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나운규·조일동 '나운규의 말'
[장서 산책] 나운규·조일동 '나운규의 말'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1.01.25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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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한국 영화의 혼불
다시 태어나도 영화를 하련다

지은이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두만강 강변의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그는 독립군 비밀 단체에 가담해 2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춘사라는 호는 감옥에서 얻었다.

1923년 신극단 예림회에 가입했으며, 23세 때인 1924년 조선키네마 프로덕션 연구생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1925년 <운영전>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해, 이후 이경손 감독의 <심청전>에서 심봉사 역을 맡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농중조(새장 속의 새)>로 연기력을 갖춘 배우로 뛰어올랐다.

1926년 <아리랑>의 원작, 각색, 감독, 주연을 맡았다. 신파물이나 외국작품의 번안물이 넘쳐나던 당시 <아리랑>은 핍박받던 조선의 현실과 민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영상화함으로써 한국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으로 그는 한국 영화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그 후 10년간 무성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아리랑>의 큰 성공을 기반으로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특히 1929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을 내놓았다. 1936년 <아리랑 3편>을 당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유성영화로 제작했으며, 1937년 병든 몸을 이끌고 만든 <오몽녀>는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1937년 8월 9일,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과로 등으로 폐결핵이 심해져, <오몽녀>를 유작으로 남긴 채 사망했다. 당시 36세로, 죽기 전까지 그는 <황무지>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엮은이 조일동은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여러 출판사에 몸담았고, 현재 이다북스에서 출판 기획을 맡고 있다.

이 책은 나운규가 신문과 잡지에 쓴 글과 대담을 묶었으며, 배열 순서는 신문과 잡지에 실린 연월일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들어가는 말'과 '1장/ 내게는 조선 영화가 전부다, 2장/ 이 땅에서 내가 할 일은 영화 뿐이다, 3장/ 다시 태어나 영화를 하련다'로 구성되어 있고, 부록으로 '소설로 보는 <아리랑>'이 실려 있다.

1. 내게는 조선 영화가 전부다

'나의 러시아 방랑기' 등 5편의 글이 실려 있다. '신변산화(身邊散話)'를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배우를 어떻게 대했는지 알 수 있다.

연극을 잘하면 "그놈 잘한다", 못하면 "이놈 집어치워라"한다. 50전이나 70전이나 더 싸게는 10전, 20전을 내고 입장했으니, '너는 내가 돈 주고 산 놈이니 놈이 마땅하다'는 것인지, '예전부터 광대는 천하게 쳐왔으니 너희들도 신광대이니 놈이 마땅하다'는 것인지, 어쨌던 배우로 극장에서 놈 소리 듣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작품을 발표할 때면 객석에서 어느 틈에나 끼어 관중의 평을 듣노라고 애를 쓰는데, 어쨌든 '놈'이다. 장사하는 사람에게도 사람, 농사하는 사람에게도 사람인데 왜 배우들에게만 놈인지 원인을 알 수 없다.(62~63쪽)

2. 이 땅에서 내가 할 일은 영화 뿐이다

'개화당의 영화화' 등 6편의 글이 실려 있다. '<개화당>의 제작자로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극인 <개화당이문(開化黨異聞)>이란 작품의 제작 당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만 1년 만에 <개화당이문(開化黨異聞)>이라는 작품이 완성되었다. 어느 작품에서나 느끼는 바지만, 착수할 때에 가졌던 희망은 제작 중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 작품도 처음 준비할 때는 완전한 사극을 만들어 이름을 '개화당'이라고만 붙이려던 것이, 여러 가지 형편으로 완전한 사극으로는 될 수 없었고, 그렇다고 꾸며낸 이야기도 아니므로 '개화당' 밑에 괴이하게 글자들을 부쳐 <개화당이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78쪽)

더군다나 금번 촬영 중에 머리를 제일 아프게 한 것은 검법이다. 그때 유학생들이라고 이름만 일본 유학생이지 사관학교 몇 달 동안에 무슨 검법이라도 배웠을 리가 없고, 배웠다 하더라도 사진(영화)에 일본 검법 그대로 하는 것이 보이면 일본 구극 흉내를 낸다고 관객이 그대로 보아줄리가 없다.(81쪽) (...)시일이 급하고 그것 때문에 4, 5일을 허비할 수 없어서 할 수없이 우리끼리 모여 하자니, 칼은 조선 칼을 한 손에 쥐고 일본 무사식으로 덤비는 사람, 서양식으로 휘두르는 사람, 별별 우스운 일이 다 많았다. 그러노라니 작품은 우스운 물건이 되는 수밖에 없다. 이 검법에 대한 것은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83쪽)

3. 다시 태어나도 영화를 하련다

'당대 인기 스타, 나운규 씨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등 3편의 대담과 2편의 글이 실려 있다. '조선 영화감독 고심담: <아리랑>을 만들 때'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800명이라는 많은 사람(엑스트라)을 출연시켜 영화를 촬영할 때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있다.

(...) 이렇게 해가지고 일을 시작했으나, 원체 수가 많고 훈련이 없는 사람들이라 뜻대로 될 리가 없다. 춤을 춰달라고 먹인 술이 너무 지나치게 취해 코를 골고 자는 사람, 평생 먹었던 불평이 한잔 먹은 김에 폭발해 저희끼리 여기저기에서 싸움이 시작되고, 그것을 말리던 각 대장들의 옷이 찢긴다. 매를 맞는 사람, 끓여 놓은 술국으로 배를 불리느라고 국솥 옆에 붙어 서서 떨어지지 않는 사람, 화가 난 이명우 군이 국솥에다 모래를 퍼 넣고 말았다. 노대 위에서 목이 터지게 소리를 지르나 취중에 영화감독쯤의 존재는 문제도 아니다. 해는 벌써 기울어졌고, 일은 절반도 진행되지 못하고, 목은 쉬어 소리도 지르지 못할 지경이고, 자동차로 돈 1천원(엑스트라 출연료)을 1원 지폐로 바꾸어 들고나온 전주는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화가 나서 몇 사람 때려도 보고 하는 중에 극장에서 나간 몇 사람이 중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니, 제 흥에 겨워 춤추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 점점 장면이 어우러져 들어간다.(135~136쪽)

나는 이 책을 통해 춘사 나운규와 그가 제작한 영화들, 초창기 영화 제작의 실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명배우 명감독이 모여 '조선 영화'를 말함"이라는 대담(119~130쪽)에서는 나운규 외의 모든 참석자들이 <아리랑>을 조선 영화 최고작으로 꼽았다. '명배우 나운규 씨, <아리랑> 등 자작 전부를 말함'(138~154쪽)이라는 대담에서는 '아리랑' 주제가를 나운규가 지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배우 캐스팅, 당시의 영화 제작 비용, 서로 병든 몸으로 작가 이태준을 만나 <오몽녀>에 대해 이야기한 것 등이 기억난다.

오늘날 한국 영화가 세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제작 초창기에 나운규와 같은 영화 배우, 감독이 밑거름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움한 우리나라 영화를 자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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