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고갯마루에 올라선 할머니는 온 세상을 치마폭 아래로 품은 기분이다
바람구멍 같은 틈새만 보이면 돈 몇 푼을 동냥하듯 던져주고는 없었던 일로 물리라 생각했지요!
술꾼도 아니건만 아리랑치기에 뒷통수를 맞은 듯 영문도 모르게 쫓겨난 아이가 땅거미를 등에 걸머지고는 돌아와 내일 떠나겠다는 데는 대감도 인정상 어쩔 수가 없다 여겼다. 한데 바둑을 두던 손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다보던 친구가 다시 들이란다. 그러면서 아이를 보고 집을 나간 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아이가 생각하는데 뚜렷하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무언가가 없어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 말에 대감의 친구는 분명 무슨 일을 겪었을 거라며 다시 조용히 생각해 보란다. 그 말을 쫓은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 한참을 골똘히 생각한 끝에 물에 떠내려갈 뻔한 개미 떼를 구해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던 친구는 그제야 아이의 얼굴에 서린 살기는 사라지고 복이 깃들여 보이더란다. 평소 친구의 관상학을 신봉하던 대감은 친구의 청에 따라 다시 들이는 것은 물론 아이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고 그 덕택으로 아이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결말로 이야기를 마친 무당은 물을 찾는 대신으로 손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슬며시 닦으며
“우리네가 어떻게 사람의 장래를 시시콜콜, 족집게처럼 집어서 알겠습니까? 단지 지나온 과거와 현재 그리고 관상과 사주를 꼽아 어슴푸레하나마 예측하는 것이지요! 그런 중에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앞날에 마님의 집이 이와 같은 형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더니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내 마님에게 전해주며
“내~ 두 분께서 오늘에 들어 나란히 오실 줄 알고 이틀 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여 하나하나 날짜를 집어 보니 음력으로 명년 삼월 초아흐레가 길일 중에 길로 여겨집니다” 하고는 쓸쓸하게 웃음 짓더니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양기가 입으로 올랐나 봅니다. 쓸데없는 잡담을 너무 많이 늘여놓았지요! 미안합니다.” 하더니
“아~참 복채는 온양댁이 오늘 같은 날 있을 줄 어떻게 알았을까요? 나보다는 고단수로 지난날 누옥의 누추한 이년의 집구석을 보살펴서 돌보는 것으로 진즉에 계산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그냥 맘 편하게 돌아가시면 됩니다. 아무쪼록 앞날에 있어서 화는 사그라져 재로 화하고 복은 봄볕 아래의 새싹처럼 쑥쑥 자라나길 기원하여 드립니다. 그리고 온양댁요? 내 전날에도 말했다시피 뒷날의 이야기는 저승에서 만나 자세하게 들려주겠네! 나 말고 다른 여인네도 있겠지만!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질 않습니까? 내 평소 말주변이 좀 투박스럽기는 하지만 그때는 피차간에 동급, 나름대로 재미있게 엮어서 들려드립세! 그럼 이승에서 인연은 여기까지로 합시다. 달리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살펴서 편히 돌아가십시오!” 하는 축객령으로 방문이 닫히기도 전에 이부자리를 펴는 무당이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린 마님의 집에서 할머니는 빈 상자와 함께 어렵게 가지고 갔던 사주단지를 고이 받아들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쩌면 이승에서의 사돈지간으로 만남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듯 할머니는 마님의 두 손을 맞잡아 애절하게 쓰다듬는다. 석별의 정을 나눠 뒤돌아, 뒤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어렵게 떼어 놓는다.
재를 오르는 할머니의 발걸음이 흡사 손오공이 근두운을 탄 듯 구름 위를 건너뛰는 기분이다. 수호지의 신행태보 대종이 양쪽 다리에 갑마(甲馬)를 붙인 듯 땅을 주름잡아 넘는 듯 가볍다. 일엽편주가 순풍에 돛을 단 듯 호수 위를 미끄러져 가는 모양새다. 순둥이 소가 풀밭에 앉은 등을 타고 넘어가듯 미끄러져 오른다.
단숨에 고갯마루에 올라선 할머니는 온 세상을 치마폭 아래로 품은 기분이다. 김유신의 누이동생으로 언니인 보희의 꿈을 비단 치마를 주고 산 문희의 기분이 이랬을까 싶었다. 내 딸이 사방 십 리 내에서 제일 부자로 소문난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가 고대광실을 치마폭 아래로 담뿍 품는다고 생각하니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고모가 시집으로 들어가는 즉시 아기를 가졌으면 했다. 마님과 사위 될 김 서방의 눈에 쓰인 콩깍지가 벗어지기 전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았으면 싶었다.
땅거미를 품에 안고 도착한 집에는 축대를 의자 삼아 낯익은 얼굴들이 옹기종기 많이도 모여 앉았다. 할머니가 삽짝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께로 향하지만 서로 눈치만 슬금슬금 살필 뿐 말이 없다. 방으로 드는 할머니를 보고는 먹이를 보채는 제비 새끼들처럼 꽁무니만 쳐다보며 조심스럽다. 그때 부엌문 깨로 어정쩡하게 섰던 어머니가 할머니의 눈치를 가만가만 살펴
“어머님 가셨던 볼일은 어떻게 잘 보셨어요?” 하며 할머니로부터 보따리를 건네받는데
“오나 빈 상자는 씻어 말리고 우(위)에 껄 랑 날 다오! 네 시누이가 혼약했다는 징표 인대 부정 안타고 손 안 타는데 잘 보관해야 않겠나!” 하며 받아 들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할머니의 무언과 함께 세세한 사연들이 방안으로 사라지자 먼저 감골댁이 볼멘소리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하는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보얀 입에 서로의 얼굴만 멍청하게 쳐다보며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서성거린다.
그즈음 마님은 터를 보고 온 영감과 사랑방에서 마주하고 앉았다. 그때 영감은 어디를 어떻게 헤매어 다녀왔는지 바짓가랑이는 온통 헤져서 흙먼지가 가득하고 얼굴은 피곤으로 한껏 절어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른 영감이
“임자~ 그래 손님은 잘 대접하여 배웅해드리고?”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안사돈이 될 분인데 어련하게 대접했을라구요! 그보다도 이것이나 한번 보아 주시구려!” 하는 마님은 아들의 사주와 고모의 사주가 적힌 종이를 방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전에 없이 조신해 보이는 마님의 행동을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영감이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 양반 상놈이 없어졌다고 해도 그 집은 상놈의 집구석이라 펄쩍 뛰더니만!”
“그러게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쌍수를 들어서 그랬지만 한데 그래서는 될 일이 아니드먼요! 지난번 아들놈이 한눈에 지 각시라 독장(獨場)을 칠 때만 해도 어림없다고, 말 같지 않은 소리라 결사반대를 했지요!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우선은 죽겠다는 아들부터 살리고 봐야지요! 조상님 전에 향화(香火)는 어떻게든 잇고 봐야지요! 나도 아들을 둔 어미로 며느리는 보고 죽어야 할 게 아니겠어요! 그래 흉내라도 내보자 싶은 마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매파를 놓고 사주단자를 보내는 한편으로 죽기 살기로 반대를 노래했지요! 이는 지난번 무당을 만났을 때만 해도 사실은 반신반의했지요! 그러다가 바람구멍 같은 틈새만 보이면 돈 몇 푼을 동냥하듯 던져주고는 없었던 일로 물리라 생각했지요! 한데 오늘 안사돈 될 분과 같이 무당을 만나보고는 확실히 천생연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하늘을 우러러 천륜이 있다는 것을 알았네요! 생전 장가가는 것을 죽는 것으로 알던 그놈이 장가를 가겠다는 것도 그렇고! 하여간 무당말로는 초년의 어려움만 잘 넘기면 손자 손녀가 대추꽃자리처럼 주렁주렁하다는데 어떡해요! 적막강산 같은 이 집안에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단 말이에요!”
“임자가 두 번씩이나 무당집을! 그런 것들은 죄다 미신이라며, 입만 살아 나불거리는 상종 못 할 위인들이라며! 은근슬쩍 어리석은 양민들의 고혈을 뽑아 제 잇속만 채우는 흡혈귀 같은 족속이라며!”
“말을 비약해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비약을!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그것도 다는 아니더이다. 영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 무시해서도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홀린 듯 날도 잡아버렸네요! 영감이 전적으로 일임한 만큼 의논 없이 멋대로 결정했다고 지난번처럼 두고두고 나무라지는 마세요!”
“그럼 그런 중차대한 일을 일임할 때는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선데 나무라기는! 나무랄 작정이면 믿고 맡기지도 않았지! 그래 어느 날이 좋다고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