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이태수의 '달빛 속의 벽오동'
[시를 느끼다] 이태수의 '달빛 속의 벽오동'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3.12.15 11: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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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속의 벽오동 / 이태수

 

 

달빛이 침묵의 비단결 같다

우두커니 서 있는 벽오동나무 한 그루,

그 비단결에 감싸인 채

제 발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깊은 침묵에 빠져들어

마지막으로 지는 잎사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벗을 것 다 벗은 저 늙은 오동나무는

마치 먼 세상의 성자, 오로지

침묵으로 환해지는 성자 같다

말 없는 말들을 채우고 다지고 지우는 저 나무는,

밤 이슥토록 달빛 비단옷 입고

이쪽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다.

 

오랜 세월 봉황 품어보려는 꿈을 꿨는지,

그 이루지 못한 꿈속에 들어 버렸는지

제 몸을 다 내려놓으려는 자세로 서 있다

달빛 비단 자락 가득히

비단결 같은 가야금 소리, 거문고 소리,

침묵 너머 깊숙이 머금고 있다

 

침묵의 푸른 이랑 [2012년 민음사]

 

이태수 시인은 1947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대구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고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시집으로는 ‘담박하게 정갈하게’ ‘나를 찾아가다’ ‘그림자의 그늘’ ‘침묵의 푸른이랑’ ‘우울한 비상의 꿈’ ‘유리창 이쪽’ ‘침묵의 결’ ‘따뜻한 적막’등 수많은 시집이 있다. 대구시인협회 회장, 매일신문 논설주간을 지냈고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대구한의대 겸임교수 등을 역임하고 한국가톨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대구시문화상 상화시인상, 천상병시문학상, 동서문학상을 등을 수상했다.

이 詩는 그냥 눈으로 읽기보다는 소리 내어 낭송을 해 보노라면 독특한 詩의 묘미에 흠뻑 젖어 들게 된다. 혹자는 시의 완성은 낭송이라 했는데 특히 이 詩는 낭송을 해 보면 진정한 서정의 진수를 맛보게 되리라. 제목부터 물씬 서정감이 넘친다. 이제까지 필자가 보아왔던 시인의 詩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이 詩에서 시인은 들판에 홀로 선 늙은 벽오동나무에 자신을 이입시키면서 자신이 벽오동 나무가 되어 詩를 써 내려가고 있는 느낌이다. 첫 연 첫 행이 ‘달빛이 침묵의 비단결 같다’ 로 시작되고 있다. 달빛이 침묵의 비단결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달빛 속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벽오동나무 한그루가 그 침묵의 비단결에 감싸인 채 환상적인 서정을 자아내고 있다.

2연에서 벗을 것 다 벗은 늙은 벽오동나무는 침묵으로 환해지는 먼 세상의 성자 같다고 보고 있다. 그 먼 세상은 이 땅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룩한 땅일 것이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자신이 살아온 나날들이 부끄러울 것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시간이 벽오동나무의 나뭇잎을 떨구듯 말 많은 세상이 난도질 하더라도 침묵으로 항변하는 듯 보인다. 하여 침묵으로 환해지는 성자 같고 말 없는 말들을 채우고 다지고 지우고 살아온 자신에게 잘 살았노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위로해 주는 듯하다.

마지막 연에서 드디어 자신의 내면을 살짝 엿보이는 듯하다. 전설속의 새 봉황은 아무 나무에나 앉지 않는다고 한다. 오로지 벽오동나무에만 깃든다고 전해진다. 또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는다고 했다. 시인은 살아오면서 스스로 많은 걸 삼가면서 자리를 가려 앉고 살아왔노라 하는 고백서 같다. 오랜 세월 봉황을 품어 보려는 꿈을 꿨는지 그 이루지 못한 꿈속에 들어버렸는지 제 몸 다 내려놓으려는 자세로 서 있다고 남의 말 하듯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음이 진정성으로 느껴진다. 읽을수록 정감이 느껴지고 곰삭은 詩의 진수가 느껴지는 아주 좋은 詩다.

참고로 오동나무와 벽오동나무는 다르다. 오동나무는 현삼과에 속하고 벽오동나무는 벽오동과다. 오동나무는 속이 희고 벽오동은 껍질이 푸르다고 한다. 나무이름이나 목재 쓰임이 비슷하여 사람들이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식물학적으로 보면 완전히 다른 나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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