대해 무조건 흠모하던 아우라의 시대는 지나가고, 오히려 그 작품의 구도나 색채 그리고 모티브에 대해 누구나 비판하고 비평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평등화와 민주화가 예술작품에 불어 닥친 것이다. 픽사베이

벤야민은 ‘전통적 예술’은 본래 자아(自我)와 예술 작품 간에 신비적 체험이나 일체감을 맛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중세유럽의 예술이 거진 그랬다. 당시 예술이라 하면 본질적으로 주술적(呪術的)이고 신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神)의 얼굴을 함부로 볼 수 없듯이 예술 작품에 나타난 종교적 상(像) 역시 함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예술이 이런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시대상황이 크게 기여했다. 사진이나 영화가 없던 시대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는 작품은 전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야만 했고, 그것도 아주 제한된 극소수의 엘리트계층 만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이 작품 앞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는 유일무이한 진품(眞品)이라는 데서 오는 신비감과 경외심에 사로잡혔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휩싸인 관람객의 심적 상태를 벤야민은 ‘아우라’라 불렀다. 그래서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예술작품이고 아무나 이런 분위기에 빠질 수 없었던 게 ‘아우라’였다. ‘아우라’는 당시 극소수 귀족들만이 느끼고 향유할 수 있는 전유물이 된 셈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게 됐다. 예술작품의 유일무이(唯一無二)성은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복제(複製, Copy)가 가능해지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복제시대에는 예술작품을 진품이니 오리지널(original)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복제기술이 발전하면서 예술작품에 대한 신비감도 ‘아우라’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아우라’의 상실과 더불어 예술작품의 기능과 대중의 수용태도에도 커다란 혁명적 변화가 생겨났다. 과거의 예술이 주술적(呪術的) 신비적 기능을 지닌 것이었는데 반해, 복제시대의 예술은 오히려 ‘상품적 가치’와 ‘전시적(展示的) 가치’가 돋보이는 시대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예술이 ‘아우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이젠 ‘돈’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신비성 보다는 오히려 가격과 경매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는 말이다. 사실 작품 『모나리자』의 가격 책정은 어렵지만 수익률과 환원이율을 5%로 계산하면 40~6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한해 국방비와 맞먹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래서 과거에는 예술에 대한 대중의 수용방식이 신비적 일체감을 체험하는 방식이었다면, 현대예술의 수용방식은 대중과 작품 간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비판적 태도를 가지게 됐다는 점이다. 엄청난 시각의 변화이다. 대량복제 기술에 의해 야기된 이와 같은 예술기능의 변화를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라 불렀다.

안젤리나 졸리(1975년 6월 4일 ~ )는 미국의 배우이자 영화감독, 자선가이다. 아카데미상 1회, 미국 배우 조합상 2회, 골든 글로브상 3회 등을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2009년과 2011년, 2013년에는 《포브스》에서 선정한 '할리우드에서 가장 출연료가 높은 여자 배우'로 선정되었다. 또한 졸리는 다양한 인도주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국제 연합 아동 기금(유니세프)의 친선대사로 활동했으며 난민 특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졸리는 다양한 언론 매체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주 언급되며,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위키백과
안젤리나 졸리(1975년 6월 4일 ~ )는 미국의 배우이자 영화감독, 자선가이다. 아카데미상 1회, 미국 배우 조합상 2회, 골든 글로브상 3회 등을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2009년과 2011년, 2013년에는 《포브스》에서 선정한 '할리우드에서 가장 출연료가 높은 여자 배우'로 선정되었다. 졸리는 다양한 언론 매체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주 언급되며,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위키백과

예술작품에 아우라가 상실되었다는 것은 하지만 단순히 마이너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권위적 유일무이라는 우상(偶像)을 파괴시키고 ‘평등성의 감각’이라는 엄청난 공평성을 일궈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값비싼 입장료와 더불어 특정한 장소와 시간이라는 귀족적 요건들을 갖추어야만했던 어제의 ‘오페라 관람’과 달리, 현대의 영화는 필름을 돌릴 영사기만 있다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 위엄과 권위’를 간단히 평등화시켜버린 것이다. 초기 영화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 숭배현상’도 사라졌다. 영화배우는 관객 면전에서가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고 관람객은 휴대폰 유튜브를 통해서 그의 연기를 접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할리우드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A. Jolie)의 눈빛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더 이상 간절하거나 신비롭지는 않게 됐다. ‘바로크음악’의 웅장함이 창출해 내는 감동도, 각자의 유튜브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기에 혼을 빼놓을 정도로 신비롭지만은 않게 됐다. 벤야민은 대중매체시대에 예술작품들의 홀대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진보적 가능성을 동시에 간파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대해 무조건 흠모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오히려 그 작품의 구도나 색채 그리고 모티브에 대해 누구나 비판하고 비평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평등화와 민주화가 예술작품에 불어 닥친 것이다. 오히려 플러스 효과다.

‘아우라’가 사라진 폐허 속에서 ‘허무주의(Nihilism)’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시대를 니체(F. Nietzsche)는 ‘허무주의의 시대’라 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을 때 유럽은 놀랐고 그를 마치 미친 별종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허무주의의 일상화’시대에 살고 있다. 벤야민이 말한 ‘예술의 정치화’ 시대에, ‘아우라’는 또 다른 얼굴로 내일의 우리 앞을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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