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05)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05)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2.2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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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과 몸뚱이를 담보로 창창한 청춘과 맞바꾸는 것이지요!
혀를 깨물든, 은장도가 어째 있냐며 목이든 가슴을 찔러서 죽지 못한 것을 수치로 나무랄 뿐이다
벌레 먹은 푸성귀를 소 풀 뜯듯 뜯어 아무리 솜씨를 부리고 정성을 기울인 들 무엇하리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어떻게 되기는요 뭐가 어떻게 돼요! 빌어먹을 대감의 숨이 붙어 있을 때나 어머님이라 떠받들지 대감이 죽은 마당에는 끈 떨어진 가오리연이나 다름없죠! 하늘을 가뭇없이 날아가는 연 꼬리처럼 이년 저년으로 종년보다 못한 신세지요! 꺾여져 길에 버려진 꽃처럼 청춘이 구만리에 어여쁜 소녀의 고운 꿈이 사라진 삶에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노비에 허드렛일로 찌들어가는 부엌데기도 그보다는 신세가 났겠지요! 그렇다고 생목숨을 끊어 죽을 수는 없는 법! 얼마간의 재물을 손에 쥔 처녀는 첫새벽에 서낭당에 나와 앉는다는 거죠! 여자란 자존심을 버려 팔자에도 없는 습첩(拾妾:조선 시대 소박을 맞거나 과부들이 재혼하는 방법 중의 그 하나)에 나선다는 거지요! 그 새벽에 처음으로 만난 남정네를 지아비로 섬겨 산다는 것이지요! 재물과 몸뚱이를 담보로 창창한 청춘과 맞바꾸는 것이지요! 다행히 처음 만난 남정네가 홀아비거나! 늙거나 말거나 숫총각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저승길이 오늘, 내일 하는 늙은이 주제에 자식새끼가 줄줄이 딸린 남정네라면 인생 종 치는 것이지요! 그나마 그건 좋은 조건이고 미리 몸값을 치렀다며 맨몸에 내쳐지는 경우도 허다하다지요! 막상 내쳐지고 보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죠! 친정에서도 내놓은 딸자식으로 갈 수도 없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죠!”하고 말을 마친 감골댁은 방정맞다는 듯 손을 들어 입을 때리는 시늉으로

“성~님! 요~ 요망한 주둥아리가 옛날의 그 못된, 전갈 꼬랑지 같은 모삽은 버릇이 재발하여 도진 갑네요!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겁니다. 절대로!”하고는 후회스럽다는 듯 극구 부인이다.

하지만 손수건을 양손으로 바짝 거머쥔 손을 떠는 할머니가 그냥 들어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끔찍스럽고 무서운 이야기이다. 딸 가진 어미로써 때아니게 가슴속으로 소슬바람이 싸늘하게 인다. 얼음장을 품은 듯 섬뜩섬뜩 차갑다.

“아~ 이 사람아~ 설마하니 인간의 탈을 쓰고서 어찌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백주, 대명천지에 어떻게 그런 일이 버젓이! 괜한 오해가 생사람 잡네! 그 전설 같은 고릿적 이야기 일랑은...! 그런 이야길랑 어디 가서 입 밖에도 뻥긋 말게!”하고 감골댁의 입은 막았다지만 속으로는 연신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가슴이 더없이 쿵덕거린다.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이 죄 없는 고모만 들들 볶아 잡는다는 생각에 할머니는 수일 내에 기필코 재를 넘어야겠다는 생각만 굳힌다. 이대로 마냥 당하고 있을 수만 없다는 생각에 모 아니면 도라고, 단 판을 지으리라 어금니를 질끈 깨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감골댁의 말도 영 틀리지는 않은 것만 같다. 옥상옥이라고 권력 있고 재물 있는 족속들이란 아전인수 격으로 늘 제 좋은 쪽으로만 일을 벌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수절 과부를 보쌈하든, 강제로 범하든 내 알 바 아니라는 것이다. 혼기 찬 처녀를 잡아가든, 유부녀를 잡아가든 그들 욕심만 채우면 더는 볼일이 없단다. 후일 문제가 된다면 지조와 정조를 들먹여 혀를 깨물든, 은장도가 어째 있냐며 목이든 가슴을 찔러서 죽지 못한 것을 수치로 나무랄 뿐이다. 그렇게 부질없이 죽어 나간들 눈 하나 깜짝 않고 돈과 권력으로 무마시켜 버릴 정도니 현재 고모의 가련한 처지를 보는데 낚싯밥에 걸려든 피라미 정도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슬쩍 사탕발림으로 꼬드겨 얼마간의 재물로 입을 틀어막는다면 충분하게 그럴 수가 있다 여겼다. 그럼 고모는 이제 어떻게 된단 말인가?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석을 털어 이제 세상의 밝은 빛을 본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그동안 고모의 말만 믿고, 못 믿을 인간의 매파 말만 믿고 집안에 처박혀 태 무심했던 할머니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일찍이 세세하게 알아보지 못한 후회가 폐부를 깊숙이 찔려오는 듯 정신이 아득하다.

그날 밤으로 고모는 할머니의 밑도 끝도 없는 지청구 앞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잡아먹을 듯 다그치는 할머니 앞에서 고모는 할 말을 잊었다. 할머니의 집요한 추궁을 온몸으로 견디는 고모는 당최 이유를 몰랐다. 뜬금없이 다그쳐 입은 맞추어 보았니?, 손목은 잡혀 보았나?, 둘이서 죽자 살자 껴안아는 보았냐? 하는 속사포 같은 질문 앞에 고모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고모가 입을 닫으면 닫을수록 애가 타는 할머니다. 결국에 고모로부터 그날을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못 봤다는 황당한 이야기만으로 결론을 낸 할머니는 ‘웃방애기’라는 단어가 현실인 듯 비수처럼 심장을 깊숙이 찔러 드는 기분이다.

다음날부터 할머니의 앞산을 바라보는 모습이 전날과는 사뭇 달랐다. 어제만 해도 원수를 대하는 듯 눈초리가 매웠다면 오늘은 간간이 두 손을 모아 간절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느 때는 옷고름을 접어 붉어진 눈시울을 찍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돌변한 할머니의 모습에 고모가

“엄마 왜 그래! 어제처럼 욕은 않고 오늘은 왜 또 울어?”

“이게 다....! 이년아 너는 몰라 돼!”하는데 움찔한 고모가

“엄마 그럼 낼부터 또 신부수업이야!”하는 말에

“그래 말 나온 김에, 이참에 어디 한번 단디 배워 보자!”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은 할머니는 다시 고모를 집안에 들여앉혀 다잡았지만 5일을 채 못 버티어 개밥 안의 도토리처럼 겉돈다. 그런 와중에 할머니는 고모의 손끝은 지난번을 연습으로 삼았는지 일취월장으로 매워졌다는 것만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 땀, 한 땀으로 베갯머리를 두고 봉황문양 등을 진지하게 수를 놓는 것도 그렇고, 옷깃의 솔기를 접어가는 솜씨라던가, 인두질 등의 그 모두가 정묘하여 여간한 솜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엌에 들어서는 밥물도 알맞게 잡고, 각종 나물무침도 입맛에 맞도록 심심하게 버무렸다. 그중 고모의 바느질 솜씨는 촘촘하니 야무져서 휘감아 치기, 홈질, 시침질, 새발뜨기를 비롯하여 어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5일을 버티는 동안 고모의 인내심도 한계점에 다다랐는지

“신부수업이고 뭐고 아이 짜증나!”하는 고모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 자리를 박차 문을 나가버린다. 횅한 문설주에서 고모의 흔적을 찾는 할머니의 눈은 먹잇감을 놓친 맹금류의 눈처럼 공허해 보였다. 한참이나 멍하게 앉았던 할머니가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나간다. 차곡차곡 갈무리하던 손길을 멈춘 할머니가 무슨 생각에선지 옷가지를 가만가만 손으로 쓸며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그나마 다행이구나! 후일 소박을 맞더라도 바느질로 삯을 받든 침모로 들어앉아 부엌데기로 살든 입에 풀칠은 하겠구나! 하늘이 사람을 낼 때 밥그릇 수는 세어서 주고 그 방책도 더불어 준다고 그저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천방지축에 저리 모나고 못났어도 밥술이나마 뜨겠구나! 하기야 내 죽고 나면 굶어 죽든 말든 내가 어째 알기고?!”하며 쓸쓸한 표정이다. 다시 옷가지를 들어서 살펴보는 할머니는

“그렇더라도 아직은 엄벙덤벙하여 좀 착실하게 배웠으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어쩔 수 없다더니!”하며 문설주로부터 눈길을 거둔다. 한 가닥 남은 미련을 버려 마음을 접는다.

하지만 고모의 불확실한 앞날을 생각하는데 할머니는 그저 한숨뿐이다. 지레 늙어 죽을 것만 같았다. 생각다 못해 한가위를 며칠 지난 어느 날 할머니는 어머니를 불러 새벽부터 음식 장만에 열중이다. 하루하루 날짜만 흘려서 미적거릴 일이 아니라는데 결론을 내고는 오늘은 기어이 재를 넘어 결론을 지으리라 장만하는 음식이다. 새벽잠을 깨워서일까? 어머니가 칭얼대는 나를 포대기로 들쳐서 업은 가운데 고부가 든 부엌이 소요하다. 그 모습에 들일을 나가던 아버지가

“오늘 누구 생일인가요? 나도, 어머니도 아니고 혹 당신 생일?”하고 기웃거리는데 어머니가 눈을 하얗게 흘기며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게 많아요? 고~마! 마~ 모르는 척 일이나 나가소!”하고는 등을 떠밀어 들로 내보고는 대충 마무리되어 갈 적에 할머니가

“에미야 이만하면 얼추 된 것 같다. 너도 이제는 들로 가든 논으로 가든 가보아라!”하는데 어머니가

“어머님 그래도...!”하며 양손을 행주치마에 감싸 비비며 우물쭈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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