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4)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4)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7.08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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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동네 아낙네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장날이면 장날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버꾸내기(‘교대’의 방언)로 재를 넘어갔다
동지섣달의 긴 긴 밤을 홀로 지새우는 남정네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간다
한번 잠들면 어느 산골 어느 청솔 밑으로 잠든 떠꺼머리 몽달귀신이 업어가도 모르겠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다음 날 저녁부터 할머니 집은 동네 아낙네들의 일터로 변했다. 가을걷이가 완전하게 끝나지 않은 가운데 아낙네들은 짬만 났다 하면 할머니 방에다 진을 쳤다. 아낙네들 무릎 위로는 모처럼 맞는 혼사에 걸맞게 새로 사들인 옷감에서 풍기는 싱그러움으로 넘쳐났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다 춰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어렵고, 솜씨가 못 미쳐 힘든 일은 유명 한복집의 손을 빌렸다. 그렇더라도 혼수 장만은 끝이 없었다. 그 와중에 혼수를 장만하고 남을 만큼의 넉넉한 돈이지만 내 돈처럼 흥청망청 쓸 수는 없다고 여긴 할머니의 계산은 철두철미했다. 달력 쪼가리를 펼쳐 꾹꾹 눌러 쓴 몽당연필 끝에서 땡전 한 푼 에누리 없었다.

시나브로 시간이 흘러 본격적인 겨울철로 접어들자 밤이면 밤마다 할머니 방은 거물거리는 호롱불이 꺼질 줄 몰랐다. 깜박거리는 호롱불과 촛불 아래 각자 맡은 분야서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조잘조잘’ 잠시도 입이 쉬지 않는 가운데 꾸역꾸역 열심이다. 그런 동네 아낙네들의 밤참 겸 주전부리를 위해 장날이면 장날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버꾸내기(‘교대’의 방언)로 재를 넘었다. 고모의 혼수 장만을 위해 애쓰는 동네 사람들을 위해 생무를 깎고, 김장김치를 대접에 담고, 감자를 삶고, 화롯불에 노릇하게 구워낸 군고구마도 좋다지만 그럴싸한 새참으로 밤이면 밤을 준비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즈음 당사자인 고모보다 더 조바심으로 애가 타는 할머니는 마음속으로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를 그리고 있었다. 구구 팔십일, 옛날 봄을 기다리는 선비가 동지를 지나 팔십 한 송이의 매화를 그려놓고는 하루에 한 송이씩 채색하다 보면 마지막 팔십 한 송이에 이르러 새봄을 맞는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마음속 구구소한도가 완성되는 날이 고모의 혼례일이라 여긴 할머니는 하루에 한 송이씩 정성으로 피워 나갔다. 바람이 부는 날은 아래쪽을, 구름이 낀 날은 왼쪽을, 비가 오는 날은 오른쪽을, 눈이 내리는 날에는 위쪽을, 맑은 날이면 중앙의 매화꽃을 피웠다.

그런 한편으로 앞산 재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재위로 낯선 그림자만 비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할머니는 마당을 지날 때면 손수건을 꼭 잡은 손에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주억거려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무한한 자비에 이 늙은이는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려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보살님 같은 마님 감사합니다” 를 연발이다. 마님이 행여 마음을 바꿔 파혼 통보라도 보내올까 싶어 그러는지 구구절절한 마음으로 섬긴다. 그 모습에 심통이 난 고모가

“그러게 엄마 나 시집 안 간다니까 왜 그래! 엄마는 자존심도 없어, 배알도 없어, 내가 뭐 폐기처분에 싸구려에 팔리는 물건도 아니고 자비에 감사는 무슨 감사, 매일같이 굽신굽신 이게 다 뭐야!”

“이런 속없고 소갈머리 없는 맹랑한 가시나를 봤나! 이게 이 어미 좋아라고 이러니! 다 너 잘되라고, 시집에서 귀염받고, 예쁜 살 박혀 소박 안 당하고 잘 살라고, 너 좋아 행복 하라고 이러는 게지! 생돼지 멱을 따는 듯 때까치 소리로 빽빽, 입방정은 고만 떨고 너도 여기 서서 부정 안 타게 지성으로 이 어미처럼 감사하다 꾸벅꾸벅 절이나 안 할래?”

“싫어! 싫어! 동네 창피하게 싫단 말이야! 이러는 엄마를 보고 동네에서는 뭐라 수군거리는 줄 알기나 하고 이래! 감골아지메와 영천언니를 빼고는 딸을 못 팔아먹어 안달 난 할망구래! 부잣집에 딸을 팔아 한몫 잡아보려 눈이 뒤집힌 욕심쟁이 할망구래!”

“내가 아니면 그만이지 그리고 또 그러면 또 어때! 이것아 나는 너만 괜찮다면 그깟 재물이 무어에 필요할꼬? 너만 행복하게 산다면 이 에미야 이 자리에서 칼을 거꾸로 물어 죽는다고 해도 원도 한도 없는기라!” 하며 지극정성이다.

그즈음 혼수품 장만에 어느 정도 이력이 붙은 동네 아낙네들은 할머니 집에서 이야기꽃으로 밤이면 밤마다 밤이 짧다며 볼멘소리다. 그렇다고 늘 웃으며 모일 수는 없었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다고, 동지섣달의 긴 긴 밤을 홀로 지새우는 남정네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더해간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마누라를 대면할 때면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투덜거렸다. 쓰다 달다는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인상부터 찌푸렸다. 삼시 세끼의 밥상을 앞에 두고 이유 없이 수저로 상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별꼴이야 하며 저마다 퉁퉁 부은 신랑의 표정을 흉을 보는 데는 다들 배꼽을 잡는다. 그렇다고 마냥 웃어넘길 일만도 아니었다. 할머니도 이미 이유를 짐작한 듯 어느 저녁 날을 맞아 감골댁을 향해

“동~상! 오늘은 일찍 집에 가서 감골양반 심기를 좀 달래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곁눈으로 넘겨보며 은근히 청하는데

“성~님은 별 망측스럽게 오늘따라 왜 또 이러실까? 그것도 새색시 적 말이지 인자 옆에 오는 것조차 질색팔색을 하는구먼요! 비실지처(非室之妻)에 물 떨어지고 그것 끊어진 지가 언젠데 그러세요!” 하고 우습다는 듯 ‘호호호’ 웃더니

“남정네들이 하나같이 늦바람이 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네요! 여자들 몸이 죄다 이 모양 요 꼬락서니니 달리 도리가 없을 거구먼요! 문지방 넘을 힘만 있고, 숨만 쉬면 꿈꾸듯 그립다고 찝쩍거리는 판국에! 그런 와중에 젊은 년들의 야들야들한 살결을 대하면 철석간장이라도 어쩔 수가 없을 거구먼요! 매끄럽고 보드라운 속살에 홀라당 넘어가지 않으면 그놈은 사내자슥이 아니겠지요?” 하는 말에 성주댁이 도끼 눈으로 홉떠서는

“그런 말 마세요!! 우리가 밥벌레로 그저 살았나요! 이팔청춘에 고초 당초 맵다 한들 시집살이보다 더 매울까? 눈물 콧물을 쏟아 시부모 공양에 집안 대를 잇고, 소상 대상에 탈상까지 삼년상에 접빈객 봉제사로 여태껏 같이 산 공이 얼만데! 정으로 산 그 세월은 어떡하라고! 이유 여하를 따져서 감골아지매요 바람은 안돼요! 그 꼴은 죽으면 죽었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는 못 봐요! 죽을 날 앞두고 씨앗 쌈할 일 있어요! 어느 년 좋아라 같이 죽고 말지요!”

“말이 그렇단 말이지! 웬 정색은? 그러게 평소 잘하라고! 남정네도 알고 보면 불쌍한 허깨비들이여! 자슥새끼랑 기집년 굶길까 싶어 정작 본인은 막걸리 한 잔에 배 두드리는 팔푼이 같은 허풍쟁이여! 그리고 그만 말에 발끈하기는! 어째 성주댁 무서워서 말이나 제대로 하겠나!” 하는 감골댁은 그새 흥분으로 얼굴이 벌게진 성주댁을 비롯하여 호기심 가득한 김천댁 등 젊은 새댁을 돌아보며 적당히, 눈치껏 집에 들어가란다. 감골댁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이미 중년의 새댁들인데 어찌 그러한 부부지정을 모를까? 나이든 말이라고 어찌 콩을 마다할까? 밤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을 어찌 외면할 수가 있을까? 당장에 초저녁부터 병든 달구새끼(‘병아리’의 방언)모양 꾸벅거리는 영천댁을 지그시 바라보던 감골댁이

“그렇게 꼬박꼬박 졸다 불똥이라 떨어져 이불 귀에, 속적삼에, 분홍치마폭에 구멍이라도 나면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망치면 어쩌려고 그렇게 졸고 앉았나! 오늘은 어~여 집으로 돌아가 푹 자고 내일 저녁일랑 일찌감치 오게나!” 하는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아~따 저녁밥에다 싸이나(청상가리)를 말아 먹었나? 우짠다고 이리도 졸릴꼬! 한번 잠들면 어느 산골 어느 청솔 밑으로 잠든 떠꺼머리 몽달귀신이 업어가도 모르겠네! 호~ 성~님들 오늘은 좀 봐 주이소! 벌충으로 내일은 일찍 와서 오늘 다 못한 일까지 다 할랑 게요!” 하고는 할머니를 돌아보면

“어머님~ 저 그래도 되지요?” 하고는 연신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다가는 기지개를 길게 켜던 영천댁이 치맛자락을 다잡아 쥐고는 문지방을 나간다.

“오~냐! 오냐~ 그래라! 여기 일은 걱정을 말고 어서 가서 푹 쉬어라!” 하는데 감골댁이 뒤를 받쳐

“그러~ 그러~ 양어머니 말씀대로 어~여 가서 푹 자고 내일 저녁이랑 일찍 오게!” 하고는 삽짝을 돌아가는 영천댁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기가 무섭게

“그래 좀 쉬엄쉬엄 쉬어가며 해야지! 쇠로 만든 몸도 아닐 진데!” 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다들 한마디씩 거들어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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