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
[인문의 창]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1.04.13 10:00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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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악(惡)한 사람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善)한 사람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라 했다. 나치의 만행 앞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양심과 신념에 따라 진실을 전파하던 이들, '백장미'이다. 지금 미얀마 사태를 목도하니, 숄(Scholl) 남매가 두 눈에 밟힌다.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란 제목으로 2005년 독일에 제작된 영화포스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6년에 이 영화가 상영된 바 있다.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 위키백과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란 제목으로 2005년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포스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6년에 이 영화가 상영돼 대성황을 이룬바 있다.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 위키백과

독일인 모두가 히틀러에 동조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저항한 것도 아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잔혹함과 무관용을 알고 있음에도, ‘자유’를 외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백장미단’(Weiβe Rose)사건이다. 그것도 보수적인 도시 뮌헨대학에서 일어났다. 뮌헨대학은 1472년에 개교했으니 5백년의 역사를 지녔으며, 현재 5만 여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이 대학 출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은 토마스 만(1929, 문학)을 비롯한 36명에 이르며, 초대 총리 아데나워, 대통령 카르텐스, 하이네만, 헤르초크 등도 이 대학 출신이다. 한 대륙에 버금갈 정도의 위세를 가진 대학이다. 바로 이곳에서 ‘하얀 장미꽃’(White Rose) 한 송이가 봉긋이 솟아올랐다.

뮌헨대학 본관 앞 잔디밭에 설치되어있는 백장미단의 기념조각품이다. 그 당시 뿌린 전단지(삐라) 모양을 그대로 재현 하였다.위키백과
뮌헨대학 본관 앞 잔디밭에 설치되어있는 백장미단의 기념조각품이다. 그 당시 뿌린 전단지(삐라) 모양이 그대로 재현되어있다.위키백과

대학 본관 앞 광장은 넓은 잔디밭으로 쭉 연결되어있는데, 잔디밭 오른쪽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벽돌 블록이 깔려있다. 벽돌과 벽돌의 틈 사이에 숄(Scholl) 남매를 잊지 않고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당시의 전단지(삐라)모형이 끼워져 있다. 숄 남매를 위해 만든 작은 기념광장이다. 맞은편 잔디밭에는 그 당시 학생들과 함께 처형된 후버(Huber)교수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흉상이 높다란 제단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전단지 사건의 전말은 참혹하고 참담하다. 지금의 미얀마가 불현듯 떠오른다. 1943년이면 독일은 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하기 2년 전이니, 나치의 전세가 점점 기울어가는 시기라 최후의 발악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뮌헨 시가지 모습이다. 프라우엔 쌍둥이 성당의 모습이 이채롭다. 위키백과
뮌헨 시가지 모습이다. 프라우엔키르헤(Frauenkirche)쌍둥이 성당의 모습이 이채롭다. 출처: Pixabay

당시 뮌헨의 시내거리는 나치정부의 계엄아래 등화관제가 실시되어 칠흑같이 깜깜했다. 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언제 폭격할지도 모르니, 그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조치다. 간혹 나치의 군인들이 길거리에 드문드문 다닐 뿐 민간인은 보이지 않았다. 이같이 어두운 골목길에서도 ‘백장미단’은 은밀하게 준비한 페인트로 시가지 이곳저곳 벽면에다 반나치의 글을 썼고, 가방에 넣어온 전단지를 거리에 은밀히 뿌렸다.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다음날 아침 뮌헨시민들은 벽면에 페인트로 쓰인 ‘FREIHEIT’(自由)라는 글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전시와 같은 계엄 하에서 누가 이런 행동을 감행하다니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내 군데군데 뿌려진 전단지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독일국민들께,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이래, 30만 명의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독일인들은 아둔한 잠 속에서 이런 나치의 범죄를 조장한 셈이다. 사람마다 나는 이러한 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나는 양심에 꺼릴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유죄, 유죄, 유죄이다!  백장미(Weiße Rose)로부터“

나치친위대(SS)는 그들이 감금하고 있던 포로들을 동원해서, 페인트 글씨를 지웠고 전단지를 수거했다. 다른 한편으론 ‘백장미단’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이런 일이 벌써 5번째였다. 물론 전단지는 기껏 수백 장이었고 벽의 글씨도 몇 시간 안에 쉽게 지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가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누군가 ‘자유’라는 말을 감히 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이 말이 어디로 어떻게 전파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철통같은 감시를 피해 ‘백장미단’에 속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뮌헨대학에 재학 중인 다섯 명의 학생과 그들을 지도하던 후버(K. Huber)교수였다. 그 중심에는 25세의 한스 숄과 22살 조피 숄 남매가 있었다. 1943년 2월 18일 화창한 목요일, 한스와 조피 남매는 학교로 가기 전에 가방 속에 선언문 전단지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대학으로 향했다. 자유와 정의를 위해 작은 몸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몇 분 후 대학본관 강의실의 문이 열릴 즈음, 둘은 매우 조심스럽게 전단지를 이곳저곳 복도에 뿌렸다. 마지막 남은 한 뭉치는 본관2층 난간에서 아래로 던졌다. 수업을 위해 1층 복도를 걸어가던 교수와 학생들의 머리위에 눈처럼 전단지가 흩날렸다. 둘은 황급히 도망쳤다.

1943년 2월 18일 숄 자매가 체포된 본관의 아트리움(홀) 모습이다. 그 당시 모습 그대로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위키백과
1943년 2월 18일 숄 자매가 2층 난간에서 전단지(삐라)를 뿌린 혐의로 체포된 본관의 아트리움(홀) 모습이다. 현재도 그 당시 모습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위키백과

바로 그 순간, 이 틈을 놓칠세라 두 개의 눈이 이들의 행동을 몰래 엿보고 있었고, 이 두 개의 눈은 차츰차츰 염탐하는 비밀경찰의 렌즈로 변해갔다. 다름 아닌 대학 건물관리인의 눈이었다. 곧이어 본관건물의 모든 문이 일시에 닫혀졌고, 두 남매의 운명은 여기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게슈타포(Gestapo,비밀국가경찰)는 두 남매를 악명 높은 비텔바허 감옥으로 끌고 갔고, 심문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제 그들은 세상과 완전히 절연되었다. 나치를 열광적으로 옹호하던 판사가 그 재판의 재판장으로 배정되었고, 두 남매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재판관: 훌륭하고 뛰어난 독일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나?

조피 숄: 누구든 시작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독일인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들을 대신했을 뿐이다. 그들은 다만 우리처럼 행동에 옮기지 못 했을 뿐이다.

이제 죽음의 날이 그들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경찰은 자살을 염려하여 모든 날카로운 물건을 감방에서 제거하였으며, 결코 혼자 있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다음날 최후의 아침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조피는 마지막이 될 긴 여행에 앞서, 자신이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단두대에서 처형당할 것인지를 변호사에게 물었다. 변호사는 이런 질문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참담함 위에 놓인 가혹한 질문이었다. 드디어 그녀는 사형집행실로 옮겨졌다. 숄 남매의 아버지는 자식이 죽기직전 마지막 면회에서 ‘너희는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아직도 정의는 살아있다’며 그들을 두 팔로 껴안았다. 체포된 지 단지 4일 만의 일이다. 가장 먼저 단두대에 오른 것은 조피였다. 단두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워보였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사형집행 전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아, 내가 아직도 점심을 먹지 못했군요.”

재즈음악을 그토록 좋아하던 평범한 여대생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려나갔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참수 당한 것이다. 백장미가 붉게 물들었다. 독일을 뒤덮었다. 그 다음에는 한스의 목이 잘려나갔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 말은 ‘자유여 영원 하라’였다. 이들은 비석 없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7월, 백장미단의 나머지 동료들과 지도교수였던 후버교수도 처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이 이야기는 한스 숄의 누나인 잉에 숄이 동생들을 기리며 쓴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원제ː 백장미)』이라는 책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박종서 교수(고려대)가 1978년(도서출판 청사)에, 그리고 송용구 교수(고려대)가 올해(2021년) 2월(도서출판 평당)에 각각 우리말로 번역하여 세상에 내 놓은 바 있다. 이 책은 1947년부터 독일 초등학교 필수교재로 채택되어 사용된 바 있다.

대학생 신분으로 조국독일이 나치의 압제와 폭압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서 폭정을 종식시켜보려는 작은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하고 참혹했다. 그들이 외친 ‘자유’는 나치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혔지만, 그 정신은 오늘도 이 대학 교정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넬슨 만델라가 염원했던 것, 안네 프랑크가 찾고 있었던 것도 똑 같이 ‘자유’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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