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84)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84)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10.0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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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산중의 두메산골이라 쌀 서 말도 못 먹고 떠나는 친정인데
30세 후반 줄에 접어드는 어느 홀아비의 후처로 들어간다는 소식이다
정이 안 되겠다면 후일 저승에 들어 용서를 빌겠습니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평소 손끝 맵기가 차돌멩이 같더니만! ‘고진감래’라고, 이제야 제대로 된 복이 터진 게지! 그럼~ 그럼!”하고 중얼거리는 장모자리의 목덜미로 불어 드는 바람결이 외손자가 추울까? 행여 고뿔이라도 들까 싶어 아궁이가 미어터지도록 지핀 군불이건만 서늘하고 썰렁하기는 초겨울에 비견하여 마찬가지다. 든 자리는 표시가 안나도 난 자리는 표시가 난다고 기약 없이 떠나버린 딸이 그새 서럽도록 그립다. 날이면 날마다 방구석에서 민주를 대던 딸내미건만 떠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환영인 듯, 생시인 듯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모습으로 삼삼하다. 그리움이 가슴으로 내려앉아 멍청하게 퍼질러 앉았는데 괜한 눈물이 콧물 인양 싶어 훌쩍거린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줄을 진즉에 알았다면

“앞도 산이고 뒤쪽도 산, 첩첩산중의 두메산골이라 쌀 서 말도 못 먹고 떠나는 친정인데...!, 있는 동안 따뜻하게 짓은 이밥 한 그릇에 돼지비계로 끓이든 말든 고깃국물 한 방울이라도 더 먹여 보낼걸, 밥술 위에 가시를 발린 고깃점이라도 한점 더 얹어 줄걸!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 줄걸...!”하는 장모자리는 한눈에도 잘록해진 딸내미의 허리가 새삼 눈에 밟히는 듯, 지난날의 회한이 가슴 저 밑으로부터 울컥울컥 오르는지

“옛말 하나 틀리지 않아!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에~이! 모진 세월 같으니! 어째서 아비어미를 얼굴도 못 들게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너만 태평으로 가느냐!”하고 사방을 둘러보는데 가슴이 통째로 비어버린 듯 바람길만 숭숭하다. 평소 제 자리 하나 못 지키는 지지리 못난 년이라고, 애물단지 같은 년이라고, 바보 멍텅구리 같은 딸년이라고, 남들처럼 약삭빠르지도, 모질지도 못하다며 틈틈이 구박하던 날들이 자잘한 파편이 되어 가슴속으로 알알이 들어와 박힌다. 그 날수에 아비어미의 지청구 같은 잔소리를 묵묵히 고개 숙여 듣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싶었다. 우는 아이를 끌어안고는 속으로 얼마나 진한 눈물을 삼켰을까 싶었다.

외손자를 부둥켜안아 눈만 빠끔하게, 오도카니 딸내미가 앉았던 자리를 재차 손바닥으로 슬금슬금 쓰다듬는데 급기야 서러움에 겨운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흐른다. 딸내미가 남기고 간 체취를 맡아 한참을 넋을 놓아 앉았던 장모자리가 홀연히 방문을 열더니

“이런~ 이~ 인정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쥐방울만큼도 없는 영감탱이가 어째 같이 가잔 말 한마디 없이...! 나만 내버려 두고 저 혼자 가기는 어딜 간다고 그래요!”하고 중얼거리더니 엄벙덤벙 댓돌 위에서 엎어지고 자빠진 고무신짝을 발길로 더듬어 저쪽을 이쪽으로, 이쪽을 저쪽으로, 오른쪽을 왼쪽으로, 왼쪽을 오른쪽으로 꿰어 신기가 바쁘게 삽짝을 나서며

“이런 호랑말코 같은 영감탱구야~ 당신만 외롭고 허전하다고 한잔 걸치면 다요! 부부는 부창부수라고 내 구멍이 뚫린 듯 가슴의 허전하기가 영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는 갑소! 나도 술 한 잔 안 하고는 진정 눈물이 앞을 질척거려 못살 것 같소! 네게도 쌀알 동동 뜨는 동동주 일랑 한 사발 가득 따라 주셔야지요!”하며 영감을 찾는 발걸음이 고샅에서 살랑살랑 가볍다. 술이 익어가는 삽짝 너머로 추풍을 거느려 사라진다. 머릿속으로는 오늘 저녁 사돈댁에서 보낸 정성을 빌어 죽어지낸 세월을 보상받으리란 생각에 한껏 들떠 있다. 빚쟁이란 꼬리표를 오늘로써 떼어버린다는 생각에 새 생명을 얻은 듯 세상이 아름답기만 하다. 노을빛을 받은 낙엽들이 바람결을 타고는 노란 별로, 은빛 별로, 붉은 별로 눈앞에서 황홀하다.

그즈음 아기를 갖지 못해 친정으로 쫓겨 온 처녀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시아버지와 신랑을 따라서 시집으로 들어간 처녀를 부러운 듯 바라다보다가 애꿎은 매파를 다그쳐 후처나, 첩의 자리로 마땅한 곳을 수소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시집을 올 즈음 강 건넌 마을에 사는 30대 후반 줄에 접어드는 어느 홀아비의 후처로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 수록 홀아비 신세로 가시를 품은 듯 까다로운 한 성깔이 있다는 소문이 동네를 들어 암암히 떠돌았지만 이미 콩깍지가 눈꺼풀에 내려앉은 처녀는 문제 될 것이 없단다. 만사를 제쳐 팔자를 고치려 드는 처녀는 모주꾼에 주정뱅이에 어쩌다 손찌검을 하다손치더라도 상관없단다. 골패와 색을 밝히지는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처녀는 자신조차 흠결이 깊다며 발 벗고 나서는 바람에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희망도 꿈도 없는 친정살이에 진력이 난 처녀는 행복을 찾든 불행의 굴레에 허덕이든 스스로 미래를 설계해보고 싶단다. 설령 그조차 분에 겨워 물거품이고, 불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내 집이라 여긴 보금자리로 찾고 싶단다.

삿갓배미일 망정 가진 평수의 전답으로 산 입에 풀칠만 하면 족하다는 데는 부모도 선선히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두고 옆에 끼고 살 것도 아닌데 딸의 뜻을 존중하여 따르기로 한 것이다.

집의 앞뒤 양옆으로 빠끔한 빈틈없이 채전을 일구고, 손바닥만 한 터앝으론 화초 대신으로 파 뿌리라도 심어 틈틈이 지심을 잡으면 문제없다는 데는 두 손 두 발을 들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구박으로 일관하는 징글징글한 친정이란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싸구려에 팔리듯 팔자를 고쳐버린 격이 되어버렸다. 혼수래야 둘이서 덮고 잘 무명이불 한 채와 베개 두 개, 곧장 입을 옷가지 두어 벌, 밥 식기 두서너 개, 수저 두벌이 혼수품의 거의 전부였다. 팔려가는 듯 재혼하는 주제에 초례청은 애당초 엄두를 못 냈다.

재혼에 대한 별다른 절차 없이 정해진 날에 즈음하여 ‘이가 서말’이라는 홀아비의 신랑이 하룻밤을 묵어가는 것으로 대신이지만 혼례에 임하는 마음만은 화촉성전(華燭盛典)과 다름없었다. 저녁상을 물리고는 개다리소반에 찌개 그릇과 다름없는 신선로를 중심으로 육전과 각종 과일을 깎아서 곁들여 차린 술상에서 장인자리가 먼저 잔을 들었다. 손윗사람으로 사위에게 술잔을 건네며

“이보게 윤서방 우리 딸, 저 불쌍하고 미욱한 내 딸년일망정 자네가 속정으로 품어 혹여 잘 잘못이 더러 있더라도 너그러이 잘 부탁을 함세!”할 때 처녀의 어머니는 옆에 앉은 처녀의 등을 쓰다듬다가는 어느 순간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간혹 콧물을 훌쩍거리며 애잔한 눈으로 그윽하게 바라보는 중에 옷고름을 접어 눈두덩을 감싸내려 인중을 슬쩍슬쩍 훔치는데

“아무렴요!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어요! 공민왕의 노국공주도 아니고 지독한 난산으로 삼일 밤낮 동안 죽어라! 몸을 뒤틀다가 눈을 허옇게 뒤집더니 삶의 끝을 놓아 버리잖아요! 그 가련하고 애달픈 모습이 잊을 만하면 생각이 나는데...! 그때는 저도 세상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하고는 고개를 떨궈 술잔을 내려다보는데 그날의 회한이 밀물처럼 밀려오는지 가늘게 어깨가 떨려 보인다. 잠시 숙연한 시간이 흘러

“밤이면 밤마다 눈앞으로 달덩이같이 환하게 웃어주던 모습이, 땀을 뒤범벅으로 고통에 일그러져 입을 앙다문 모습이 어른거리는데...! 애당초 평생을 홀로 살리라 작정했습니다. 한데 이런 나에게도, 과분하게도 이런 복된 날이 찾아왔네요! 이제는 잊어야지요! 언제까지나 나 자신을 과거에 묶어 둘 수는 없잖아요! 나보다도 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앞으로는 그렇게 살 겁니다. 먼저 간 그 사람에게는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그녀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워낙에 착한 사람이라 이쯤에서 등을 떠밀어 행복을 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정이 안 되겠다면 후일 저승에 들어 용서를 빌겠습니다”하더니 눈물기 어린 눈으로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작심을 한 듯

“내게 주어진 늦은 복덩이로 여겨 꽃을 본 듯 보듬어서 잘 살아야지요! 혼자 몸도 아닌, 새장가를 든 마당에 지난 세월을 보상받으려면 열심히 살아야지요! 미거한 이 몸을 믿고 귀하게 키워온 따님을 선뜻 내어 주셨는데...! 장인어른께는 절대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각별하게 신경을 써서 잘 살겠습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저란 인간은 새롭게 태어날 겁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하며 물끄러미 손에 든 잔을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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