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83)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8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9.26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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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라들이야 좀 울면 또 어떠냐! 목청만 좋아진다더라
영감의 눈길은 여전히 산모퉁이 고갯마루에 머물러 있다
딸내미가 떠난 방구석으로 어둠만 차분하게 내려앉았는데 더없이 고즈넉하다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제 놈이 사대 독자면 사대 독자지! 사대 독자가 무슨 벼슬이라도 된다든! 애~야! 너는 못 본 척 먹던 밥이나 마저 먹어라!”한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로 부터 손자 '이산(후일 정조임금)'를 얻은 영조임금의 마음 같이 여유가 있어 보인다. 넌지시 시아버지를 돌아보며

“사돈께서는 이 애 이름이 뭐라 지었다고 하던가요?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요?”

“글쎄 아직 본 이름은 없고 임시방편으로, 부르기 쉽게 그냥 ‘금동’이라 부른다고 하다던 구만! 금처럼 귀하게 크라고 그렇게 부른다나 뭐라나!”

“금동이~! 좋은 예명이네요! 그럼 나도 금동이라 부르면 되겠네요!”하더니

“어디 보자 우리 금동이! 우리 똥강아지 금동이! 배가 고파서 우는 게냐! 그래도 어떡하나 네 어미는 시방 밥을 먹는 중인데! 그래~ 그래도 조금만 참자! 참으려무나! 그리고 네 외할아버지의 염원처럼 금처럼 귀하게 크렴, 병치레 말고 튼튼하게 크렴, 그~럼! 그럼 사대 독자인데 금처럼 귀하게, 건강하게 자라야지! 암~ 암!”하더니 며느리를 돌아보더니

“얼라들이야 좀 울면 또 어떠냐! 목청만 좋아진다더라! 배가 좀 곯은 다고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금이야 옥이야, 오냐오냐 키워보았자 제 애비를 닮아 처자식 귀한 줄 몰라 등 한 시 할 참이면 이참에 아주 모질게 키우거라!”하는데 분명 전날의 시어머니는 아니다. 못 된 년이 아기를 안고 집으로 왔을 때만 해도 남자는 그럴 수 있다고, 있는 재산에 소실이든 첩이든 들일 수도 있다고, 남자가 밖으로 나돌다 보면 생각지도 않게 실수를 할 수 있다며 철저하게 아들 편에 서서 역성만 들던 시어머니다. 처녀의 억장이 무너지듯 말 듯 태연자약하게 두둔하던 그런 시어머니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똥도 버리기 아깝다고 두둔하던 그런 어미가!, 콩깍지가 겹겹이 씐 그런 시어머니는 진정 아니었다. 대물림으로 끼어오던 금반지를 빼는 순간 모든 짐을 내려놓은 것으로 보였다. 지금에 와서 보건대 오냐오냐 역성으로 키우고 살아온 그런 날들이 잘 못 된 삶이라고 은근하게 자인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돌변한 어머니를 대하는 아들은 그저 무안하고 부끄러운 듯 얼굴만 벌겋게 붉혀 밥상머리에 앉았다. 말을 잊고는 죄인인 듯 고개를 떨궈있다. 그러던 차에 아기가 운다. 슬쩍 고개를 들어 처녀와 아기를 두고 곁눈으로 일별하더니 금세 꽁하던 마음이 풀어졌는지 입이 함지박 하게 벌어진다.

어느새 어머니가 일어서고 부인이 일어서는 것으로 보아 밥상을 치우는 모양이다. 전날 같으면 그러게나 말거나 하염없이 늑장을 부렸을 터이다. 남자가 부엌에 들면 불알이 떨어진다는 속설을 철칙으로 믿고, 밥투정에 반찬 투정을 핑계로, 부엌일은 전적으로 여자가 하는 일이라며 무슨 자랑거리 인양 일삼아 노래를 불러오던 그다. 기분에 따라 상을 몇 번에 걸쳐 차리든 내 알 바가 아니라는 듯 매미가 허물을 벗은 모양으로 덩그렇게 놓아두는 것이 상시의 행동이다. 한데 부인을 두고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는 듯 수저의 놀림이 빨라진다. 고봉 밥숟가락에 촌각을 다투어 저녁을 끝낸다. 시키지도 않았건만 제 알아 밥상을 부엌으로 내간다.

한편 축제가 끝난 공연장처럼 사람들이 죄다 빠져나간 모양으로 더없이 쓸쓸한 집안이다. 소슬바람마저 을씨년스러운 가운데 영감은 마당 한가운데서 망부석 모양으로 멍하니 섰다. 그즈음 고갯마루로 붉은 노을이 스멀스멀 깃들어 오건 만 영감의 눈길은 여전히 산모퉁이 고갯마루에 머물러 있다. 시간에 따라 멍한 눈길 위로 잔잔하게 이슬이 맺히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눈물방울이 되어 양 볼을 타고 흐른다. 차가운 바람결이 양 볼 위의 눈물 자국을 은근슬쩍 훔쳐 올 때 서야 영감은 몸을 부르르 떨어 길고 긴 단꿈에서 깬 듯

“허~허 평생을 들어 애물단지같이 속을 썩이더니만 그년 고거 한번 속 시원하게 잘 갔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 시원하게 잘 갔다. 오늘 밤부터는 베개를 높이 하여 두 다리 쭉 뻗고 자겠구나! 근데 무슨 연후로 가슴이 텅텅 빈 듯 허허로울꼬? 이~거이! 당체 허전해서 안 되겠구먼! 여~보! 임자 이참에 나~ 술이나 한 잔 할까 보네! 이 좋은 날 어째 술 한 잔 없이 가만있을 수 있겠소!”하며 그동안 일절 입에도 대지 않던 술을 입에 담아 삽짝으로 향하자

“그래요! 그라이소! 그래도 조심은 하소! 술과 매에는 장사 없다고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권하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자시 질랑 말고, 사양도 해가며 적당히 드이소! 전날 맨크로 자빠지질랑 말고요~!”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기분도 그렇잖은데! 오늘 술자리는 술병과 안주 접시를 헤아리는 추렴같은 것은 집어치우고 전적으로 당신이 책임지소! 호명양반을 비롯하여 그동안 동네 사람들을 들어 신세 진 것도 만만찮고...! 빚잔치를 연 셈 치고, 돈이야 얼마를 들여도 좋은데 약주랑은 진짜로 많이 잡수시지 마소! 이 마당에 당신이 어떻게 되고나면...!, 명년 삼월 삼짇날에 들어 진달래 온 산비알(‘산비탈’의 방언)로 벌겋게 흐드러지고, 강남 제비 돌아오는 봄을 맞아 ‘춘사만사택’이라고 논뙈기마다 물은 누가 잡아서 써레질하고, 땅뙈기마다 쟁기질은 누가 있어서 합니까? 두엄을 누가 쇠스랑으로 뒤집고, 퇴비는 누가 내고, 농사는 또 누가 짓습니까? 그라고 말입니더! 훗날 가~가 사우쟁이와 더불어 외손자를 줄줄이 달아서 오는 경사스러운 날을 맞아서는 또 누가 있어 반겨주고 술 대거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하며 장모자리는 전에 없던 말을 입에 올려 당부다.

“자빠지기는 내가 언제 자빠졌다고 저 여편네는 근자에 들어 입만 떼면 자빠졌다고 저 난리네~ 알았네! 알았어! 인자 그 이야길랑 그만하소!”하는 건성 대답으로 영감이 떠나자 더없이 쓸쓸한 집안이다. 금방이라도 외손자의 울음소리가 들릴 듯하고, 지지리 궁상인 딸내미가 장지문을 활짝 열고서는

“엄마 누가 왔수!”하고 묻는 듯도 하다. 새삼 떠나버린 딸내미가 그리워 방안에 들자 어두컴컴한 방구석으로 외손자를 끌어안고는 귀신처럼 방구석에 쭈그려 앉았던 딸내미가 벌떡 일어나는 듯도 하다. 하지만 딸내미가 떠난 방구석으로 어둠만 차분하게 내려앉았는데 더없이 고즈넉하다.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슬슬 쓸어서 딸내미의 흔적을 찾아가는 손끝으로 미지근한 온기만 희미하게 가슴으로 올라와 어릴 뿐이다. 거짓말처럼 훌쩍 떠나간 딸내미가 얼마나 야무지게 몽당비로 쓸고 또 쓸었는지 까칠까칠하여 잡힐 법도 한 검불 한 오라기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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