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10)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10)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4.0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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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사주라면 마당을 무덤으로 여겨 칼을 물고 죽으리라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벽면 곳곳의 뚫어진 구멍을 통해 흙이 흘러내는 바람벽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마침내 생면부지의 할머니 둘이서 마주하고 앉았다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조반을 마친 할머니가 지난날과는 달리 당당하게 동네 중앙을 가로질러 걸음을 재촉이다. 동네 사람들이 안부를 묻는 인사에는 일일이 손을 흔들고 답을 하며 간다. 천천히 집을 나서서는 발걸음도 가볍게 단숨에 고갯마루에 올랐다. 고갯마루는 그간 며칠 사이에 가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진즉에 떨어진 낙엽이 이리저리로 휩쓸려서 나뒹군다. 서늘한 가을바람을 이마로 느끼며 내려다보는 할머니의 눈에 황금 들판 곳곳으로 점점이 박힌 농부들이 가을 추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실타래 같은 구름 무리가 바람에 밀려 왔다는 하늘 저편으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눈도 시원하게 너른 들녘으로는 그새 벼를 벤 듯 황금들녘 군데군데가 이빨이 빠진 듯 듬성듬성 비워졌다.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에 취한 할머니는 고모가 커다란 행운을 얻었다 생각했다. 그러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만만찮지만 분명 대 복을 받았다 여겼다. 고모가 그러한 행운과 대 복을 온전하게 누리자면 매파가 가지고 온 사주단자의 진짜 주인부터 철저히 가리는 일이 우선이라 할머니는 생각했다. 만약 도련님이 아닌 영감의 사주라면 마당을 무덤으로 여겨 칼을 물고 죽으리라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할머니는 하마터면 무당집으로 길을 잡을 뻔했다. 청년 시절 술에 취한 김유신을 기생 천관녀의 집으로 인도했던 말처럼 발이 알아서 간 때문이었다. 첫 대면에 인사말은 어떻게 또 어떻게 행동해야 천한 집구석이란 티를 벗고 예의범절에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잡다한 생각에 젖어 걷는 중에 몸이 알아서 무당집으로 향한 것이다. 하긴 그간 언감생심으로 그저 부러워만 했지 갈 수도, 갈 일도 없는 솟을대문이 다락같이 높은 집이다 보니 당연지사였다.

얼마쯤 가던 길을 되돌아 솟을대문을 향하는데 전에 없이 가슴이 두근거린다. 흡사 도둑이 제 발이 저린 듯, 동냥을 나선 거지 모양 기가 죽고 머리는 어깨가 좁다며 자라목으로 기어든다. 기어이 대문께에 다다라 빠끔히 열린 대문 틈을 기웃거려 집안의 동정을 살피는 데 그새 인기척을 느꼈는지 반백의 아주머니가 가지런하게 두 손을 맞잡아 나와서는

“어디서 오신 누구시면 누굴 찾아서 오셨는지요?”하며 대문을 연다. 한층 무안해진 할머니가

“예~ 저는 저~ 저 산 너머에 사는 끝순이란 처녀의 어미이온데! 이 댁 마님께 볼일이 좀 있었어요! 마님께서는 시방 집에 계시옵는지요? 혹 계신다면 기별을!”하는데 안으로부터

“행랑어멈 밖에 누가? 손님이라도 오셨는가?”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냥 황송해하는 표정의 행랑어멈이란 여자가

“예~ 마님 그러니까요! 저기 저~ 재 너머에서 끝순이 어미라는 아낙이 마님께 볼일이 있다면서!”하는데 스르르 미닫이가 열리는가 싶더니

“이~런! 이~ 내 집에 참으로 귀하신 손님이 오신 것을 몰랐네요! 어멈 어서 내 거처로 정중하게 모시게”하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본 듯, 어제 본 탁발승을 오늘 다시 보는 듯, 비루한 입성을 깔보는 듯, 동냥 나온 거지 취급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짓던 행랑어멈이란 여자가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굽실거리더니 양손을 정중하게 내밀어 따라오라며 한걸음 앞장선다. 할머니도 엉겁결에 마주하여 맞절로 답례 다소곳하게 뒤를 따라 걷는다.

정남향 ‘口’형의 집에서 마님 방은 북쪽 대문께로 치우쳤다. 할머니가 방으로 안내되어 좌우를 둘러보는데 절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으리으리한 집채만큼 세간살이도 하나같이 값지고 고급스럽다. 장롱만 해도 그랬다. 송판 쪼가리를 대충 이어 붙여 얼렁뚱땅 만든 고리짝 같은 반닫이 농을 비웃는 듯 8자의 자개농이 북쪽 벽을 병풍처럼 둘러쳐졌다, 서쪽으로는 화초장과 세월의 때가 켜켜이 내려앉은 원목의 문갑이 높낮이를 달리 허리를 쭉 펴서는 가지런하다. 8자의 장롱 앞 방바닥으로는 붉은 모란꽃무늬의 보료가 깔려 있고 그 너머로 허리를 받치는 안석(案席)이 보인다. 유비무환이랄까? 방구석 한 견으로는 일찌감치 겨울을 대비해서 들였는지 큼지막한 놋화로가 자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눈을 들어 벽면을 둘러 보는데 목단 꽃문양의 도배지가 눈에도 황홀하여 흡사 꽃밭에 든 느낌이다.

그즈음 어디서 얻어 왔는지 고모는 때때로 껌을 씹었다. 단물이 빠졌건만 저녁으로 씹다 만 껌을 애지중지하여 머리맡의 벽에다 붙였다. 이윽고 아침을 맞아서는 눈곱도 주렁주렁, 급하게 떼어내어 다시 씹었다. 그럴 때마다 좀이 슨 벽면 곳곳의 뚫어진 구멍을 통해 흙이 흘러내는 바람벽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허전하다 싶은 벽면에는 봄을 맞아 홍매가 붉게 핀 가지의 우듬지쯤으로 까치 두 마리가 나란히 앉은 봄을 예찬으로 다정한 족자가 걸렸다.

홍매가 점점이 붉게 흐드러진 가운데 화창한 봄을 마중 나온 까치 두 마리를 보자 진시황제가 억지를 부려 만들었다는 쌍 희(囍)자를 보는 것만 같아 절로 마음이 즐겁다. 희보춘선(喜報春先)의 족자를 보는데 마음은 청춘이라 아직은 새댁처럼 살고 싶은 마님의 마음이 녹아들어 보였다. 재차 방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는데 할머니로서는 상상도 못 할 살림살이뿐이다. 할머니가 방안 구경에 취한 나머지 상견례의 인사를 까맣게 잊고 있을 때

“저희가 먼저 찾아 봬야 하는데도 불구 이렇게 귀한 걸음을 하셨는데 다른 격식은 차치하더라도 간단하게 수인사라도 나누고 봅시다”하며 큰절을 할 채비다. 그제야 할머니도 꿈에서 깬 듯 화들짝 놀라 맞절의 예를 취하고 보니 고갯마루를 넘어오면서 애써 외운 온갖 인사말은 어디로 흩어지고 날아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뭐라 말하려고 했던가? 안녕하세요! 했던가? 두서없이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했던가? 이렇게 무례를 범한 가운데 찾아뵌 것은 저의 여식 혼사 문제로 인해! 했던가? 도무지 기억이 없다. 할머니가 어디서부터 어떤 말부터 해야 할까 전전긍긍하는데

“행랑어멈! 천금같이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정성으로 다과상을 내고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게!”하더니 할머니를 향해

“자~ 자 이쪽 아래쪽으로 내려서 편하게 앉으시죠!”하며 두툼한 방석을 내밀며 앉기를 권한다. 할머니가 마님이 내민 방석을 보고 있노라니 향후 사태를 짐작할 수가 없어 가슴만 두 근 반 세 근 반으로 방망이질이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이런 경우 마님은 대청마루로 높이서고 할머니는 마당에 꿇어서는 손이 발이 되고, 얼굴이라곤 눈물 콧물을 분간 못해 범벅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관례로 예사란다. 한데 방석을 건네고 마주하여 앉자니! 할머니가 어떻게 지체 높으신 마님이랑 감히 한자리에 그것도 동석이라니 하고 몸 둘 바를 몰라 양손을 맞잡아 어물어물 망설이는데

“그렇게 계속 서서만 계실 거에요! 이리로 내려앉으셔야 의논이라도 하지요!”하는데 할머니도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다 여겼다. 이왕지사 까무러질 때 까무러지더라도 결판을 낼 요량으로 나선 걸음이다 싶어

“예~ 그러면 염치 불고 사양치 않겠습니다!”하고는 털썩 주저앉는다. 마님의 배려에 사양지심으로 더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또 이렇게 마냥 서서는 의논 자체가 불가능하다 여긴 때문이기도 했다. 마침내 생면부지의 할머니 둘이서 마주하고 앉았다. 한 사람은 아들을 통해 며느리를 보고자 함이요, 한 사람은 영감의 웃방애기란 복병을 품은 딸을 통해 사위를 보고자는 간절함으로 마주하고 앉았다. 할머니가 먼저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어 사주단자를 고이 내려놓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조심스레 말한다. 그 모습이 흡사 호랑이 선생님 앞에 숙제 검사를 앞둔 코흘리개의 초등학생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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