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6)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6)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7.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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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숙부가 상종 못 할 인간이라 돌아서자 단칼에 죽여서는 후원 뜰에 암매장해 버린다
관세음보살님이 죽어가는 너에게 이렇듯 새로운 생명을 준 것도 다 그 때문이 아닌가 싶구나!
고모부가 은근슬쩍 상 밑으로 손을 뻗쳐 손을 잡을 적에 얼굴만 붉힐 뿐 뿌리치지는 않는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홍윤성은 과거에 급제, 예종 때에 이르러서는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을 지낸 문신이다. 그가 이야기의 중심에 선 것은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이나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을 떠나 표독하고 탐욕스러운 성격 때문이다. 일찍이 그의 출세를 알아본 홍계관은 향후 형부의 일을 관계할 적에 자기 자식을 만나면 꼭 한 번만 살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에 홍윤성이 별일이 아닌 듯 “나는 홍계관의 아들이요!” 소리치라 했다. 훗날 홍윤성이 형조판서로 재임 시절 어떤 죄인이 “나는 홍계관의 아들이요!” 외쳤지만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데 하여 옛 약속을 저버려 죽여버렸다. 또 훗날 그의 숙부가 찾아와 아들, 즉 사촌 동생의 벼슬자리를 부탁할 적에 “옛날의 전답 스무 마지기는 아직 그대로 있지요!” 묻고는 그 정도의 재물은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말에 숙부가 상종 못 할 인간이라 돌아서자 단칼에 죽여서는 후원 뜰에 암매장해 버린다. 이후 숙모가 세조의 행차를 맞아 가슴에 도끼를 품어 자초지종을 아뢴 뒤 죄줄 것을 청하였지만 재물을 내려 위로할 뿐 눈감아 추궁하지 않는다. 유교, 충과 효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조선에서 삼촌 살해라는 패륜을 저질렀건만 쉽게 용서가 된다. 이는 세조가 처음 홍윤성을 만날 당시 어떠한 경우에라도 목숨만은 보전해주겠다 약조한 때문이다.

세조가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 한강서 뱃놀이할 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십여 명의 창두(蒼頭)가 몰려들어 칼과 몽둥이를 휘둘러 닥치는 대로 사람을 해한다. 그때 자리를 함께한 권람과 한명회가 목숨을 부지하고자 한강으로 뛰어들 즈음 창두가 휘두르는 철퇴가 막 수양대군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찰나다. 멀찍이서 구경만 하던 홍윤성이 바람처럼 뛰어들어 단숨에 철퇴를 든 창두를 제압, 수양대군을 죽음으로부터 구한다. 어릴 적 맨손으로 멧돼지를 때려잡은 홍윤성의 괴력 앞에 나머지 창두는 하찮은 무부(武夫)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추풍낙엽이다. 그런 까닭에 세조는 약속을 지켜 홍윤성을 살려주었던 것이었다. 후일 정란공신, 인산 부원군, 우의정 공평의 자리까지 올랐건만 가문은 그가 지은 죄업으로 인해 폐문을 맞는다.

일찍이 시골에서 올라와 거지소굴에 들어 깍정이(포도청에서 포교의 심부름을 하며 도둑을 잡는 일을 거들던 나이 어린사람) 생활로 근근이 입에다 풀칠이나 하던 홍윤성이다. 홍계관은 홍윤성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향후 권력과 재물이 몸에 이르면 복과 덕을 쌓으라고 당부했다. 높은 자리에 있을 적에 악업을 쌓는다면 결단코 대가 끊어질 것이라 예언했다. 하지만 권력의 달콤함에 취한 그는 재물에 눈이 멀었다. 매관매직은 물론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겨 죽이기를 밥 먹듯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처녀와 유부녀의 겁탈은 신분의 고하를 떠나 다반사였다. 그로 인한 업 때문인지 아들을 보지 못했다. 조선조에 있어서 유일하게 정실부인이 둘이며 첩이 수십 명에 이르렀으나 첩으로부터 오직 딸만 하나 얻었을 뿐이다. 재물 역시 생시 때 결정을 짓지 못한 까닭에 두 부인 나날이 다투다가 조정의 중재로 겨우 해결되었다고 하니 그의 사후가 참으로 안타깝다며 말을 마친 할머니는

“이것아 점바치 홍계관의 말에 따르면 분명 덕을 쌓고 복을 지으면 후손을 본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너도 온전치 못한 몸에 가문의 대를 이으려면 악업은 불을 본 듯 피하고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내 몸 아픈 듯 돌보야 하느니라! 은혜는 뼈에 새겨 기억하고 적선은 모래사장에 새긴 듯해야 한다. 아마도 관세음보살님이 죽어가는 너에게 이렇듯 새 생명을 준 것도 다 그 때문이 아닌가 싶구나! 지금 당장은 귀에 따갑고 듣기 싫어도 마음에 새겼다가 후일 꿈에서 깬 듯 생각이 나거든 꼭 그리해다오! 이 어미의 말을 명심 또 명심하여 잊지 말아다오!” 당부다.

하지만 혼례를 코앞으로 맞는 어지러운 지경서 할머니의 당부가 고모의 귀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한쪽 귀로 듣고는 한쪽 귀로 흘러버린 고모다. 할머니의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고모에게 있어서는 상투적인 잔소리에 불과했다.

다음날로 혼례식을 맞아 신랑이 구름 같이 덩그렇게 높은 말을 타고 왔다. 전안례(奠雁禮)라, 기럭아범이 전해주는 목기러기를 아버지가 전해 받았다. 기러기는 일부일처제로 평생을 들어 배우자를 배신하지 않는 새로 정평이 나 있다. 만약 한쪽이 죽으면 평생을 혼자 사는 새로 유명하다. 그런 까닭에 혼례를 치르는 신혼부부에게 있어서 기러기의 부부애는 로망이자 꿈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기러기를 받은 직후 신랑 신부가 초례청에 마주하고 섰다. 신랑 출(出)에 푸른 천의 앞 가리개로 얼굴을 가린 고모부가 사관 대모에 조복 차림으로 동쪽으로 섰다. 곧장 신부 ‘출’에 따라 가마를 타고 온 고모가 서편으로 섰다. 머리에는 족두리, 이마엔 연지를, 양 볼로는 곤지를 찍고는 대례복 차림으로 화동의 안내를 받았다. 내가 청매 꽃잎을 뿌렸다면 감골댁의 어린 손주가 고사리손으로 홍매의 꽃잎을 길 위로 흩었다. 아장아장 걷는 모양새가 보기에도 앙증맞다. 가마 뒤편으로는 영천댁과 성주댁이 시자(侍者)로 뒤를 따랐다. 초례청 주위로는 목단이 흐드러지게 핀 8폭 병풍이 둘러쳐졌다. 주위가 화려한데 대례(大禮) 상 위라고 다를까? 대추와 밤, 백미, 배, 사과 등이 가지런하게 올랐고, 무명 실타래를 감은 튼실한 명태와 늘씬하게 깎은 목기러기 한 쌍도 홍, 청의 보자기에 싸여 올랐다. 또 주둥이가 긴 백자 항아리 두 개가 놓였는데 한쪽은 대나무가 다른 한쪽은 청솔가지가 꽂혔다. 대나무와 청솔가지 사이를 청홍의 색실을 꼬아 걸쳤다. 촛대에는 청홍의 초가 쌍을 이뤄 불을 밝혔다. 붉은색은 벽사의 의미가 있다. 동짓날을 맞아 붉은 팥죽을 쑤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다. 그 옆으로 붉은 보자기에는 암탉을 푸른 보자기에는 수탉을 싸서 놓았다.

“천생배필이네! 어쩌면 저리도 좋을꼬? 신랑 입이 함지박만 해서 꼬리가 귀에 걸렸네! 금방이라도 찢어질까? 무섭네! 신부는 또 어떻고! 웃음이 저리 헤픈 걸 보니 첫째는 볼 것도 없이 딸인 기라!” 주위를 둘러선 하객들이 두서없이 거들어서 한마디씩이다. 추임새가 되어 온통 흥겹다. 꼬꼬 재배라고 해야 하나!, 먼저 신부의 재배에 이어 신랑 일 배의 교배례(交拜禮)를 시작으로 순서에 따라 진행이다. 시종일관 화기애애, 별다른 사고 없이 차례차례 순조롭다.

마침내 해가 기울고 상현달로 초승달이 동산 위로 솟을 즈음 안방으로는 주안상이 질펀하게 차려지고 있었다. 비좁은 안방으로 동네 아낙네들이 옴나위 자리를 양보하여 들어앉은 맞은편으로 고모부와 고모가 나란히 앉았다. 고모부가 연신 싱글벙글거리는 한편으로 고모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인양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할머니가 건너다보는데 절로 안달이 난다. 신랑, 김 서방의 얼굴을 쳐다보며 안 나오는 웃음일망정 간질간질하게 웃었으면 좋으련만 싶었다. 하는 행실머리가 여자라고 하기에는 무색하기로 함이 오던 날과 달라진 점이 없어 그대로다. 야들야들하고 보드라운 점이라곤 없어 보인다. 그래도 영 싫지가 않은지 줄기차게 자리를 잡고서 앉았다. 서방으로 고모부를 인정했는지 고모부가 은근슬쩍 상 밑으로 손을 뻗쳐 손을 잡을 적에 얼굴만 붉힐 뿐 뿌리치지는 않는다. 할머니가 진즉에 눈치를 채고는 속으로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는 중에도 밤은 점점 깊어만 갔고, 어느 때를 기해 동네 장정들이 창두모양, 불한당으로 들이닥쳤다. 모양새가 단단히 일을 치를 작정인지 우락부락하여 찡그린 인상이 험악하다. 방으로 들기가 무섭게 자리에 앉은 것도 잠시 순식간에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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