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장서 산책]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1.05.10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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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진영도 '미래'를 말하는 능력이 없다"
철학자가 낱낱이 짚어낸 대한민국의 문제

지은이 최진석은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베이징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며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이다. 건명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1. 국가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문제는 국가를 국가의 높이에서 경영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대통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59쪽)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다. 언어나 문화나 풍습을 공유한다는 믿음으로 구성되는 정서적 공동체다. 법률로 관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민족에 빠지면 감정과 정서에 치우치게 된다. 국가는 감성과 정서를 배제한 법률과 이성으로 관리된다. 민족은 따뜻하지만, 국가는 차가울 수도 있다. 민족은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기대가 허용될 수도 있지만, 국가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사실적 효과에만 기댄다. 민족에 빠지면 호소하려 들고, 국가관이 투철하면 힘을 길러 판을 조정하려 한다.(56쪽)

분명한 것은 민족의 시각으로는 국가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시각으로는 민족의 문제를 풀 수 있다. 국가가 민족을 살리지, 민족이 국가를 살리는 일은 없다. 게다가 우리는 민족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다. 국가들과는 다 등을 돌리고, 민족이라고 상상하는 북한에만 목을 매고, 그 북한과 가까운 중국에만 굽실거리는 것으로는 국가의 높이에 있는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아큐(阿Q)가 되어 풀리지 않는 현실을 풀린 것으로 '정신 승리' 하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심지어 북한과 중국도 민족적 처신을 하고 있지 않다. 철저히 국가적 처신을 하고 있다. 우리만 그것을 애써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만 환상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크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제부터라도 다시 공부해야 한다.(59쪽)

2. 위험한 정치

1) 자기 확신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지만, 지금은 주도권을 가진 통치 세력의 그것이 더 큰 문제다. 통치 주도 세력의 주요 인물인 문정인은 한국이 처한 상황을 "북한의 '민족 이익'과 미국의 '동맹 이익' 요구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평하면서, 우리의 '국가 이익'을 위해 양쪽 모두에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시사IN, 612호).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여기는 것이 통치 주도 세력의 공통된 인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핵무기도 민족 이익 수호 차원의 것이고, 미사일 발사 협박이나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악담이나 조롱도 모두 민족 이익을 수호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 된다. 그래서 아무 반응도 못 하는지 모르겠다.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본다는 것은 민족적 정통성을 북한에 두고 있다는 것으로 읽힌다. 북한 추종의 근거다.

사실, 여기서부터 모든 몽환적인 통치 행위가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보는 인식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형성한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종북굴중혐미반일(從北屈中嫌美反日)'이다.

북한을 추종하여 무조건 이해하고 편을 들며, 중국에 굽실거리고, 미국을 미워하며, 일본을 반대한다. 문제는 추종하여 이해하고 편을 들어주지만, 북한은 계속 위협하고 조롱하며 업신여긴다는 점이다. 뒷골목도 아니고 국가 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어떤 위협과 조롱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오히려 선의로 해석하려고 몸이 달았다.

세계 외교사 어디를 봐도 국가 사이에 이런 관계를 형성해서 자존을 지키거나 생존을 담보하거나 실익을 얻었던 예는 없을 것이다. 자존과 생존과 국가적 실익을 포기하더라고 얻을 수 있는 더 중요한 몽환적 주제가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태도가 정권에는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인 나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는다.(113~114쪽)

2)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기적적인 발전을 이룬 나라다. 해방 이후 건국과 정부 수립, 산업화, 민주화를 차례로 완수했다. 그 후로 우리는 민주화에 멈춰 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혼란과 답답함은 민주화라는 현재에 계속 멈춰 있으면서 그 다음의 새 시대를 맞이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민주화는 이미 과거다. 발전하는 나라에서는 과거가 순조롭게 도태되는데,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를 주도했던 세력 가운데 일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그 세계관에 여전히 갇혀 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고, 1980년대 초반 논리에서 진화하지 않았다. 이념에 갇히면 사고력이 현저히 떨어지는데, 사고력 저하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권력층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갤럭시 S10을 들고 1980년대 초반을 산다. 통탄할 일이다.

민주화 다음은 선진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선진화는 창의적 활동이 이끄는 단계다. 창의적 활동은 독립적 주체만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인격의 한 형상이다. 대답하는 실력으로 민주화 단계까지는 가능하지만, 민주화 다음 단계는 질문하는 능력이 필수다. 이제 정말 우리의 실력을 발휘하고, 또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 때가 왔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민주화를 이룬 경험으로만 살려고 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고 있다.(141~143쪽)

3. 민주화 다음, 새 말 새 몸짓으로

1) 현대의 국가들은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공화(共和)한다. 여기서 어느 한쪽을 위하거나 한쪽만 의존하는 통치는 국가 레벨의 통치를 완수하기 어렵다. 김대중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통치는 다 국가 레벨의 통치라기보다는 진영 레벨의 통치였다. 그 흐름이 이번 문재인 정부에서 가장 심해진 것일 뿐이다.

가진 자들을 악으로 치부하거나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을 처단해야 할 기득권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기류는 이미 극단까지 갔다. 명목상으로만 하나의 나라일 뿐 내용적으로 국민은 둘로 쪼개진 지 오래며, 여기에는 통치 권력이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측면도 있다. 심지어는 이제 국민을 둘로 쪼개 다루는 것을 통치 기술로 삼기까지 하는 실정이다.

적폐 청산은 국가 전략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특정 진영의 전투력으로만 행사됨으로써 이미 나라를 둘로 쪼개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한 꼴이 되었다.(233쪽)

2) 우리는 본질보다 기능, 실제보다 도덕, 이익보다 명분, 질문보다 대답에 더 비중을 두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시선이 항상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먼저 과거를 한 점 오차 없이 헤집는 일을 해야 더 진실하게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었다.

따라 하기에 익숙해지면 결국 미래보다 과거를 더 중시하는 심리를 갖게 된다. 입으로는 미래를 말하지만 사실은 과거를 산다. 그래서 과거의 규정으로 미래의 전개를 제어한다. 과거에 정해놓은 규제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변화를 제어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모르는 것이다. 빅 데이터의 시대에 데이터를 모으지 못한다. 초융합 연결의 시대에 원격의료를 막는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공유 경제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것은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우리가 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어나는 문명적인 혁신의 시기에도 과거로만 계속 회귀하려 한다.

이 절박한 시점에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각성을 통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각성이 없으면 여기까지만 살다 가지 그 이상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후손들에게 영광이 아니라 치욕을 물려줄 수도 있다. 진영 지키기에 빠진 우물 안 개구리들은 역사의 열차에서 내려야 한다. 낡은 문법을 지키는 투사들은 이제 필요 없다. 차라리 경쾌한 도전에 나서는 젊은 무모함이 더 의미있다. 낡은 문법과 결별하여 새로운 문법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245~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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