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윤동주의 '참회록'
[시를 느끼다] 윤동주의 '참회록'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3.04.1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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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이 들고 있었을 것 같은 손거울
윤동주 시인이 들고 있었을 것 같은 손거울

 

참회록 //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는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한국의 애송시 [2007년 글로북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1945년 2월 16일 향년 28세의 나이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고향 용정에 묻혔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는 조국의 아픔과 인생에 대해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詩에는 부끄러움이 잘 나타나 있다. 서시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적고 있다. 자화상이란 詩에도 자기를 미워했다가 가엾어 했다가 그리워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길이란 詩에도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도 푸르다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걸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그야말로 순백의 영혼을 가진 시인다운 시인이었다.

시인은 1연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을 들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들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자기의 얼굴이 욕되다고 표현하고 있다. 더군다나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하면서 절망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보기에도 부끄럽고 민망하게 느낀다는 건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후회와 반성하면서 자기를 성찰함이 아니던가. 자신의 선조들께 까지 죄송한 마음을 표현하는 듯 보인다.

2연에서는 그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과감하게 한 줄로 줄이려고 한다. 만 이십사 년 일개월은 그의 나이가 아니던가. 일반적으로 보면 너무나 젊고 푸릇푸릇한 나이가 아닌가. 그래도 시인 자신으로 봤을 땐 전 생애이니 그 긴 전 생애를 철도 없이 생각도 없이 무슨 생각으로 살았든가 하면서 자탄하고 있는 듯하다. 기쁘면 아무 생각 없이 기쁨만 탐닉했고 슬프면 그 슬픔에 젖어 넓고 길게 보는 안목이 부족했음에 자탄하면서 몸부림치는 듯 보인다.

3연에서도 그 괴로운 참회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 내가 이렇게 반성하면서 후회하고 있지만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함은 살면서 끊임없이 죄를 짓고 실수를 반복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즐거우면 즐거움에 들떠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지금 쓰고 있는 이 참회록마저도 어쩌면 후회로 남을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함은 오늘의 이 참회록마저 나이가 들어 다시 보면 얼마나 치기어린 망언이라 생각될 수도 있으리라.

마지막 연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쓰고 있다. 그것은 매일 밤 하루를 돌아보고 반성하자는 뜻으로 읽힌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는 것도 발바닥으로 어찌 거울을 닦을 수 있으랴마는 그만큼 꼼꼼히 닦아 자신을 좀 더 면밀히 세밀히 들여다보자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로 마무리하고 있다. 운석이란 지구의 돌이 아닌 유성이 다 타지 않은 채 지구로 떨어지는 것을 말함이니 그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사람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그 위태로운 돌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나온다니 그게 바로 자기의 모습이 아니던가. 슬프고 위태로운 줄도 모르는 오늘의 자기를 통해 후일을 미루어 짐작함이 아니던가.

시인은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윤동주 시인의 맑고 고운 심성과 순백의 영혼이야말로 詩를 詩답게 쓸 수 있었고 앞날까지 예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윤동주 시인은 참으로 시인다운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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