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1)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1)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6.1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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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편에 얼마간의 재물을 딸려 보내서는 짐을 덜어줄까 싶습니다
가을철을 맞아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용소의 새벽 물은 생각보다 차가웠을 것이다
저녁밥 지을 생각은 않고는 동냥질을 나온 듯 다들 여기서 왜 이러고들 있나?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예~ 무당이 이르길 음력으로 내년 삼월 초아흐렛날이 길 일 중에 길 일이라며 징표로 삼아서 이렇게 적어주었네요!” 하는 마님은 지금껏 무당을 만난 일에 대해서 영감에게 소상하게 이야기를 했다. 마님의 이야기를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을 마친 영감이

“임자 고생했네! 인자는 두 집안이 큰일 치를 일만 남았네! 한데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 집 사정에 예단을 비롯하여 우리가 원하는 혼수에 감당이나 될까 모르겠네! 그렇다고 세간의 이목이 온통 쏠린 마당에 작수성례로 치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려면 내 욕심에 사돈댁을 알거지로 거리에 나 앉게 할까 봐서 그러세요! 남들은 재물이라면 있으면 있는 데로 한정 없이 좋다지만 난 거추장스럽고 지겹기만 하네요! 영감만 허락한다면 일찌감치 함을 보내고, 사주단자야 미리 갔다지만 명분상 함이라고, 그 인편에 얼마간의 재물을 딸려 보내서는 짐을 덜어줄까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나중에는 다 우리 집으로 돌아올 우리 재산이잖아요! 따라서 내 재물로 생색만 한껏 내고는 손해 볼 것도 없고요!”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만 혹 사돈댁에서 못사는 집이라 그조차 손을 타서는 업신여긴다고 기분 상해하지나 않으시려나!”

“일찍이 그 점도 아니 생각한 건 아니지만! 생각 이상으로 물목을 과하게 적고 또 잘 설명하고 다독이면 뭐 별일이야 있을까요?”

“하긴 그렇기도 하네만 후일 임자가 그 일을 꼬투리로 며느리를 들볶을까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기도 하는데!”

“원 별걱정은, 그 아이만 내 며느리로 들일 수 있다면 향후 온갖 복록이 집안으로 가득하다는데 그 깐 하찮은 재물 따위가 아까워서 그럴까 봐요! 그런 실없는 소리는 그만큼만 하시고 궁합이나 새로이 살펴보고 날짜나 진중하게 뽑아 보이소!”

“알았네! 오늘은 내가 거친 발걸음 끝에 피곤해서 힘들겠고 낼 새벽에 저 위 용소(龍沼)에서 몸을 깨끗이 하고는 정신일도, 정갈한 마음으로 찬찬하게 살펴보리다. 아무려면 향후 우리 집을 좌지우지할 대들보와 같은 맏며느리, 새사람을 들이고! 그로 인해 문중의 흥망성쇠와 집안의 길흉화복이 걸린 문젠데 어디 함부로 할 수야 없지!” 하며 문갑을 열어 갈무리다.

마님이 영감을 찾아 아들의 궁합과 혼례 날짜를 거론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당신의 아들 일이기도 하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어 주역(周易)을 풀어내고 당사주(唐四柱:사람의 생년·생월·생일·생시와 천상에 있다고 하는 12성의 운행에 따라 인생의 길흉을 점치는 민간의식. 점법.)를 익혀 온 영감은 동네 사람들이 자손을 보았다 하면 작명을 하거나 혼담이 오가는 중에 궁합을 보아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껏 대접을 받는 사람은 마님이었다. 동네 아낙네들, 특히 소작인들의 작명이나 궁합은 행랑어멈을 다리 삼아서 마님을 통해 얻어내고, 풀어낸 집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마님은 무당의 신기에 탄복하면서도 반신반의, 큰일에는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건너라는 격언에 따라 확인하는 차원에서 영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영감마저 무당이 풀어낸 사주와 궁합이 일맥상통하여 비슷하다면 이는 번복할 수 없다고 여겼다. 두 번 다시 언급해서는 안 된다 생각하는 마님이었다.

이는 설화나 전설 등을 통해서 가문이나, 재물, 신분의 고하 등을 따져 생으로 갈라놓아 낭패를 당한 경우가 더러 보인 때문이다. 반면 춘향과 이 도령, 왕비가 된 효녀 심청, 조금 다른 사연이지만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와 같이 국경을 뛰어넘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도 심심찮은 까닭이다. 게다가 성급한 듯 혼례 날짜까지 잡았다. 옛 법에 따르면 둘은 이미 부부지간이나 진배없다. 그런 한편으로 잘한 결정인가? 하는 걱정은 어미로서 아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마지막 정점을 찍을 사람은 장차 시아버지 자리로, 영감이라 생각한 마님은 초조함 때문인지 선잠으로 전전반측, 밤을 꼴딱 세다시피 보냈다. 이윽고 동이 트고 사시(巳時)를 막 지나갈 즈음에 이르러 영감으로부터 보잔 다는 기별을 받고는 한달음에 사랑방으로 나갔다. 사랑방에 이르러보니 어제와는 딴판으로 영감은 정갈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는 가부좌를 틀어 앉았다. 굳이 말은 안 해도 이른 새벽에 용소를 다녀왔다는 것을 몸이 말하고 있었다. 단정한 몸매에 머리까지 세세하게 손을 보았는지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지 않는다.

영감의 꼿꼿한 자세에서 마님은 용소에 이르러 그 나이에도 춥다 않고서는 옷을 ‘활활’ 벗어 물로 뛰어드는 영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는 늦가을 용소의 새벽 물은 생각보다 차가웠을 것이다. 그 차가운 물에 서슴없이 뛰어들다니! 이는 내 자식의 일이라 가능하다 여겼다. 여태까지 한기가 덜 가시었는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는데 행여 고뿔이라도 들었을까 싶어 속으로는 내심 염려스럽다. 행랑어멈에 따르면 조반상마저 들이지 말라는 것으로 보아 정성으로 기울인 공이 대단해 보였다. 마님이 절을 하듯 곱게 자리를 하자

“임자! 우리 집에도 이제 꽃이 피려나 보오! 늘 하는 짓마다 못마땅했는데 제 놈의 각시 하나는 알아서 맞는 것 같소! 옷깃 스친 인연이라기에는 너무 공교롭구려! 광해군 때 집안의 종이었던 기축을 낭군으로 맞은 우씨 낭자처럼 혜안으로 찾은 듯하오! 그 일로 기축은 반정공신에, 우씨 낭자는 정경부인이 되었다고 하질 않소! 하여간 우연의 일치인지 궁합은 더없이 좋소! 둘의 사주를 들어 뭉근하게 삼합(三合:세 가지를 합함. 또는 세 가지가 잘 어울려 딱 들어맞음을 이르는 말이다.)이 들었소! 하나 임자가 마음을 어지간하게 곱게 써야 할 것 같소! 신혼 초의 어려운 한고비만 무사하게 잘 넘기면! 하여간 무당이 말한 그대로요!”

“참말 신통방통하네요!”

“그야 이를 말인가? 그래서 학문이지! 이 사람은 이런 답을! 저 사람은 저런 답이라면 그건 전통으로 배운 학문이 아니지! 같은 조건에서 사람마다 틀린다면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허투루 배운 거겠지! 사이비가 아니면 돌팔이겠지!” 하는데 안도감에 젖은 마님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으로 더는 이설을 달 수가 없다 여겼다. 방을 나오기 전에 함을 언제쯤 보내면 좋을지를 상의하고는 곧장 준비절차에 들어갔다.

그즈음 축대에 올라앉아 먹이를 보채는 듯 빤히 쳐다보는 동네 아낙네들의 눈길을 외면하고 방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머릿속으로 마님의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 할머니가 느꼈던 마님의 눈매는 후덕하고 온후한 중에 은근한 매서움이 서려 보였다. 지지리 궁상에 꼴 같지 않은 딸내미도 딸내미라고 어딜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귀한 아들을 욕심내요! 하는 표정에 홉뜬 눈으로 매섭게 노려볼 때는 전신으로 싸하게 소름이 돋았다는 느낌이다.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는 할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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