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11)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11)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4.10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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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악한 표정도 모자라 할머니를 향해 눈을 홉떠서 노려보는데 벌겋게 얼굴을 붉혔다
한 치에 거짓말도 없이 명명백백합니다. 이는 하늘을 두고 맹세를 하라면 할 수도 있습니다
크는 동안 신체에 변화가 있어 혹 고자(鼓子)인가도 싶었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예의상 그냥 오기가 뭐해서 없는 솜씨에 음식이라 좀 장만했습니다. 대갓집이라 한미한 집안의 배춧잎 나부랭이나 무청, 상추 등의 나물이 입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초면에 빈손으로 오기도 뭣해서요!”하며 대나무 상자를 손으로 어루만질 때 겉의 방문이 열리는 싶더니 미닫이가 스르르 열리고 있었다. 부잣집 그런지 방문만 열어도 동네가 다 알 듯 소리 나는 문과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 그와 동시에 행랑어멈이 일주반(一柱盤), 다과상을 들이는데 마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왜 이리도 늦었는가?”하더니 할머니를 향해서

“뭘~ 이런 것을! 그냥 오시면 누가 뭐라고 합니까? 사람 입이 매한가지지요!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행랑어멈을 돌아보며

“아들 아니지! 자네에게는 도련님의 장래가 걸린 귀한 음식일세! 여기 점심상에 곁들이고 영감님 점심상에 올리고도 남거든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시게!”하며 들고 나가라는데 할머니는 속으로 그저 안심이다. 한데 할머니가 내려놓은 붉은색 보자기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님이 손으로 가리켜

“저건 우리가 보낸 내 자식의 사주단자가 아닙니까? 어째 도로 가지고 오셨는지요? 우리 둘 내외가 심사숙고 끝에, 어렵고도 어렵게, 그렇지요! 말도 안 되게 청혼한 이 혼사를 너무 일방적이라 노여움에 지쳐 저희와 상의 한번 없이 일방적으로 물리시게요?”하며 뜨악한 표정도 모자라 할머니를 향해 눈을 홉떠서 노려보는데 벌겋게 얼굴을 붉혔다.

졸지에 면상이 벌겋게 달아 오로는 모양새가 속으로는 부아가 용광로처럼 들끓어 보인다. 이 혼사를 들어 동네 사람들은 마님을 두고 노망이 났다며 둘만 모여도 입방아다. 참새들처럼 모여 앉았다 하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건만 풍을 맞아 총기를 잃었다고 게거품을 문다. 하는 행실머리를 보는데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든 집안이라 손가락질이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라는데 당대에 거덜이 날 집구석이라 쑤군거린다. 누가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혼사다 보니 그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혼사는 엇비슷한 집안끼리 맺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하지만 때로는 경우를 벗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렇다고 이렇게 말도 안 되게 기우의 혼례는 전무후무하여 없다는 것이다.

마님이 혼자 들끓는 속을 삭이며 사주단자를 노려보는데 눈에서 불이 이는 듯하다. 만약 도련님인지 개차반 같은 아들놈이 옆에 있다면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도 남을 심정이다. 옆에서 가슴을 졸이며 가만히 지켜보던 할머니가

“혼사를 파기하다니요! 이렇게 귀하고도 귀한 집안으로부터 사주단자를 받은 것만으로도 저희 집안으로서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뼈에 새겨 두고두고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하자 금세 마음을 다잡은 마님이

“그런데 어째서 도로 가지고 오셨는지요?”

“예~ 그것이!”

“...”

“그러니까? 그것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이년의 짧은 머리로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청혼에 혼담이 이루어진 까닭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내력을 알지를 못해서요! 그러다 보니 이 사주단자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의심스럽기도 하고요?”

“누구의 사줏단자라니요?”하며 알 수 없다는 듯 야릇한 표정의 마님을 향해 할머니가

“혹 이 사주단자의 진짜 주인이 이 댁 영감님이 아닌가 해서요!”

“늙어 죽을 날만 오늘일까? 내일을 손으로 꼽아 기다리는 영감이 무슨 후처를 맞고 첩을 들인다고 사주단자 타령입니까? 부인인 내가 아직은 안방 차지로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살아있는데요!”

“그렇지요! 하지만 아~ 왜? 이 씨 조선 때 회춘을 한답시고 사대부가의 늙은 대감님들이 나이 어린 처녀를 노리갯감 삼아 웃방(윗방)에다 애기처럼 두고는!”하고 곁눈으로 마님의 표정을 살피는데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디서 그런 천벌을 받을 생각에 발상이 나왔는지는 모르겠거니와 터무니가 없고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이설은 집어치우고 저 사주단자는 내 아들의 사주단자가 틀림없습니다. 이건 한 치에 거짓말도 없이 명명백백합니다. 혈서를 쓰라면 쓰고 하늘을 두고 맹세를 하라면 할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천한 저희로서는 그저 졸지에 당한 일이라 열어보기에도 그저 두렵고, 혹 잘못 전달된 것을 훼손하는가 싶기도 하고 또 생각지도 못한 뜻밖이라 몸들 바를 모르다 보니 오만가지에 잡스러운 생각이 들어서요! 혹 기분이 상했다면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십시오!”

“아니~ 아니지요! 돌이켜서 생각해 보는데 나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구먼요! 인륜지대사에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이 거두절미로 사주단자부터 보냈으니 받는 쪽에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당연히 이해하고 말고요! 나도 생각은 물론 짐작도 못 한 일이었으니까요!”하더니

“내 지금부터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듯 급하게 이루어진 혼담에 대한 자초지종을 얘기할 테니 새겨서 들어나 보시고 파혼을 하든, 이 자리에서 물려 없던 일로 하든 마음대로 하시죠!”하고는 내력을 찬찬히 들려주는데

아들의 혼기가 차자 원근(遠近)을 떠나 뼈대 있고 한 가닥 한다는 집안으로부터 청혼이 쇄도했다. 한데 아무리 신붓감의 가문이 덕망 높아 훌륭하고 당나라 현종 때의 양귀비에 춘추전국 때의 진나라 공주 맹영처럼 경국지색으로 인물이 출중하면 무얼 하나! 당사자는 말도 꺼내지 말라며 관심이 없단다. 마님의 곡진한 간청에도 소 닭 보듯 내팽개치는 데는 방법이 없다. 워낙 장가란 말에는 질색팔색을 하는지라 혹여 몸에 문제가 있는가도 싶었다. 너무나도 완강하다 보니 의심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어미만큼 아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세세하게 다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크는 동안 신체에 변화가 있어 혹 고자(鼓子)인가도 싶어 동네의 깨복쟁이(발가벗은 사람이란 뜻으로 어릴 적 불알친구의 전남 방언)를 불러서 물어본 결과 누구 없이 고개를 가로저어 아니란다. 순정-팔이로 돼먹잖은 술집 작부가 쳐 놓은 덫에 걸려 배비장전의 배비장이처럼 어금니를 뽑히고 살점이 뜯겨나듯 된통 당했나 싶어 알아본 결과 그것도 아니란다. 마지막으로 고려 31대 공민왕처럼 금지된 동성애에 빠져 그러나 싶어 가슴이 섬뜩, 다그쳐 보아지만 그 역시 아니란다. 그렇다면 건장한 몸에 아무 문제도 없는데 왜 그럴까 싶었다.

마음속으로 우려했던 문제가 말끔히 해소되자 마님은 더 적극성을 띠고 나섰다. 손자 생각이 날이 갈수록 간절한 마님은 아들의 의사를 마냥 존중할 수가 없었다. 문중을 위하고 가문을 위해서라도 며느리를 들이는 일에 결단코 포기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어느 때인가? 아들의 반대를 위한 반대를 보고 또 보다가, 참고 또 참다못한 마님이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이웃 동네의 참한 신붓감으로 허 씨 집안을 들어 사주단자를 보내고 혼례 날짜를 잡겠노라고 아들에게 통보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들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그길로

“아버님 어머님 이 못난 불초 소자를 용서하지 마십시오!”하는 메모 한 장을 달랑 남겨놓고는 온다간다 말없이 괴나리봇짐을 싸서는 집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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