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79)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79)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8.2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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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스러운 마귀의 혼령에 빙의가 되었나 봐요
아직도 거지소굴 같고 쑤세망태같은 이 집구석에 일말이라도 미련이라도 남아있는 게니
수고 값에 오늘 저녁 대폿값이라며 고의춤에 꼭꼭 숨겨 갈무리했던 전대까지 아낌없이 푼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죽지 않고 살아 줘서 더없이 감사하고 고마워요! 사랑을 배신한 못난 남정네의 구차한 변명 같지만 그날은 못된 귀신에 정신이 홀렸었나 봐요! 요사스러운 마귀의 혼령에 빙의가 되었나 봐요! 한데 그새 이렇게나 여위었다니! 우유 빛 볼 살이 빠져내려 까무잡잡하게 변해버린 여보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네요! 뼈만 남은 듯 앙상한 손가락 마디마디에 가슴이 아려요! 어깨를 감싸 안으면 바스러질까 두려워요! 어째 이렇게도 요사스럽고 방정맞을까요? 이래서는 안 되는데...! 사람이 덜 되어서 그런가 봐요? 여윈 여보를 보고 있자니 장인장모님이 원망스럽네요!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이기적인가요? 알아요! 이 모두가 다 내 죄인데도 장인장모님을 원망하다니요! 그래요 다 받아 줄 깨요! 못남 남정네를 남편이라 만나 탓에 뿌리가 끊어져 비비각시 신세에 부평초처럼 떠돌았건만 얼마나 장한 일을 했는데요! 손이 귀한 우리 집안을 위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데...! 여보가 원한다면 이 마당에 목숨인들 어찌 아까울 까요! 지난날에는 철이 없어 미처 몰랐지만 이제 여보가 없다면 나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나아가 내 생에 여자라고는 여보하나 뿐이란 것도 알았어요! 이 마당에 무엇을 주저하고 망설일 까요? 여보의 가슴처럼 바닷물이 되어서라도 감싸 안아 지켜줄게요! 지금껏 여보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해서 진정으로 미안하오! 이제부터는 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서 지켜드리리다! 이런 나를 어여삐 여겨 지난번처럼 밀어내지 마시고 오늘은 진정으로 나를 따라서 집으로 돌아갑시다. 좌사우상(左思右想)말고 갑시다. 이렇게 두 손 모아 간청하고 애원하오!

알아요! 당신이 얼마나 저를 애틋하게 여겨 사랑하는지를...! 그 애절한 눈빛만 보아도 충분히 알겠어요! 하믄요 따라가야지요! 당연히 가야지요! 아버님께서 이렇게나 어려운 발걸음을 하시고 어머님께서는 목숨 줄 인양, 분신처럼 여겨 아끼시던 금가락지를 지지리도 못난 이 며느리를 맞이하고자 선뜻 보내주셨는데요! 어머님의 자자구구한 잔소리가 오늘따라 사무쳐서 노랫가락으로 그리워요! 두 귀를 활짝 열어서 숨소리마저 듣고 싶어요! 초례청을 기점으로 손톱으로 봉숭아꽃물 들이던 어린 시절은 흘러갔나 봐요! 언제부턴가 정든 방이 낯설고,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하여 뛰어놀던 고샅길이 타향을 걷는 듯 외로워요! 달 속에 토끼가 산다고 아득바득 우기던 시절도 이제는 옛날이 되었나 봐요! 아버지가 무섭고 어머니가 두려워요!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푹신하게 요를 깔고 솜을 두툼하게 누빈 이불속에 들건만 부엌을 잠자리로 구석으로 깐 짚단만 못하네요! 가야지요! 내 가족이 기다리고 내 집이 있는 그곳으로 가야지요! 이날을 얼마나 학수고대, 일구월심으로 기다렸는데요! 태산이 무너지는 밑이라도, 용암이 들끓는 화구속이라 해도 당신이 가시는 갈이라면 우리 아기랑 함께하여 웃으며 따라갈 거예요!

고마워요! 이제야 진짜 내 사랑을 찾은 기분 이예요! 가족이란 진정한 의미를 알 것 같아요! 여보가, 아들이 내 분신임을 알았어요!

저도 당신이...! 그래요! 고마워요! 하지만 남들의 눈에 보이는 순애보 같은 사랑은 싫어요! 아무리 아름답다고 지고지순한 사랑이라 해도 견우와 직녀와 같은 빛바랜 사랑은 진정으로 싫어요! 별빛처럼 떨어져서 빛나는 사랑이라면 이대로 여기에 머무르고 싶네요! 오늘 이후 두 번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나는 어떻게 살든 그거 하나면 돼요! 초근목피라도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당신과 우리아기랑 함께 한다면 만반진찬, 산해진미랑 다름없을 거예요! 사흘 피죽이라도 꿀처럼 달달할 거여요! 진정으로 행복할 거예요!

그래요 우리 다시 헤어지지 말아요! 지금껏 이 못난 놈의 행동거지로 보아 거짓부렁 같지만 나도 하루가 하루같이 여보를 잊은 적이 없었다오! 늘 가슴속으로는 여보가 생시처럼 살아 있었다오! 숨 쉬고 있었다오!

그렇게 둘은 애틋한 눈동자를 교환하면서 망부석이라도 된 듯 마주하여 바라보고 있다. 언제까지나 눈물 글썽이는 애잔한 눈동자를 들어 서로의 모습을 아로새길 작정 같았다. 보다 못한 시아버지가

“어~어~흠!”하고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둘은 달디 단 봄꿈을 깬 듯 정신을 차린다. 마침내 서방님의 손으로부터 시어머니의 금가락지가 처녀의 가느다란 약지에 끼워지자 처녀는 벌겋게 충혈 된 눈을 들어 아버지를 돌아다보며 이제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고 눈짓으로 묻는 것 같았다.

“이런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이 판국에 망설일게 뭐에 있나! 네 시아버지께서 만사를 제쳐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데...! 내 지난날을 생각하면 어림없지만...! 이제 내 마음 가는대로 하려므냐!”하며 두말없이 따라나서라는 듯 은근하게 눈짓으로 재촉이다. 그런 부녀의 모습을 여태껏 말없이 지켜보던 친정어머니가

“이것아 뭘 꾸물거리고 서있니! 아직도 거지소굴 같고 쑤세망태(수세미 뭉치처럼 어지럽다)같은 이 집구석에 일말이라도 미련이라도 남아있는 게니? 아서라~ 지금껏 살아보고도 그러나~ 아비라고, 어미라고 말이야 그렇지...! 정이라곤 문지방에 떨어진 밥풀떼기만도 못해 벼룩이도 낯짝이 부끄럽다 하겠다. 이참에 두말 말고 따라나서 거라! 어~여! 준비를...! 채비를 않고!”하며 재촉 하는데 지금껏 강보에 싸여 잠잠하던 아기가 ‘으~ 앙!’하고 운다. 그제야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은 듯 장모자리가 꿇어앉은 사위를 보고는

“순둥이 우리 외손자 이놈도 이제야 제 할아버지가...! 제 아비가 온 것을 아는 갑네! 자네 자슥일세! 어디 한번 안아나 보게!”하며 건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아버지가 맞은편에 앉은 사돈을 바라보며

“우리 집안 사대독자인 저놈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하고 물어 올 때 영감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말을 더듬어

“이~ 이름은 무슨? 미~ 미거하고 까~ 까막눈에 우리같이 처~ 천한 것들이...! 어~ 어찌 양반 댁의 귀하고도 귀~ 귀~ 귀한 사대독자의 이름을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지~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 그냥 금처럼 귀하게 크라는 뜻에서 그~ 금동이라 부르고 있었습죠!”하며 무안하고 부끄럽다는 듯 양손을 맞잡아 비빈다.

“사돈께서는 무슨 그런 겸양의 말씀을...!”하고 말끝을 흐린 시아버지가 더 늦기 전에 재를 넘어야 한다는 재촉에 따라 모두들 서두른다. 처녀는 친정 부모님을 나란히 모셔 나부죽이 큰절을 올려 작별인사에 가름하고, 사위는 한껏 날아갈 기분인지 엄벙덤벙 아무데나 대놓고 절이다. 기둥이고 쇠말뚝이고 가리질 않는다. 칠푼이 팔푼이처럼 허둥대다가는 가마꾼을 둘러보고는 우야든지 살살, 멀미 안 나게, 머리 어지럽지 않게 잘 모셔야한다며 당부에 당부를 거듭한다. 그러고도 뭔가 미흡한지 수고 값에 오늘 저녁 대폿값이라며 고의춤에 꼭꼭 숨겨 갈무리했던 전대까지 아낌없이 푼다. 마침내 양가 사돈이 이별을 앞두고 맞절로 예를 표하는 데 시아버지가 품속으로부터 붉은 글씨로 ‘福’자가 큼지막하게 아로새긴 금낭 하나를 꺼내더니

“사돈 내외 분 내가 이런다고 고깝게(섭섭하고 야속한 느낌이 있다.)생각하지 마시고 허물없이 받아주시오! 저 애 시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 나름대로 뜻도 있고...! 또 저 애 시집을 보낼 때 이리저리 융통한 빚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리하와 지난날에 며느리를 두고 지은 죄를 너그러이 사해 주십사하는 뜻에서 진심으로 드리는 겁니다. 약소하나마 성의껏 준비 했습니다. 부디 노여워 마십시오!”하며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청하자 영감은 이 무슨 경우에 어긋나는 짓으로 가당치가 않다며 펄쩍뛰며 팔을 휘휘 내둘러 보지만

“따지고 보면 사돈댁의 허물이 저희 집안의 허물이나 마찬가지로 친정이 편해야 우리 며늘아가도 장차 마음이 편할 겁니다”하는 말에 순순히 받아들인다. 아버지가 시아버지의 호의를 그저 감사하고 고맙다 하여 받아들일 적에 그새 날아갈 듯 산뜻한 꽃신으로 갈아 신은 처녀는 성큼 마당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한발 두발 가마를 향하는 처녀는 현재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기구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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