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3)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7.0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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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던 할머니는 무람없이 허탈한지 맥을 놓고는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다
감촉이 장난 아니네요! 파리가 미끄럼을 타다 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네요! 하이고 참말 좋다
끝순이에게도 하나 좋을 게 없을거구먼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죄 뿔도 없는 집구석에서 호의를 무시한다고요!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다음 날로 함을 앞에 둔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열 것 같은 처음과는 달리 한없이 망설이고 앉았다. 이마로는 골이 깊어진 주름이 쭈글쭈글하여 흡사 할미 탈을 쓴 것만 같고, 앞니가 빠진 모양새가 합죽이 형상으로 웃는 듯도 싶다. 흑인처럼 새까만 손등에 삭정이 같은 손길을 가늘게 떨며 습관처럼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감정이 복받쳐 우는 듯도 싶다.

“나날이 좋은 건 안 닮고 낫을 닮아 ‘기억’ 자로 휘어지는 이 허리는 어이할꼬? 언제나 한번 꼿꼿하게 펴볼거나?” 푸념하는 할머니는 사위를 맞아 이마저도 장모자리로 흠이 될까 싶어 홀로 근심인 모양이다.

“걱정도 팔자라고! 늙으면 다 그렇지! 왕후장상~ 그 어느 뉘라서 별스러울까? 저승 갈 때는 칠성판(七星板)에 꼿꼿하게 누워 갈 건데 뭔 걱정을!” 하는 진담인 듯 농담에 쑥스럽게 웃어

“그래 그때는 그렇겠지! 나도 남들처럼 꼿꼿하게 누워 가겠지!” 하며 수월찮게 받아넘기던 할머니다.

그도 잠시, 기어이 함을 열어보는 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그저 한숨뿐이다. 함의 맨 위로는 혼수품으로 장만해야 할 물목이 조목조목 적인 종이가 얹혔는데 위서부터 아래쪽까지 눈이 모자랄 지경인데 어찌 아니 그러하겠는가?. 조심스럽게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던 할머니는 무람없이 허탈한지 맥을 놓고는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다. 서서【徐庶:삼국시대 영천[潁川: 지금의 하남성 우주(禹州)] 사람으로 자는 원직(元直). 본명은 복(福)】의 모(母)가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한탄했던 것처럼 아예 모르고 말걸, 어째 글을 깨우쳤나 싶어 후회스럽기만 하다. 무당집과 의원을 드나들며 어렵게 깨친 글공부로 찬찬히 살펴보는데 집과 전답을 죄다 팔아도 턱없이 모자랄 판이다. 결국에는 어렵게 맺은 혼사를 깨든지 아니면 알거지 신세에 땡 빚을 얻을지를 결정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였다. 놓치기 아까운 혼사다. 어렵게 이루어진 혼사다. 고모의 행복을 위해서는 결코 깰 수가 없는 혼사다. 그렇다고 남은 가족들이 먹고살 재산을 몽땅 처분하는 것도 모자라서 고리의 빚을 떠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할머니가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오동나무에 걸린 모양으로 갈피를 못 잡아 멍청하게 앉았는데 어머니가

“어머님 끝까지 다 보시고 결정하시죠! 그렇게 해서라도 철수 고모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또 그렇게 해야지요! 재물이야 몸 밖의 물건이라 다시 모으면 되잖아요!” 하는데 할머니가

“오냐~ 오냐 그러자 꾸나! 다 보고 결정하자 꾸나!” 하는 할머니가 종이를 들어내자 고모와 할머니를 비롯한 식구들을 위한 옷감과 패물 등이 눈이 비좁도록 들었다.

금가락지, 옥가락지, 금비녀, 옥비녀를 비롯하여 사분(‘비누’의 방언), 구르무(‘크림’의 방언) 등과 온갖 능라에 고급 주단(綢緞) 등이 차고 넘친다. 구경할 시간도 없이 예물을 들어내자 그다음으로 사돈 내외분, 시부모의 옷 치수가 적힌 종이가 보였고 다시 그 아래로 제법 두툼한 흰색봉투 하나가 가지런하게 놓였다.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들어서 봉투를 뒤집자 두툼한 지전 뭉치와 함께 편지 한 장이 흘러나와 팔랑팔랑 방바닥으로 떨어진다. 할머니가 생각지도 못한 돈다발은 물론 언감생심의 서신을 대하자 그저 놀랍기만 하다. 돈다발은 옆으로 밀쳐 두고 서신을 펼쳐 읽어보는데 손이 떨리고 얼굴의 살점이 절로 실룩거린다. 어머니가 무슨 내용일까? 하여 궁금증을 참아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할머니의 표정이 심상찮다. 화를 내는 듯도 하고, 안도의 표정을 짓는 듯도 하다. 웃는 듯, 우는 듯 기복이 죽 끓듯 극심해 보인다.

“어머님 무슨 사연이기에 그러하십니까? 그리고 이 많은 돈은 또 뭣~ 고요?”

“글쎄 말이다. 이일을,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고! 아~ 글쎄 사돈댁에서 혼수에 대한 일체의 비용을 부담한다지 뭐냐! 우리보고는 그저 힘만 조금 보태 달라고 부탁 아닌 부탁이구나! 그래 내 이래저래 갈팡질팡이 아이가!” 하며 어머니를 쳐다보며 넌지시 의견을 묻는데 어머니조차 어떻게 결론을 낼 수가 없다. 고부지간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리를 싸매 우물쭈물하는데 문밖서 인기척이 이는가 싶더니 감골댁이 배시시 방문을 연다. 호기심과 무안으로 발그스레한 감골댁의 얼굴을 본 할머니가 사면초가의 어려운 지경서 십만 지원군을 만나듯

“자네는 이 중요한 때에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오는가? 그리고 왔으면 어~여! 들어오질 않고!” 하는데 용기를 낸 감골댁이 방안으로 들어와 옷감 등으로 어지러운 틈을 비집어 옴나위 자리를 잡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펼쳐진 옷감을 불문곡직 집어 엄지와 검지로 감촉을 헤아려

“값비싼 비단이라 그런지 감촉이 장난 아니네요! 파리가 미끄럼을 타다 미끄러지면 다리가 부러지겠네요! 하이고 참말 좋다. 나도 이런 옷감으로 정성을 들여 지은 네거리(‘외출복’의 방언)차림으로 뻗쳐 입었으면 원이 없겠네요!” 하며 이리저리 뒤적거린다. 보다 못한 할머니가

“아~ 이 여편네야 대충 좀 뒤적거리게! 귀한 옷감에 손때 탄다만~ 그건 그렇고 감골댁아 이 일을, 이 노릇을 어떡하면 좋나 그래!” 하며 편지를 펼쳐 보이자

“성~님은~ 지가 뭔 글을 아남 요! 글이야 성~님이 알지! 동네 여편네치고 글 아는 여편네가 어디 있다고!” 하더니 까막눈도 서러운데 설움이 복받친다는 듯 입을 한발이나 내민다. 할 수 없이 할머니가 편지 내용을 찬찬히 읽어주는데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안사돈과 함께 점심을 겸상으로 혼례 날짜를 이야기하던 때가 어제만 같은데 벌써 여러 날이 흘렀나 봅니다. 그새 한 계절이 바뀌어 대설(大雪)이라는 절기를 넘어 동장군이 불원 청으로 찾아드는 겨울의 초입을 맞았습니다.

겨울 채비에도 동동걸음일 텐데! 덧붙여서 따님의 혼수 문제로 몸도 마음도 공이 바쁘시리라 짐작이 갑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세간의 이목이 온통 쏠린 마당에 물 한 그릇 떠놓고는 작수성례로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가운데 여러모로 힘이 드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생짜로 일을 만드는 것만 같아 더욱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조금이나마 그 수고로움을 덜고자 하는 마음에서 얼마간의 금전을 동봉하오니 너그러이 받아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마음이 언짢을 수도 있습니다. 업신여긴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결단코 그런 뜻은 털끝만큼도 없다는 점을 버선목 뒤집듯 알려 드립니다. 혼수품 또한 물목을 무시하셔도 무방합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몇 자 적어보았을 뿐입니다. 이는 우리 둘 내외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향후 혼수품에 대해 예의범절이 있느니 없느니, 많으니 적다를 따져 일언반구 입에 담지 않겠다는 점을 다짐 겸 약속드립니다.

서산에 걸린 해처럼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있어서 우리 둘 내외가 간절히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재물과 명예, 그따위 그런 것들은 이미 마음속에서 지우고 비운 지가 오래전입니다. 그저 마음씨 착한 며느리를 맞아 못난 아들과 알콩달콩 화목하게 가정을 꾸려가는 것을 보는 것이 저희 둘 내외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소원입니다” 하는 대목까지 읽었을 때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감골댁이

“호호호 성~님! 더 읽을 것도, 더 들어볼 것도 없네요! 뭘 걱정하세요! 성~님! 못 이기는 척 그냥 받아들이세요! 다 그러라고 일삼아 꾸며서 보냈구먼요! 성~님네의 온 식구가 거리에 나 앉지 않게 말이에요! 딸내미 시집보내고선 사돈댁이 길거리에 나 앉았다는 소문을 무슨 좋은 소식이라고 그 댁에선 듣고 싶겠습니까? 반면에 넉넉하게 인심을 보태서 준비하고 쓰면 되잖아요! 재물이 차고 넘쳐나서 모처럼 달다며 쓰는 인심인데! 그 인심을 자존심을 내세워 매몰차게 물린다면 오히려 미움만 삽니다. 며느리로 들어간 끝순이에게도 하나 좋을 게 없을거구먼요! 원래 가진 사람들의 마음이란 그런 겁니다. 빼앗을 때는 인정사정없이 빼앗지만 반면에 쓸 때는 또 화끈하다니까요!” 하는데 할머니도 어쩔 수가 없다 여겼다. 있는 재산을 몽땅 팔고 난 뒤 길거리에 나 앉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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