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김삼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평전'
[장서 산책] 김삼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평전'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1.03.08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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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 홍범도 장군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온전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

지은이 김삼웅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1. 출생에서 성장까지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양력 10월 2일) 평안도 평양의 외성 서문 안에 있는 문열사 앞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후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9세 때에 아버지마저 잃었다. 홍범도는 15세까지는 숙부 집에 의탁하여 자랐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몸집이 크고 힘이 세진 소년은 이웃 마을 지주 집의 꼴머슴으로 들어가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홍범도가 만 15세가 되던 1883년, 평양의 감영에서 병정을 모집하자, 나이를 17세로 속이고 지원하여 군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때에 같은 부대 소속의 부패한 군교와 시비가 붙은 끝에 그 사람을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4년간 근무하던 군을 떠나게 되었다. 홍범도에게 있어서 4년여 군인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이후 산포수와 의병 활동, 빨치산 대장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백발백중의 사격술, 각종 전술과 기량은 이때 익힌 것이었다.

군문을 떠난 홍범도의 나이는 어언 19세, 갈 길이 막막했던 그는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를 생각하면서 여러 날을 걸어서 마침내 수안군 천곡의 총령 아래에 있는 제지소에 이르렀다. 홍범도는 1888년경부터 이곳에서 인부로 일하게 되었다. 제지소에서 3년을 일한 홍범도는 동학을 믿으라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밀린 급여를 요구하다가 주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제지소를 떠났다.

2. 파란곡절의 젊은 시절, 의병투쟁 시작

1890년(22세),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에 들어간 홍범도는 곡절 끝에 지담 스님의 상좌가 되어 팔자에도 없는 승려 생활을 하게 되었다. 비승비속의 처지에서 입산한 지 1년여가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만난 비구니 단양 이씨(이옥구)가 임신을 하면서 1892년 둘은 절을 떠났다. 단양 이씨의 고향인 북청으로 가던 길에 만난 건달패들이 홍범도를 때려눕히고 처녀를 끌고 갔다. 다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홍범도는 강원도 회양군의 먹패장골에서 3년간 은거 생활을 했다.

1895년(27세), 먹패장골을 나온 홍범도는 단발령에서 김수협을 만나 처음으로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리고 1897년(29세)에는 불의의 사고로 헤어졌던 이옥구 여사와 상봉하여 장남 양순과 함께 함흥 북청에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한편, 출중한 사격술을 인정받아 안산 포연대에 가입하여 포연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안정된 산포수 생활을 하였다.

3. 산포수 의병장, 관북 지역 일본군 소탕전

1907년(39세), 안산 포연대 회원들과 함께 일제의 총포화약류 단속법을 거부하고, 갑산에서 무장 항일의병대를 조직하여, 함경도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섬멸했다. 일제는 홍범도를 검거 또는 회유하기 위해 1908년 4월 30일 이전에 이미 부인과 아들을 체포하여 억류하고 있었다. 5월 중순에 부인 이옥구 여사가 일제의 고문으로 사망하고, 6월에는 큰아들 홍양순이 정평 바배기 전투에 참전 중 전사했다.

4.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오가며 펼친 항일전

홍범도는 4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퉁화를 거쳐 길림에 이른 것은 1908년 11월 10일경이었다. 여기서 열두 살짜리 아들 용환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김창옥, 의병참모 권감찰 등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병들은 뒷날을 기약하면서 국내로 돌려보냈다.

홍범도는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안중근을 만났다. 1910년 6월에는 국내외 의병을 통합한 13도의군이 연해주에서 창설되었는데, 홍범도는 안창호, 이진룡 등과 함께 도총소의원의 직책을 맡았다. 그리고 그해(1910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치 소식을 접하고 성명회(聲明會)에 참여해 조선 병탄 무효를 주장하며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했다.

홍범도는 1911년(43세)에 블라디보스토크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권업회는 신채호가 주필로 선임된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한인의 권익 옹호와 항일정신을 배양했다. 이후 철도공사를 비롯해 금광 등을 돌아다니며 노동을 해 군자금을 모았으나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1914년(46세), 홈범도는 중국과 러시아 접경 지역인 봉밀산에 들어가 둔전병식 독립군 양성에 힘쓰는 한편, 학교를 세우고 조선 이주민들을 교육했다.

5. 대한독립군 창설, 국내진공작전

국내에서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면서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에서도 독립만세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3월 17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러시아 지역·북간도·서간도·국내로부터 온, 지역과 독립운동 단체들을 대표하는 8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되었다. 홍범도는 이동휘와 함께 군무부 책임을 맡으면서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대한독립군의 규모는 약 300명으로, 조직은 소대-중대-대대의 편제를 채택하였다.

홍범도는 1919년 여름부터 부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작전을 벌이는 한편 여타 독립운동 단체 독립군 부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하면서 통합 운동에 나섰다. 독립군의 연합부대는 1920년 초반부터 수시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6. 봉오동전투의 영웅

1920년 6월 7일은 일본군이 우리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한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골 저수지에서 북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의 지휘 아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그리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규모 독립군부대를 편성하고(대한북로군부) 신민단의 소부대도 참전하여 봉오동 골짜기에서 현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한 대첩이었다.

7. 청산리대첩을 승전으로 이끌다

홍범도의 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독립부대들은 10월 13일 이도구 복합마당에서 연합부대를 편성하기 위해 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홍범도의 지휘하에 군사통일과 작전을 결의했다.

역사적인 청산리대첩은 일본군의 도발로 시작되었다. 1920년 10월 17일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 아즈마 지대는 야마다 연대장에게 20일을 기하여 청산리 일대의 독립군을 포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야마다 연대는 이도구를 거쳐 봉밀구로 우회하여 북로군정서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청산리 계곡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렇게 시작된 청산리전투는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고동하골전투 등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10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전투들은 모두 홍범도의 연합 독립군과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 혹은 연합작전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항일 독립군 연합부대는 홍범도 사령관의 지휘 아래 전투를 할 때마다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전략과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이 지역 한인들의 헌신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 적지 않았다.

8. 일제의 보복 경신참변, 독립군 기반 상실

청산리대첩에서 참패한 일제는 간도 지역 한인들에 대해 야수적인 보복을 가했다. 한인들이 독립군들의 ‘지원부대’ 역할을 한 데 대한 분풀이였다.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간도 일대에서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한국인은 3천469명이고, 이를 전후하여 3~4개월 동안 학살당한 한국인을 합하면 약 5천여 명이 참변을 당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역사책에서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한민족이 만주 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었다.

9. 대종교에 참여하여 민족정신 선양

홍범도는 1914년 만주에서 조직된 비밀 단체 단군 계열인 ‘단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단군 관련 각종 사서 간행에 참여하고, ‘단학회보’ 발간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대종교에는 독립운동계의 거물들이 참여했다. 홍범도, 신규식, 박은식, 윤세복, 신채호, 김두봉, 정인보, 장지연, 유근, 김교헌, 서일 등 당대의 민족사학자 대부분이 대종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0. 좌절의 시기, 레닌·트로츠키와 회견

홍범도는 1921년(53세) 1월 하순 70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흑룡강(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아무르주)으로 들어갔다. 대규모의 군대를 편성해 다시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해 6월 러시아 자유시에서 일·러군의 공작으로 대한독립군 내부 분열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적군에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다. 그해에 오랜 의병 활동으로 건강을 해친 둘째 아들 용환이 병사했다.

홍범도는 1922년(54세) 제1차 극동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이동휘와 함께 레닌과 회담하여 조선 독립 자금을 지원받았다. 홍범도는 개인적으로 레닌에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과 돈을 선물 받았다.

11. 협동조합 일구며 재기 노렸으나

이후 홍범도는 러시아의 정세 변화에 따라 러시아 이만, 수청 등지로 옮겨다니며 동포를 위한 협동농장을 주도하면서 농업에 종사했다. 홍범도는 1926년(58세) 러시아에서 이인복과 재혼하여 18년 홀아비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예식도 없이 마을 주민들과 약간의 음식을 나누고 부부가 되었다.

12. 광복을 2년 앞두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다

1937년(69세),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한 홍범도는 그곳 크질오르다 조선인 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했다. 1942년(74세), 크질오르다에서 연극 연출가 태장춘의 제의로 ‘홍범도 일지’를 구술하고, 홍범도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이 조선인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1943년(75세), 조국 광복을 2년 앞두고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10월 25일 사망하였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고 2005년에는 여천 홍범도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광복 후 첫 추모 행사가 거행되었다. 2021년 3월 1일, 국가보훈처는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아들(홍양순)과 부인(단양 이씨)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홍범도는 일본군이 스스로 ‘하늘을 나는 장군(飛將軍)’이라 부를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 전술로 일본군을 격파하여 명성을 날렸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서는 ‘축지법을 구사하는 홍범도 장군’이라는 ‘전설’이 나돌 만큼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8쪽) 그에게 척살의 대상은 왜적뿐만이 아니었다. 민족을 배반한 일진회 회원과 친일파도 가차 없이 처단하여 민족의 의기를 살리고자 했다.(9쪽)

홍범도 장군은 자신도 머슴이었지만 아버지도 머슴이었다. 국가로부터 혜택은커녕 태생과 성장 과정에서 온갖 핍박을 받아 왔다. 그런데도 누대를 두고 특권을 누려 온 자들이 거침없이 조국을 배신할 때 그는 누구의 지시나 부름도 없이 스스로 의병이 되었다.

간도와 극동 러시아의 춥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빨치산 대장으로서 일본군을 토벌하고,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국치 이래 최초로 국내진입작전을 펴서 일제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그의 주도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3대 대첩’ 중의 2대 대첩이 홍범도가 아니면 쉽지 않았을 전투였다.(14쪽)

남북에서 ‘통일조국의 사표’로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홍범도는 그의 치열한 항일투쟁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 소홀히 취급받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독립운동 연구가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고, 남한에 그를 기릴 만한 후손이 없으며, 불행하게도 홍범도가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밀려가서 75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서거했기 때문이다.(11쪽)

구소련이 붕괴되는 1980년대 말까지 카자흐스탄은 ‘철의 장막’에 가려지고, 홍범도의 소식도 차단되었다. 또한 항일 독립전쟁을 전개할 때 그의 활동이 중국의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 위주였고, 이르쿠츠크 등에서 러시아 측과 협력하여 항일전을 벌인 일, 한때 레닌과 만나서 권총을 선물받고 볼셰비키에 입당한 일 등을 이유로 하여 단세포적인 역사학자들에게서 ‘좌파 독립운동가’로 몰리기도 했다.(11쪽)

나는 중학교 때 배운 국사에서 봉우동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승리로 이끌었고, 청산리대첩의 주역은 김좌진 장군이라고 외우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청산리대첩의 중심 인물이 홍범도 장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날 청산리대첩의 실상은 크게 왜곡되어 왔다. 특히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 등을 지내고, 청산리대첩 당시에는 북로군정서 장교였던 이범석이 회고록 ‘우등불’에서 자신의 업적은 과장하고, 홍범도 부대는 도망치다가 떼죽음을 당한 것처럼 기술하면서, 왜곡된 내용이 마치 정사처럼 인식되었다.(171~172쪽)

이범석이 홍범도를 깎아내린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는 것 같다. 우선 자신이 속한 군대의 김좌진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전공을 빛내고, 해방 후 이승만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겪게 되는, 6·25전쟁으로 인한 반공정신의 작용이 아닌가 한다. 러시아의 공민권을 취득하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홍범도의 행적에 대한 반감이 작용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174쪽)

홍범도는 한동안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철저하게 외면 기피되었다. 이승만·박정희 시기에 특히 심했다. 이범석의 저서와 그의 각종 ‘증언’의 영향력 때문인 것 같다. 1980년대까지 청산리대첩의 주역은 김좌진과 이범석이고, 홍범도는 존재하지 않았다.(174~175쪽)

우리는 애국 열사들의 위대한 삶과 사상에 대해 무지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령 알고 있다 해도 그 지식은 매우 단편적이다. 독립전쟁 전승 101주년(2021년)에 항일 무장투쟁사의 신화를 남긴 홍범도 장군의 평전을 읽게 되어 무척 감명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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