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8)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8)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8.07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랑은 고사하고 평생을 원망 속에 살까 싶어 가슴 한쪽 구석이 먹먹하여 쓰렸다
그런 날이면 서슴없은 소금 사례에 밤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아가 되었다
소나기가 몰아칠 듯해도 찌든 때가 빠질까 싶은데 하는 행동이 가식으로 똘똘 뭉쳐 의심스럽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고모부는 한때 인근을 통틀어 자타가 공인하는 한량이었다. 그런 까닭에 먹고, 마시고 노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사 물정을 모르고 자란 고모는 달랐다. 고모부의 쥐어짜는 듯 애절한 목소리를 듣는데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기분이다. 한 치 건너 두 치면 벌써 남이라지만 한평생을 같이할 서방님이라는 생각이 들자 한마디, 한마디가 바로 옆에서 듣는 듯 귀를 찔러서 아프다. 애달프게 가슴을 저미어 아리다. 설령 그렇더라도 새색시 입장이라 어지간하면 참으려 애를 썼다. 어차피 장난인데! 또 그렇게 참고 있으면 누군가가 부르러 올리라 여겼다 하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이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조급증으로 몰아붙인다.

상상치도 못한 돌발 행동이 때로는 큰 웃음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뜬금없는 고모의 등장으로 놀이판은 웃음바다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모든 계획과 구상이 공수표가 되었건만 상관이 없단다. 이미 마을을 위해 상당한 금액을 내놓은 터에 흉내 치레라 더 그렇단다. 누구 없이 분위기에 취해 꼬부라질 듯 배꼽을 잡고는 포복절도다. 초가집 지붕이 들썩이는 기분이다. 기어이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친다. 바우덕이의 덩~실! 더~덩~실 돌아가는 날렵한 춤사위보다도 백설희의 간드러질 듯 아름다운 노랫가락도 이를 능가하지는 못해 보인다. 너나없이 옷고름을 꼬깃꼬깃 접고, 치맛자락을 끌어당기고, 때 묻은 손수건을 손에 들고는 눈물을 찔끔 인다. 동네 장정들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미 무대는 절정으로 치달아 클라이맥스에 올랐단다.

그중 가장 가슴 터질 듯 뿌듯한 이는 누가 뭐래도 고모부였다. 구름같이 덩그렇게 높은 말을 타고 오는 내내 고민에 빠졌다. 재를 넘는 내내 가슴에 돌덩이를 올려 압슬형을 당하는 듯 숨쉬기가 벅찼다. 진정 잘한 결정인가 싶었다. 자신에게 자문자답으로 회의가 들었다. 재력과 권력을 내세워 옥죄고 윽박지른 혼사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일방통행이라 원한을 사지나 않았을까 싶어 두려운 마음이 은근하다. 이미 마음에 둔 정인이 있어 사랑은 고사하고 평생을 원망 속에 살까 싶어 가슴 한쪽 구석이 먹먹하여 쓰렸다. 한데 두 팔을 활짝 벌려 자신을 막아선 고모의 행동이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만 같다. 그동안 가슴을 묵직하게 눌러오던 시름이 시원스레 날아가는 기분이다. 보는 사람만 없다면 진정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싶어 와락 껴안아 주고 싶다. 품 안으로 고이 품어 갈무리하고 싶었다. 웃음 한번 달콤하게 웃어 준 적 없건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가 싶어 가슴이 벅차올라 잘근잘근 깨물어 주고 싶다.

그동안 고모부는 부잣집 도련님이란 특권을 마음껏 누려 홍등가와 기방(妓房)을 수도 없이 드나들며 숱한 여자를 만났다. 그런 와중에 가식적으로 포장된 거짓의 몸짓을 헤아릴 수 없이 겪었다. 그럴 때면 스쳐 지나가는 바람인 듯, 백지장처럼 얄팍한 정만 같아 허무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헤살거려 미소짓는 헤픈 웃음에 정신이 아득하여 수월찮게 돈도 뿌렸다. 간이고 쓸개고 죄다 빼줄 듯하다 수가 틀리다 순식간에 돌변하는 통에 아연실색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날이면 서슴없은 소금 사례에 밤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아가 되었다. 한마디로 그녀들에게는 가슴 뜨거운 깊은 정이 없었다. 술자리에 빌붙어서는 연민을 통한 늘어진 생색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늘 이유 없는 갈증에 목이 말랐다.

그렇다고 모든 여자가 한결같지는 않았다 간혹 순정에 우는 각시도 더러 보았다. 예정된 이별을 목전에 두고는 누구 없이 몸부림을 치며 애달파 했다. 눈물을 줄줄 흘렸다. 가냘픈 몸매가 눈물 통인 양 오지랖이 흥건하게 울었다. 며칠을 들어 식음을 전폐다. 팔자를 저주로 세상을 원망하여 등졌다. 밝은 태양 빛을 볼 자신이 없다며, 삶이 싫다며 두문불출이다. 그러다가 산목숨은 살아야 한다며 일주일에 못 미쳐서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나서는 그녀들은 눈을 치켜뜨고는 앙칼지게 말했다.

“그놈의 썩을 잡놈! 그놈은 이 시간에도 어느 년과 더불어 희희낙락으로 멀쩡한데 죽기는 내가 왜 죽어! 새파란 청춘이 억울해서도 못 죽지!” 인생 철학 인양 한차례의 성장통을 겪은 그녀들의 행동거지가 전날과는 사뭇 다르다. 세상과 사내들을 두고 원한에 사무쳐 보였다. 한순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해 전에 없던 살기가 눈에 서린다. 새 인생을 사는 듯 얼굴을 지분으로 겹겹이 찍어 발라 변장이다. 뭇 사내만 찾아들면 전에 없이 찔끔찔끔 눈물도 흔했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점검하여 확인이다. 어떻게 보면 굶주린 승냥이만 같다. 늘 가슴이 텅 빈 듯 허허로워 보였다. 헤픈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가식으로 똘똘 뭉쳐진 살점 덩어리만 같다. 죄의식을 못 느끼는 듯 작별을 맞아서는 스스로 배비장전의 ‘애랑’이 되어 즐긴다. 금전은 필연으로 어금니를 비롯한 요구사항도 가지가지다.

고단한 삶의 현장이건만 눈앞으로 펼쳐지는 짧은 단막극이 자신을 지치게 한다. 술이 최고로 사랑은 절망이고, 여자는 환멸이다. 평생을 독수공방으로 혼자 살까? 싶어 고민도 많았다. 한데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가 않았다. 2대 독자에 대를 이어야 한다는 구실에 발맞추어 사흘이 멀다며 일등 신붓감이란 명분 아래 사주단자가 들이닥친다. 감당이 불감당이다. 일일이 이유를 달아 내치기도 벅차다. 생각 끝에 본의 아니게 현실도피를 택한다. 미련 없이 괴나리봇짐을 싸서 김삿갓의 길을 걷는다.

한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우연한 기회에 숙명처럼 빨래터를 지나는 중에 고모를 만났다. 처음 본 순간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세상이 환했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축복처럼 다가든 느낌이다. 월궁의 어느 길잃은 항아(姮娥)님이 눈앞으로 사뿐 내려앉은 듯싶었다.

처음부터 고모부의 눈에 고모는 다른 처녀들이 비에 하는 행동이 남달랐다. 외간남자가 보든 말든, 있건 말건 본체만체다. 반면 옥자를 비롯하여 빨래터의 다른 처녀들은 이미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좀 전과 달리 빨랫방망이를 든 억센 손길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진다. 소나기가 몰아칠 듯해도 찌든 때가 빠질까 싶은데 하는 행동이 가식으로 똘똘 뭉쳐 의심스럽다. 그 와중에도 고모는 여전히 천방지축이다. 아랑곳없단다. 홀로 즐거워 물장난이다. 새색시처럼 얌전을 빼고 앉은 옥자의 옆구리를 자꾸만 찌른다. 새파랗게 눈을 흘기든 말든 집적거려 놀잔다. 반응이 없자 다리를 둥둥 걷어서는 사방으로 물을 튀겨가며 즐겁단다. 의도된 웃음도 아닌 민낯이 떳떳하다며 첨벙거린다. 두 번째의 스쳐 만남도 마찬가지다. 다른 처녀들이 끝나지 않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갔다면 불만 가득한 얼굴의 고모는 발길을 돌려 젖은 빨래를 끝내고야 헤실헤실 웃으며 갔다. 이미 콩깍지가 쓰인 탓일까? 방실방실 웃는 모습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한 떨기 모란꽃이 가슴속으로 활짝 피어나는 느낌이다.

고모가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진정 행복한 죽음이란 생각이다. 우매한 남정네의 어리석은 선택이라 할지라도 달다 여겨진다. 그날의 설래임처럼 오늘의 이 시간, 이 장면을 언제까지나 기억하여 고이 간직하고 싶다. 후일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때는 가슴으로 꺼내어 말하고 싶었다. 귀밑머리를 가만가만 쓸어 가며 다정하게 속삭이고 싶었다.

“나는 당신이 있어서 생이 진정 행복했었노라고! 내 몸보다 어여삐 여겨 사랑했노라고!” 하나둘 늘어나는 새치를 자분자분 새어가며

“내 인생의 최고는 임자를 만난 것이야!”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 하얗게 웃는데 여전히 고모부를 막아선 고모다. 부끄러움을 도외시 양팔을 벌려선 모습에서 비장미마저 엿보인다. 배수진을 친 장수만 같아 위엄이 깃들었다. 그런 고모를 보고는 한마디씩 툭툭이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