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13)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1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4.24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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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말에 의하면 천형은 없어 보였고 사지가 멀쩡하다니 그나마 보아 줄만은 하다
인연만 해도 그렇습니다.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인연인가 봅니다
어떤 불한당 같은 놈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얼굴에 칼침을 놓은 도망을 가버렸단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하고많은 색시 중에 하필이면 그런 집안의 그 처녀인가 싶었다. 집 떠난 아들이 돌아올 때만 해도 역마살이 끼어 여성 꼭두쇠로 전국을 돌아치든, 호구지책을 핑계로 들병이(‘들병장수’를 홀하게 이르는 말)가 되어 전국을 뜬구름으로 떠돌든, 밥 빌어먹는 거지로 이 고을 저 고을 기웃거리든, 드럼통에 치마를 둘러놓듯, 하여간 여자 형상만 데려온다면 두세 말 않고서 짝을 지어 주리라던 다짐은 어디로 가고 은근한 욕심이다. 생각하기도 싫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아기가 딸린 수절과부를 보쌈한다고 해도 무마하리라 다짐한 때가 어제만 같은데 어째 이러는가 싶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란 동물이 어쩌면 이렇게도 간사할까 싶다. 하지만 탄식하는 중에도 역시 내 며느리인데 욕심이 아니 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아들의 말에 의하면 천형은 없어 보였고 사지가 멀쩡하다니 그나마 보아 줄만은 한데 아들의 짝으로는 기울어도 한참이나 기울었다.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듣는 말만으로도 눈앞으로 그린 듯 훤하다. 꿈에 부픈 아들과는 달리 마님이 볼 때 이런 기막힌 경우가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생각만으로도 골이 지끈거려 생병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며칠을 지나 밑지는 셈 치고 매파를 불러 단단히 다짐을 받은 뒤 일삼아 심부름을 보냈다. 일륜지 대사를 앞두고 시어미니 입장에서 최소한 그 정도는 기본이라 여겨 부득불 취한 행동이었다.

한데 생으로 빼앗긴 것 없이 미운털이 박힌 까닭일까? 그도 아니면 주인에 대한 과잉 충성의 발로일까? 보고 들은 그대로가 아닌 듯싶게 살을 붙여도 너무 붙여 보인다. 짐작은 했건만 심부름에서 돌아온 매파가 게거품을 물어 장황하게 늘여놓은 말은 상상 그 이상으로 험했다.

돈도 재물도 좋지만 한마디로 그 집안과는 척이 져도 너무 져서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매파의 말에 의하면 며느릿감의 처녀는 14년간이나 온갖 병마에 시달린 끝에 겨우 살아났다고 하질 않은가? 천하의 약골에 아직은 정신연령이 10살에 남짓하여 철부지와 마찬가지로 세상 물정에는 까막눈으로 천방지축이라 하질 않는가? 코흘리개의 꼬마 신랑을 맞는 듯, 민며느리를 맞아들이는 격이라 데는 할 말을 잃었다. 매파의 말을 있는 그대로 좇으면 다 늙어서 까막눈의 며느리 뒷바라지에 시집을 살 팔자란다.

매파의 말을 전적으로 못 믿어서가 아니라 마님은 답답한 마음에 달리 사람을 놓아 수소문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매한가지다. 집안이 기울어도 너무 기울다 보니 마주하여 올릴 서푼에도 못 미친 저울추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노릇을 어이할거나? 없는 셈 치자니 평생을 혼자 살 것 같은 아들이 장가를 가겠다는데 어미로서 돌아앉아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처지다. 답답한 마음에 넌지시 다른 처녀를 입에 올려보지만 어림없단다. 어머님 욕심에 만약 그럴 지경이면 다시 집을 나가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에 담는다. 한술 더 떠서 만에 하나 그런 경우라면 처녀를 보쌈으로 야반도주, 다시는 집안으로 돌아오지 않겠단다. 이번 생애에 없는 자식으로 여기란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는 마님은 숨을 고르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댁의 귀한 따님을 두고 14년간의 병치레에 까막눈이라는 등의 제 말에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아마 예비 사돈께서도 저의 입장이라면!”하는데 묵묵히 고개를 숙여 손수건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할머니가 깜짝 놀라

“예~ 예! 그러문입소! 예~ 예! 저라고 어찌 아니 그러겠습니까? 마님의 고심을 충분히 이해하고 동감합니다” 하고 말하는 할머니는 못나도 내 자식이고, 내 딸인데 싶어 불편한 속을 감추고는 머리를 조아린다.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예~ 예” 다.

“한데 말입니다. 세상을 다 알아도 자식에 대한 일 만큼은 모르겠습디다. 열 달을 배앓이로 내 속으로 내놓은 자식이건만 청개구리 놀음에 이렇게도 속을 태울지는 진정으로 몰랐습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도 이렇게 애를 태우지는 않을 겁니다. 재물로 안되면 권세로 부린다면 최소한 흉내라도 내는데 이건 당최 씨알도 안 먹히는 원~, 하긴 그런 처지라면 자식이라 할 수도 없겠지만요!”하는고 식은 찻잔으로 입술을 축이더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인연만 해도 그렇습니다.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인연인가 봅니다. 한두 번 스쳐본 얼굴에 저렇듯 목을 매니 말입니다. 지금껏 저 난리에 장가라곤 안 가겠단 놈이 또 가지고 하니 아침저녁으로 조르는 통에 몸살이 날 지경입니다. 게다가 내가 짐작하건대 댁의 따님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을 겁니다. 세상인심이란 것이 언제나 그렇듯 재물을 좇고 권력을 좇다가 보니 이미 몸소 겪어 왔듯 그날 이후 아무도 청혼을 넣거나 혼담을 거론하는 동네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제 뜻도 의지도 아니건만 순리처럼 그렇게 흘러가드만요! 그것이 세상사 인심인가 봅니다. 저의 못난 자식의 혼담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쭉 그렇겠지요!” 하고는 할머니를 넌지시 건너다보며

“그래서 말인데요!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어쩌겠습니까? 콩쥐의 이야기도 있고, 신데렐라 이야기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좋든 싫든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으로 둘만의 특별한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이쯤에 짝을 지어주는 것이!”하며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참! 내 언젠가 귀동냥에 주워들은 풍월로 인연에 관한 이야기가 한 자락이 있습니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시겠습니까?” 하더니 승낙 여부에 상관없이

“어느 때 어린 소년이 미래의 신부가 궁금하여 점을 보았답니다” 하며 이야기를 잇는다.

과거의 어느 때 어린 소년이 미래의 신붓감에 대해 용하다는 점바치(‘점쟁이’의 방언)를 찾아서 묻자 그가 이르길 이 길로 시장통에 가면 난전으로 채소가게 옆에 쪼그려 앉은 어린 계집아이가 있을 터인데 그 애가 후일 신붓감이라고 한다. 미래의 신붓감이라 당최 어떻게 생긴 여자아이일까? 하고 호기심이 동한 소년이 한달음에 시장통으로 달려갔다. 눈은 왕방울처럼 클까? 얼굴은 계란형으로 갸름할까? 코는 오뚝해야 할 텐데! 키는 얼마만 할까? 계집아이가 삐죽하게 너무 커도 안 좋은데 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달려가 보니 점쟁이의 말대로 채소가게 옆으로 꾀죄죄한 계집아이 하나가 쪼그려 앉았다. 한데 머리는 까치와 참새떼가 무시로 집을 지은 듯 온통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지고 얼굴은 물과 담을 쌓는지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 허름한 옷차림은 그렇다 치더라도 눈에는 눈곱이 주렁주렁하고 콧물까지 훌쩍거리는 모양새가 당최 정이 안 가는 꼬락서니다. 없는 정도 떨어질 것만 같다. 게다가 훌쩍이는 콧물을 소매를 훔쳐 닦았는지 새까맣게 번들번들한 소맷자락 밑으로 삐죽이 드러난 손등마저 까마귀가 보고는 울고 갈 지경이다. 말간 얼굴에 곱상하게 옷을 차려입은 계집아이였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중얼거리는 소년은 한눈에도 머리에서 그려오던 미래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한마디로 말해 거지 중에 그런 상거지가 없어 보였다. 후일 저 가시나가 장래의 내 마누라라니! 저것과 어떻게 평생을 더불어서 살아 하는 생각 끝에 소년은 하늘이 엮어준 인연의 질긴 끈을 끊어 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생각을 굳힌 소년은 가슴에 품은 칼을 빼서 들고는 부지불식간 달려들어 그 애의 얼굴에다 무작정 그었다. 순간 ‘으~악’하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어머나 이 피는? 이게 다 무슨 일이고?”하는 소리에 이승에서의 인연은 여기서 끝났으리라 여긴 소년은 아수라장을 뒤로 그곳을 떠나서 잊은 듯 살았다. 지지리도 못난 가시나와의 인연을 끊어 냈다는 위안으로 조용하게 살았다. 고향의 향수 같은 것은 천륜을 저버린 죄인으로 평생을 두고 사치라 생각했다. 하지만 원죄로부터 자유로 울 수는 없었다.

“저놈 잡아라! 저~ 불한당 같은 살인자! 저놈을 잡아라!”하는 고함이 나날이 목덜미를 움켜잡는 기분이다. 그날 이후 한눈 한번 판 적이 없는 덕에 노총각으로 재산도 수월찮게 모았건만 좀체 혼사가 이루어 지지가 않는다. 금방이라 혼례가 이루어질 듯하다가도 뜻밖으로 사연으로 틀어지거나 어긋난 끝에 물거품으로 사윈다. 그러던 중 혼기를 한참이나 넘겨 어렵게 맞은 신부와 신방에서 마주하는데 새색시가 얼굴 한쪽을 귀밑머리를 풀어서 가렸다. 처음에는 부끄러워 그러는가? 여겨 괘의치를 않았다. 한데 화합 주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여전히 그러고 앉았다. 이상하다 여긴 그가 연유를 묻자 신부가 말하길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시장통에 나와 앉았는데 어떤 불한당 같은 놈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얼굴에 칼침을 놓은 도망을 가버렸단다. 그날 그때 생면부지의 그 소년이 어째서 그랬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신부는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앉았다. 줄곧 방바닥을 내려다보는 신부가 기막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듯 가늘게 어깨를 들먹이더니 기어드는 목소리로 고개를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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