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85)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85)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10.10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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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저도 없어 마음이 바쁘면 꽁무니를 하늘로 치든 병나발
서까래의 수를 세고, 논밭을 마지기로 들먹이고, 밥그릇과 수저를 들먹인다
술이 쓰고 독했는지 아미 주위로 가는 주름이 잡히고 눈꼬리가 위로 치솟는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엄지와 검지 사이로 도자기 잔 가득하게 들어차 말갛게 찰랑거리는 한 잔의 술을 처연하게 내려다보는 얼굴로 드러나는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흔하게 대하는 단순한 술 한잔이건만 이 한잔의 의미를 생각하자니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다. 그동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술잔을 접했다. 오늘도 그런 술잔 중의 한잔이라 생각하기에는 마음가짐이 다른 모양이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들이 장난삼아 건네는 술에 취해 홍시처럼 얼굴을 붉혔다. 쓴 듯 달짝지근하고 오묘한 색다른 맛으로 입이 길들어진 탓에 술 심부름으로 도가를 오가는 중 술주전자를 입을 댔다가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쥐방울만 한 놈이 맹랑하기가 벌써!’하는 아버지의 호통 아래 회초리가 부상으로 아랫도리에서 춤췄다. 종아리가 벌겋게 붉어지도록 혼쭐이 났다. 약관의 나이를 지나면서는 희로애락에 따라 하늘의 별을 헤아리듯 많은 술잔을 잡았다. 막걸리는 큼지막한 대접에, 탁배기는 지렁이가 허물을 벗어서 붙인 손톱을 소똥으로 씻고 쇠비름 진액에 손톱 밑이 까매진 엄지손가락을 흠뻑 눌러 담근 국그릇에, 입안서 화끈한 소주는 유리잔, 정종이나 법주는 도자기 잔, 쌀알 동동 뜨는 동동주는 사발 잔, 소 잔등(‘등’의 비표준어)에 올라타거나 마상(馬上)에는 각배(角杯), 이 술 저 술로 술 욕심이 넘쳐날 땐 계영배(戒盈杯), 돈 많은 부자만 마신다는 보리술엔 유리 글라스, 산삼, 더덕, 산도라지, 머루나 다래 등 담금주는 옥배나 종지, 잘 익은 포도주나 말로만 들어오던 와인에는 와인 전용 글라스, 이도 저도 없어 마음이 바쁘면 꽁무니를 하늘로 치든 병나발 등등, 그중 가장 아름답게 잡은 술잔의 기억으로는 아무래도 초례청에서 새신부와 나눈 놋그릇 잔의 합환주다. 아궁이에서 퍼낸 재를 가는모래에 섞어서는 볏짚을 수세미로 삼아 뽀드득뽀드득 문질러 닦아 윤슬이 빛나는 술잔에는 마냥 행복했다. 입술을 적시듯 신부의 앵두 빛 입술 위에 살짝 머물렀다가 되돌아오는 잔에는 황홀감이 넘쳤다. 꽃 같은 신부와 함께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붕붕 떠서 구름 위를 거닐고 기분은 민들레 홀씨처럼 하늘을 가운데를 펄펄 날아다녔다. 한데 그날을 들어 백년가약을 맺었던 첫 순정의 어여쁜 신부는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는지 지금 이 자리에 없다.

한때는 하늘을 우러러 페시미즘 빠졌다. 하늘의 안배가 뭐 이래! 쳐다보기조차 싫어 어깨가 휘는 줄 모르고 땅만 굽어보며 다녔다. 썰렁한 방구석이 싫다는 핑계 삼아 술기운에 기대어 세월을 잊었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술기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 살든 관심을 두는 이도 없는 까닭에 가혹 한뎃잠도 마다하지 않고 더러 잤다. 남들은 동네 강아지들이 오줌똥을 싸서 붙이는 통에 더럽다고 피해 가는 전봇대나 담장 아래를 몸 뉠 안방으로 삼았다. 그런 날에는 뼛골이 시려 황천길이 눈앞이라 여겨졌다. 게다가 사흘이 멀다 술타령으로 수중엔 가진 돈이 마르다 보니 의복은 단벌에 폐포파립으로 허술해졌다. 술판으로 시일이 겹치고 겹치는 중에 몸은 장작개비처럼 말라간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처럼 뜻 없이 지낸 지난 허송세월이 개탄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시집을 오겠다는 색시가 있단다. 가진 것이라곤 꼴난(‘형편없다’의 방언)불알 두 쪽밖에 없는 홀아비에게 무얼 원하고 또 바란다고? 처음에는 정신머리가 안드로메다란 성운으로 날아간 여자인 듯싶었다.

술잔 한잔의 의미를 재차 가슴으로 받아들여 되새긴다. 띠동갑을 두 해나 더 지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이를 떠나 동등한 입장에서 은혜하고 존중하여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이다.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는 허황한 언약을 떠나 오일장을 맞아서는 살림살이에 덧붙여 참빗도 사고, 꽃신도 사고, 비녀나 장신구 등을 사서 진정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지아비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고! 앞으로 태어날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비로 살아가겠노라고! 이마의 주름살이 굵어질수록 깊은 정을 나누겠노라고, 두 팔 간격만큼 비켜서 앉아 수줍게 고개 숙인 신부를 대신하여 술잔을 두고 맹세다. 하지만 덜렁 마시기엔 여전히 부담스럽다. 어린애들 장난처럼 편연(片戀)으로 여기기엔 황혼에 가까워진 늦은 나이에 또 이런 잔이라니! 첫 장가 때에 맞이한 술잔이 꿈과 희망과 행복이 하모니를 이른 황홀 그 자체였다면 이번 잔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짐이 어깨를 무게감 있게 짓누른다. 행복보다는 현실을 따따부따 따지려고만 든다. 이때까지 벌어 놓은 것이 무엇이냐며 묻는다. 삼시 세 때를 들어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가진 재산은 얼마냐며 서까래의 수를 세고, 논밭을 마지기로 들먹이고, 밥그릇과 수저를 들먹인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현실을 받아들이는 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마침내 작심으로 진정되었다는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몸을 비틀어 단숨에 잔 비우더니 장인자리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빈 잔을 건넨다. 손으로 술잔의 언저리를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닦아서 건넨다. 그 모습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장모자리는 입에 발린 소리라도 기분이 좋은지!

“재물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사람만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히고 진실하면 그만이지! 암 그렇지! 소문이란 것도 다 헛것으로 입이 방정이지! 내 사위에서가 아니라 눈앞에서 직접 겪어보니 마음이 비단결같이 곱고 여린 순정파에 예의범절 반듯한 사람이먼!”하고 속으로 흐뭇해하는 가운데 딸내미를 돌아보며

“이것아 내일로 시집으로 들어가면 우야든지 아기부터 가지거라! 윤서방이 원하든 아니 원하든...!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아기를 갖는다지만...! 윤서방 나이도 이제는 만만치가 않고...! 이 어미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듣지 말고 명심하거라!”하며 딸의 손을 잡을 적에 처녀는 곁눈질로 윤서방을 훔쳐보며 얼굴을 붉힌다. 그즈음 빈 술잔을 건네받으려던 영감이 무슨 생각에선지

“이보게 윤서방! 그 잔일랑 나보다는 자네 장모에게도 한잔 권하게!”하는데 윤서방의 눈이 끔벅하는가 싶더니 무섭게 방향을 틀어 장모자리의 눈앞으로 다가들자 장모자리는 엉겁결에

“이게 네 잔인가? 고맙네 윤서방! 그럼 사양 않겠네! 대신 나는 술을 잘못하네! 조금만 아니 반 잔만 따르시게!”하는 장모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받아서 한입에 홀짝 털어 넣고는

“어떤가? 자네 색시에게도 한잔 권하는게...!”하며 줄 창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딸내미를 가리킨다. 어머니의 말에 깜짝 놀란 처녀가 얼굴을 바짝 들어서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모습이 흡사 놀란 토끼 모양 같았고 얼굴은 술 바보가 밀밭을 지나온 듯 홍당무처럼 벌겋게 몸 둘 바를 몰라 좌불안석이다. 처녀와 같아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는 윤서방이

“그~ 그래요~ 예~ 예! 장모님!”하더니 처녀를 돌아보며

“이~ 이것 봐요~ 이~ 이봐요 새~ 새~ 색시요~ 이~ 이~ 이 잔을!”하며 잔을 건네는데 낼 모래가 40줄에 접어드는 홀아비도 처녀와 같이 얼굴빛이 가을철 홍단풍처럼 빨갛다. 얼굴을 똑바로 보질 못해 얼쯤해 하는 둘의 모습이 소꿉장난에 빠진 신랑각시놀음만 같다. 눈가로 보일 듯 말듯 잔주름이 자잘한 딸내미나 이마의 주름 골이 깊어가는 사위나 뚬벅-뚬벅(‘듬성듬성’의 방언)내외하는 모습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보를 간신히 억눌러 참는다. 이윽고 우둠지를 경계로 찰랑찰랑 잔이 채워지자 한층 눈을 동그랗게 떠 늙은 서방을 바라보던 처녀는 왼팔 색동저고리의 옷소매로 잔을 감싸서 살며시 가린다. 처녀도 이미 이 잔 한잔이 가지는 무게의 경중은 알고 있었다. 한 방울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버킷리스트로 품은 미래가 차고 넘친다. 따라서 이 잔 한 잔을 온전하게 비워야만 독수공방의 과부 신세를 면한다 생각했는지 사양 없이 입술을 술잔에 적신다. 처음 한 모금에는 술이 쓰고 독했는지 아미 주위로 가는 주름이 잡히고 눈꼬리가 위로 치솟는다. 하지만 혼자서 지낸 외롭고도 서러운 세월이 진저리쳐지는지 능구렁이가 알을 녹이듯 싫다 않고 홀짝거리더니 이내 빈 잔이다. 사양도 없이 불식간 비어 버린 빈 잔이 감쳐진 마음만 같아 부끄러운 듯 잔 언저리를 옷소매로 정성 들여 닦아서는 앞으로 쭉 내밀더니 서리맞은 콩잎처럼 고개를 떨군다. 그러고는 다시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불현듯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말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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