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김삼웅 '김재규 장군 평전'
[장서 산책] 김삼웅 '김재규 장군 평전'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1.02.01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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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김재규는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10·26 사건으로 처형당한 지 40년, 다시 돌아보는 김재규의 삶!

지은이 김삼웅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1. 의협심과 정의감이 강한 소년

김재규는 1926년 3월 6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동 687번지에서 아버지 김형철과 어머니 권유금 사이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김재규는 고집이 세서 한번 하고자 하면 꼭 해내는 성질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김재규는 8살 때인 1933년 4월 1일 선주보통학교(지금의 선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달리기도 잘하고, 상을 탈 만큼 붓글씨도 잘 썼으나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다. 김재규는 1939년 3월에 선주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의 길이 막혔다. 학업성적이 반에서 10% 안에 들어야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는데, 그의 성적은 학급에서 중상 정도에 머물렀다.

실망한 아버지가 찾은 길은 아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는 방법이었다. 김재규는 그렇게 15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입학한 학교는 동경중야무선전신학교였는데, 교과목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인 학생과 싸움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김재규는 학교를 그만두고, 2년여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2. 군인의 길

1941년 4월, 김재규는 안동농림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이 학교는 5년제였는데, 4학년으로 올라갈 때 일본군의 특별간부후보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배속된 곳은 52비행사단으로, 악명높은 가미카제 특공대 훈련부대였다. 김재규는 그곳에서 비행사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훈련 도중에 일제가 항복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김재규는 귀국한 뒤 9월에 경북사대 중등교원양성소를 나와 1946년 3월까지 6개월간 김천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학구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결국 적성에 맞지 않는 교사와 일본에서 귀국한 후 아버지의 강요로 결혼한 정분이 없는 아내를 피하는 방법으로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1946년 9월에 김재규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그곳에서 박정희를 동기생으로 만났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고향 이웃 면인 선산군 구미면(오늘날 구미시)에서 1917년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아홉살 터울이었다.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성적은 동기생 196명 중 김재규가 14등, 박정희가 3등이었다.

만 3개월 만에 소위로 임관한 김재규는 대전에 있는 제2연대의 중대장 대리로 보직을 받았다. 김재규는 소위로 근무하다가 중위로 진급하는 날 명예면관(名譽免官) 조치로 갑자기 군복을 벗었다. 공산주의자인 연대장 김종석과의 다툼 때문이었다.

김재규는 1947년 8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대륜중고등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그후 김종석이 빨갱이임이 밝혀져 군법회의에서 사형집행되자 주위에서 성적도 좋은 사람(김재규)이 억울하게 면관됐던 사실이 알려져 1948년 10월에 다시 소위로 군에 복직하게 되어 3여단 수송중대장직에 보임됐다.

군에 복귀한 김재규는 이후 1973년 3월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25년에 걸쳐 군인 생활을 했다. 6·25 전쟁에도 참전하고, 각급 부대장을 거쳐 보안사령관으로 지내기도 했다. 6·25 전쟁 때는 안동지구 토벌작전에 참가해서 큰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3. 평탄하지 않은 군생활

김재규와 첫째 부인은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고, 딸린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 10여 년을 사실상 별거 상태로 지냈다. 중령으로 진급한 김재규는 전남 여수의 제2보충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어느 날, 육사 동기생이 순천의 유지 김완근의 셋째딸 김영희를 소개했다. 김영희의 집에서는 사윗감이 군인이라는 데 별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신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1952년 봄에 화촉을 밝혔다. 이듬해에 딸 '수영'이가 태어났으나 그 이후에는 아이가 없었다.

4. 5·16 군사쿠데타 이후 승승장구

1961년에 박정희가 주동한 5·16 쿠데타가 벌어질 당시 김재규는 육군 준장으로, 1960년 1월부터 1년간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내고 육본 관리참모부 관리심사처장을 거쳐, 국방부 총무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5·16이 터지고 정확히 한 달이 지난 6월 16일에 김재규는 호남비료회사 사장으로 발령받았다. 그후 1963년 8월 20일까지 26개월간 호남비료회사에서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신분으로 지내야 했다.

박정희는 1966년 1월 15일에 김재규를 육군 소장으로 진급시키고, 6관구 사령관으로 보직을 바꾸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진입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김재규가 다시 필요해진 박정희는 1968년 2월에 김재규를 방첩부대장으로 임명하고 방첩부대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보안사령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재규는 보안사령관 시절인 1969년 4월 1일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그가 바라던 별 3개를 달았다. 그리고 중장으로 진급한 지 17개월 만인 1971년 9월 23일에 3군단장으로 전임되었다.

5. 애증의 갈등 속에서

김재규는 평소에 군인으로 최고의 위치에 오르고, 군인으로서 명예롭게 은퇴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1973년 3월 5일, 3군단장을 끝으로 25년간의 군인생활을 마쳐야 했다. 뜬금없이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추천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재규는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손바닥 안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처지였다. 내키지 않은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던 1973년 12월 14일, 이번에는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김재규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일할 때의 정치 상황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에 이어, 민간인들을 군사법정에서 재판하는 비상군법회의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긴급조치 2호, 그리고 4월 3일에는 민청학련 사건 발표와 함께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었다. 이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재일교포 출신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8월 23일에는 사쿠라 논쟁을 빚었던 이철승 대신 김영삼이 선명 노선을 내걸고 신민당 총재로 당선됨으로써 정가는 더욱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김재규는 1974년 9월 17일 건설부장관으로 전격 입각했다. 중앙정보부 차장이 된 지 9개월 만이었다. 김재규가 건설부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나서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으며, 중동 특수를 타고 현대건설 등이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6. 운명의 길, 중앙정보부장

1976년 12월 4일, 김재규는 제8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51살, 건설부장관에서 곧바로 직행했다. 김재규는 부장에 취임하여 비교적 온건 노선으로 중정을 운영했다. 그동안 정보부가 해온 행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지 쇄신이 필요했고, 불교도인 그는 극렬주의자도 아니었다. 또 박정희가 밀어붙이는 강경노선이 지속되다가는 자칫 국가적인 파국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했을 것이다.

7. 박정희의 권력욕망에 맞서

1978년 12·12 총선에선 야당인 신민당이 집권당인 공화당에 비해 득표율이 1.1% 앞섰다. 그리고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정기전당대회에서는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선거와 신민당 사태 이후 차지철의 위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차지철은 두 사건이 모두 김재규의 중정이 무능해서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그런 뒤 대통령이 이를 믿는 것 같으니까, 심중을 헤아린 차지철은 앞뒤 가리지 않고 설쳤다.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워질수록 그의 독행은 더욱 심해지고, 사사건건 김재규와 부딪치게 되었다.

김재규는 순리적인 방법으로 유신독재를 끝내고, 박정희가 권력을 내려놓도록 하는 길을 찾았다. 그래서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국에 대처하고자 했다. 유신독재를 청산하는 길은 곧 유신독재의 심장인 박정희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김재규의 이 같은 결단을 더욱 재촉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공화당과 유정회 소속 의원들은 1979년 10월 4일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마침내 10월 16일 부산, 10월 18일 마산에서 한국 현대사의 물굽이를 바꾸게 되는 부마민중항쟁이 일어났다.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을 계기로 폭발한 부마민중항쟁은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일시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은 채 17일에는 이화여대, 19일에는 서울대와 전남대, 24일에는 계명대 등 학생시위가 수그러들 줄 모르고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10·26을 촉발시키는 뇌관이 되었다.

유신 말기 박정희와 차지철의 시국 인식은 그야말로 '소름끼칠' 정도였다. 그들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능히 못할 짓이 없었다.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10월 18일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00만, 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했다. 김재규는 비장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온건한 방법도, 충심어린 간청도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기로 결단한다. 박정희와 차지철의 거침없는 발언으로 보아 장차 나라에서 어떤 비극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8.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던 김재규는 이 무렵 정보업무 수행 과정에서 무능하다는 이유로 박정희로부터 몇 차례 질책을 받은 데다,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나 건의가 차지철 경호실장에 의해 번번히 제동이 걸리는 등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감정이 많이 쌓여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박정희와 만찬을 함께 할 기회가 생기자 이 기회에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실행할 준비를 하는 한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중앙정보부 차장보를 궁정동 별관에 대기시켰다.

이날 저녁 6시 5분경 만찬이 시작되었다. 식사 중 박정희가 부마사태를 중앙정보부 정보 부재 탓으로 돌려 김재규를 힐난하고, 뒤이어 차지철이 과격한 어조로 그를 공박하자 흥분한 김재규는 밖으로 나와 2층 자신의 집무실에서 권총을 챙겨 나온다. 그리고 다시 만찬회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직속 부하 박흥주와 박선호에게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을 사살할 것"을 지시한다. 만찬회장으로 돌아온 김재규는 7시 40분경에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각각 2발씩을 쏘아 두사람을 절명시킴으로써, 18년간의 1인 독재 정권과 유신체제를 종식시켰다.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증언했다.

김재규는 사건 직후 승용차에서 중앙정보부로 가자고 말했으나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여, 육본 벙커로 갔고, 얼마 뒤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중정이냐 육본이냐가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다.

거사 다음 날인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정승화 총장이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혐의로 구속되고, 계엄사 내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고, 계엄사는 합수부의 지침을 받아 계엄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전두환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9. 군사법정의 피고인으로

육사 생도 시절에 5·16 쿠데타를 앞장서서 지지했던, 박정희의 충직한 '정치사생아' 전두환이 주도한 합수부는 김재규를 체포하여 가혹하게 고문, 취조하고 불법적으로 재산을 탈취하는 등 온갖 폭거를 서슴지 않았다. 합수부는 김재규의 인격과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히는 내용을 덧붙이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게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사건 발생 18일 만인 11월 13일에 김재규를 비롯해 김계원, 박성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유석술 등 8명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 협의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했다. 기소된 지 8일 만인 12월 4일 오전에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뒤편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이후 전두환 신군부의 12·12 군권 탈취 사건으로 재판 진행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공판이 시작된 지 불과 14일만인 12월 18일 제9회 공판을 마지막으로 사실심리·증인신문·증거조사 등을 모두 마치는 초고속 재판이었다.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김재규, 김계원,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궁정동에서 김재규가 사용했던 권총을 땅에 파묻은 유석술 피고인에게는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다른 피고인들이 최후진술을 마치고 마지막 김재규의 진술이 시작될 때 10분간 휴정을 선언하고 방청객을 모두 내보냈다. 변호인과 김재규 피고인 가족 4명만이 남은 법정에서 김재규는 최후진술을 했다. 1) 10·26은 민주혁명이다, 2) '5·16이 남긴 쓰레기를 설거지하고자', 3) '저에게 극형, 부하들은 살려주길'이 최후진술의 주요 내용이었다.

10. 피고인 김재규를 사형에 처한다

최후진술이 끝나고 구형공판에 이어 12월 20일 오전 11시에 제1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재판을 시작한지 16일 만이었다. 김영선 재판장이 "79보군형공 제88호 내란목적살인 등 사건에 대하여 판결을 선고한다. 피고인 김재규를 사형에 처한다"라고 극형을 선고했다. 검찰이 구형한 그대로였다.

변호인단은 항소를 서둘렀다. 마감일에 맞춰 '항소이유서'를 준비했다. 그러나 항소이유서가 법원에 제출되기도 전에 공판기일 통지서가 송달되었다. 관례는 커녕 일반 상식에도 맞지 않는 억지였다. 변호인단은 밤을 새워 122쪽에 이르는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다.

1월 22일, 김계원, 김태원에 대한 사실 심리로 항소심 공판이 시작되었다. 1심 때와 같은 법정이고, 재판부는 바뀌었다. 1월 23일의 2차 공판에 이어 24일 3차 공판에서 김재규에 대한 심리와 변론, 최후진술이 진행되었다. 변호인단은 '항소이유보충서'를 작성하여 계엄고등군법회의에 제출했지만, 사전에 양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접수하지 않은 채 판결 선고를 강행했다. 항소이유보충서는 '1) 10·26 민주회복 국민혁명의 필연성, 2) 10·26 혁명의 적시성, 3) 10·26 혁명의 방법, 4) 10·26 민주혁명의 결과, 5) 나로 하여금 자결케 하라'가 주요 내용이었다.

11. 신군부 폭압 속에 열린 최종심

대법원은 10·26 거사의 마지막 심판인 상고심을 1980년 5월 20일 열기로 했다. 이 날짜는 정략적으로 잡힌 것이었다. 신군부는 5월 17일 새벽에 쿠데타를 일으켜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 선포하였다. 신군부가 예비한 시나리오대로 쿠데타 3일 뒤, 2심 선고 113일 만에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김재규 등의 상고심 재판이 열렸다.

선고공판은 김재규 등 피고인 7명은 출정시키지 않고, 피고인의 가족 11명과 보도진, 기관원 등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0시 8분, 재판장 이영섭 대법원장의 개정선언으로 막이 올랐다. 재판장은 판결 주문을 말하기 전에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이 제출한 '상고이유서'의 주장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상고이유서에서 특이한 점은 10·26 이후 '서울의 봄' 시기에 개헌론이 제기되고 헌법 이론 중 새로 저항권 이론이 등장한 것과 관련해서, 10·26 거사를 국민저항권의 발로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재판장은 '상고이유'는 피고인마다 대법원 판사들의 의견일치가 되지는 않았으나 모두 상고이유가 없다는 것이 다수의견이라 말하고, 한참 뜸을 들였다가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라고 선고했다. 이로써 김재규는 사형수가 되었다.

12. 대법원의 재심 기각과 구명운동

대법원의 판결이 있은 뒤 볍호인단은 극심한 시련을 겪었다. 보안사가 7명의 변호사들을 체포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재판정을 나오는 길에 귀가하지 못하고 각자 피신해야 했다. 피신 중이던 안동일 변호사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었으나 기각되었다.

군권에 이어 정권이 전두환 세력에게 장악되면서 "김재규를 살려야 한다"라는 구명운동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980년 2월 5일에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구명을 위한 청원서'를 발표하고, 이를 대법원장 등 주요관계자에게 보냈다. 공식적인 첫 구명운동이었다. 이후 10·26 거사 가족들이 호소문과 탄원서를 내고, 원로들과 주요인사들로 구성된 '구명위원회'는 사형을 유보해 달라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문을 보냈으며, 해외에서도 구명운동이 활발했다. 뿐만 아니라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은 1980년 4월 23일 대법원에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10·26 사건 관련자들을 위한 청원서'를 발표했다.

13.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김재규는 사형집행 하루 전인 1980년 5월 23일, 어머니와 부인 등 가족과 이승에서 마지막 면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재규는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당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이라는 구절로 담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리고 가족에게 30분간 유언을 남겼다. 유언의 내용은 "1)하늘의 재판에서는 이길 것, 2)집권욕에서 10·26 하지 않았습니다, 3) 민주회복으로 혼란 극복하길, 4)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였다.

운명의 날인 1980년 5월 24일, 김재규는 54살에, 10·26 거사를 통해 독재자를 암살한 지 6개월 28일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형이 집행된 후 그의 손에는 집행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긴 염주와 작은 염주 2개가 그대로 손에 꽉 쥐어져 있었다. 김재규의 교수형이 집행되고 나서 1시간 단위로 박선호 등 부하들도 차례로 형이 집행되었다. 현역 군인이었던 박흥주 대령은 단심이어서 3월 6일에 이미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김재규 장군은 변호인과 가족들에게 국군동정복을 입혀 매장하고, 묘비에는 '김재규 장군지묘'라고 쓰고, 그리고 부하들과 한 곳에 묻어달라고 별도의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신군부는 시신에 동정복도 못 입히게 하고, 부하들과 함께 묻히는 것도 막았다. 김재규 장군은 당일 경기도 광주군 보포면 능곡리의 삼성공원 묘지에 제한된 유족과 많은 기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매장되었다.

14. 10·26 재평가와 명예회복

김재규가 처형당하고 9년의 세월이 지난 1989년 2월 24일, '5월의 아픔'을 겪었던 전남·광주의 민주인사들이 모인 '송죽회'(松竹會) 회원들이 김재규를 추모하여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라는 묘비를 세우고, 해마다 기일이면 김재규의 묘를 참배했다. '김재규 장군'은 고인이 생전에 듣고 싶었던 호칭이었다.

2000년 5월24일, 경기도 광주시 오도면 삼성개발공원묘역에서 김재규 장군 20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이어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상임대표 함세웅 신부)가 꾸려졌다.

15. 참고인들의 증언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초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를 국무총리 소속으로 구성했다. 2002년 김재규 장군 추모모임은 유족과 협의로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 고인의 '명예회복' 신청서를 냈다. 수사권이 없던 위원회는 연말에 "10·26 사건은 더 많은 자료와 역사적 평가를 요구하므로 심의를 보류한다"라고 결정했다.

16. 김재규의 재심과 복권

김재규 장군에 대한 재심의 요건은 충분하다. 2020년 5월 21일,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10·26 재판 당시 김재규 육성'을 공개했다. 공개된 육성 내용의 핵심은 군사재판이 재판관들의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종하는 대로 판결했다는 점이다. 1·2심의 군사재판이 신군부의 작용에 따라 유죄 판결을 하고, 대법원이 '정찰제 판결'을 한 이상, 재심은 불가피하다.

김재규 장군의 교수형 집행이 이루어진 지 40년이 지난 2020년 5월 26일, 유족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청구의 가장 큰 이유는 공판조서가 허위로 작성됐다는 것이다. JTBC가 입수한 김재규의 육성 녹음테이프만 살펴도 공판조서의 허위는 그대로 드러난다.

김재규 장군의 인격을 평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례를 들어봐야 한다.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을 2년 10개월 동안이나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일반 시민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던 점, 중요 기관의 기관장이면서도 자기 기관의 업무를 축소하려고 노력했다는 점 등에서 김재규 장군의 인격과 그의 민주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또 10·26 거사 후에 공모자로서 재판을 받아온 부하들이 한결같이 김재규 장군을 존경했고, 그처럼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관의 책임자로 있었는데도 권력남용이나 치부한 증거가 전혀 없으며, 그리고 과거에 그의 측근으로 일을 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칭송했다는 등의 사례는 인간 김재규가 덕망이 높은 인격의 소유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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