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이육사의 '절정'
[시를 느끼다] 이육사의 '절정'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3.06.27 22:0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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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대구형무소 자리 삼덕교회 기념관 로비에 있는 이육사 시인의 부조
옛 대구형무소 자리 삼덕교회 기념관 로비에 있는 이육사 시인의 부조

 

절정 //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한국의 애송시 [2007년 글로북스]

 

이육사 시인은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나 1944년 그가 그렇게 염원하던 대한의 독립을 한 해 앞두고 이국땅 차디찬 베이징감옥에서 애석하게도 순국하고 말았다. 그의 본명은 이원록인데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처음으로 수감되었는데 그때 대구교도소의 수인번호 264(이육사)를 필명으로 사용하면서 본명보다 이육사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이육사 시인은 1925년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격문사건에 가담하였고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비밀지령 전달, 무기밀반입 등 여러 방면에서 직간접으로 독립운동을 도왔다.

이육사 시인은 알면 알수록 더 존경심이 일어나는 위대한 우국시인이다. 일반적으로 우국시인이라 하면 글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조선인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투옥되고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목숨까지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그런 분들이 덜 위대하거나 별로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추앙받고 존경받을 대단한 애국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육사 시인은 글과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한 흔치않은 애국지사이기에 다시 한 번 그의 생애와 문학, 애국 등을 상고(詳考)해 보고자 한다.

이육사 시인은 그야말로 뿌리부터 애국지사다.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가 애국지사의 집안이다. 6형제 중 둘째 아들이었는데 6형제 모두가 시인, 신문기자, 문학평론가, 화가로 활동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고 한다. 또한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그것은 모두가 그의 어머니의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어머니는 선산에서 활동한 의병대장 왕산 허위선생 가문의 여식이었고 정신이나 기개가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대단하였다고 한다.

이육사 시인은 1931년 중국에서 같은 의열단 단원인 윤세주를 만나 그의 권고로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했다. 그곳에서 군사학, 통신법, 폭탄제조법, 총기사용법, 암살법, 변장술 등을 교육받았다고 한다. 1943년 국내의 항일조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국내에 무기반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43년 7월에 모친의 소상에 참여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또 검거되었다. 그는 17번이나 검거되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검거가 된 것이었다. 국내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된 후 차디찬 베이징감옥에서 애석하게도 순국하고 말았다.

이 詩는 암담한 일제강점기 때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애써 넘어보려 몸부림치는 한 젊은 시인의 절규이다. 첫 행에서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라고 시작되고 있다. 그것은 겨울의 강추위가 북방에서부터 밀려오듯 우리의 암담한 고난의 시작인 일제강점기 때 힘 있는 나라가 힘없는 나라를 마치 누가 뒤에서 채찍을 휘둘러 내몰 듯이 거침없이 들이닥쳐 찬탈한 것을 표현했으리라.

두 번째 연에서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이것은 하늘도 그 악랄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거주춤하며 포기할 즈음에 그 백성들은 서릿발 칼날 위에 세워진 듯 위태롭고 절망적이었던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시인은 3연에서 그 당시 백성들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라고 했다. 시인의 말을 그대로 풀어보자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나라 백성들은 어디다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하냐며 하소연하고 있다. 한 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다함은 칼날 위에 선 백성이 발끝이나 발꿈치만으로도 옮겨 디딜 곳조차 없다함이니 얼마나 그 상황이 엄중하고도 위중하던가.

이런 상황에서도 4연에서는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라고 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 감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 이것이 시인이 보통사람과는 다른 비범함과 위대함이 아닐까. 마지막 행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가 가슴을 후벼 파고 비수로 찌르는 듯하다. 무지개는 꿈처럼 잠시 있다 스러지는 아름다움이건만 우리를 옥죄는 겨울, 즉 일제강점기는 강철로 만든 무지개처럼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에 얼마나 답답하고 절망적이었을까.

그래도 이 詩를 쓴 뒤 시인의 행적을 보면 결코 좌절하지 않고 부단히도 그 강철로 된 무지개를 부수기 위해 끊임없이 계란을 던지고 또 던지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우리 민족의 수많은 우국지사들의 충정에 하늘도 감동하여 대한민국은 독립되었고 비록 강대국의 야욕 탓에 동족상잔의 비극은 있었지만 그 마저 뛰어넘어 세계 일류국가 대열에 우뚝 서지 않았는가. 이육사 시인은 이 詩의 제목처럼 절정을 살다간 시인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독립투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힘을 합쳐 더욱 굳건히 이 나라를 지켜 자손만대까지 이어가게 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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