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78)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78)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8.22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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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문갑에 보관했었더라면 그년, 그 도둑년만 좋을 일을 시킬 뻔 했구나
남을 배려하는 고운 심성에 절로 가까이하고 싶은 음전한 여인이란다
여린 민들레꽃이 억센 말발굽 아래서 산산이 부스러지는 모양으로 참담했어요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그동안의 눈물바람이 효과를 보았을까? 영감이 나선다는 말에 시어머니는 청춘을 오롯이 쏟아 붓고도 기십 년의 지독한 공부 끝에 금방(金榜)에 걸린 이름 세자를 본 초로의 감격처럼 가슴이 벅차 무엇 하나 아까울 것이 없었다. 천장의 비밀장소를 들어 용케도 숨겨 놓은 돈 봉투를 꺼내 방바닥에 펼쳐 놓고는

“옛말 하나 틀린 게 없어 본처는 가족의 끼니와 화목을 위해, 살림살이를 위해 배를 곯아가며 재산을 불리고, 첩이란 것들은 본처가 피땀으로 일구어 놓은 재산을 도둑고양이가 되어 야금야금 축낸다더니...!, 하이고~ 그 말이 참말임을 왜 이제야 알았을꼬? 내 너의 선경지명을 헤아린 조언에 따랐기에 횡액이 난무하던 그 와중에도 이것이나마 용케 지켜낼 수 있었구나! 고맙구나! 그러고 보면 이 돈 또한 나는 보관자일 뿐 본래부터 내 것이었나 보구나! 아둔한 내가 평소처럼 문갑에 보관했었더라면 그년, 그 도둑년만 좋을 일을 시킬 뻔 했구나! 하지만 오늘은 내 형편이 무일푼으로 무인지경이라 얼마간 빌려야 쓰고 내가 돌아오면 그때는 내 딸라[‘딜라(dollar)’의 비표준어]이자로 쳐서 갚아 줄까보다!”하더니 9할의 돈을 ‘福’자가 큼지막하게 아로새긴 금낭에 넣어 문갑 깊숙이 갈무리한 후 나머지 1할의 돈을 품속에 갈무리하여 한달음에 시장으로 향한다.

늦가을의 보드라운 햇살이 어머니의 손길처럼 곱디곱게 쓰다듬는 대문을 나서서는 두세 차례에 걸쳐 장보기를 해왔다. 그리움에 젖어 나날이 올려다보는 높은 산이 원망스러워 우경노인이 되자 했던 날들을 뒤로하고 며느리와 손자가 돌아온다는데 다리품은 물론 그 깐 돈 몇 푼 따위는 대수롭지가 않단다. 시장을 오가는 길에 양손으로 묵직하게 들었건만 물 찬 제비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소고기에 돼지고기도 양껏 사고 비린반찬으로 문어, 갈치, 생태, 마른명태, 오징어, 고등어를 비롯한 각종 생선도 넉넉하게 사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이웃의 아낙네들을 죄다 불러다가 밤을 새워 음식 장만에 돌입이다. 송편은 물론 인절미와 시루떡을 찌기 위해 찹쌀과 멥쌀을 들어 떡쌀도 푸짐하게 갈았다. 각종 고물과 만두, 송편 등의 속을 채우기 위한 고기를 비롯한 녹두, 콩, 팥, 서리태(껍질은 검은색이고 속은 파란색을 가진 콩), 양대-콩(‘강낭콩’의 방언)등을 부엌칼로 잘게다지고, 절구질로 빻고, 가마솥에 삶았다. 갖가지 음식을 두고 마을 아낙네들은 이바지음식도 아니고 뭔 음식이 이렇게나 푸짐하고 기름지냐고 투덜거리면서도 부엌과 마당을 분주히 오간다. 소박을 놓아 쫓아낸 며느리를 다시 들인다는 말에 이웃 아낙네들은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지 군소리 없이 솥뚜껑을 뒤집는다. 아궁이 앞을 지키고 앉아 불 조절에 바쁜 손길을 놀린다.

동네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그 몹쓸 년이 마음에 들지 않음은 마찬가지란다. 치맛바람도 치맛바람이지만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인정머리라곤 눈을 씻어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다고 입을 모으는 동네 사람들은 한마디로 밥맛이란다. 간혹 제풀에 겨워 습관처럼 쌍시옷을 입에 담을 때는 이런 무식하고 천박한 여자를 봤나 싶어 혀를 내둘렀다. 언성을 높여 말끝마다 육두문자를 내지를 때면 인격에는 고하가 없고, 출신에는 귀천에 없다지만 따따부따 뉘 집의 딸이며 출신성분이 의심스럽기까지 했다고 했다. 대신 쫓겨 간 며느리는 싹싹하니 인정이 있어서 쌍수로 환영이란다. 궂은일에는 누구보다 먼저 팔소매를 걷어붙이는 등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이나 연세 지긋한 동네 어른들의 섬김에는 정성을 다하는 등 남을 배려하는 고운 심성에 절로 가까이하고 싶은 음전한 여인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밤늦은 시간임에도 피로하기는커녕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간단다. 하시라도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단다.

처녀가 시아버지 손에 들린 시어머니의 금가락지를 바라다보며 눈물이 그렁그렁하는데 시아버지가 옆에서 끓어 엎드린 아들의 옆구리를 ‘꾹꾹’찔러서는 얼른 끼워 주란다. 그때까지도 아교풀을 붙인 듯 방바닥에 이마를 박고 있던 아들이 얼떨결에 일어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런 저 덜 떨어진 놈 같으니! 야~ 이놈아 뭘 그렇게 멍청하게 쳐다보고만 있을 거니! 꾸물거리지 말고 네 에미 가락지를 새아기 손가락에...!”하고 시아버지는 어리보기인양 뚱한 아들을 재촉이다. 그제야 할 일 생각난 듯 무릎으로 기어서 마누라의 손을 잡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건네받은 금가락지를 처녀의 손가락에 끼우는데 오랜만의 해후라 그런지 단박에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다. 맞잡은 손을 통해 부부지정이 새록새록 샘솟는지 은근하게 바라다보는 눈에 간절함이 묻어난다. 부끄러운 듯 살포시 왼손 약지를 서방님의 손에 내 맡긴 처녀도 가슴이 환희로 벅차오르기는 마찬가지다. 비록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을 지라도 이렇게 데리려 와 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하고 마음으로, 몸으로,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수에 미운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혔는지

아니~ 아니지요! 이렇게 싶게 용서해 드릴 수는 없지요! 지난날에 받은 온갖 설움을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저 없는 듯 넘길 수는 없어요! 긴긴밤 이불속으로, 가슴속으로 서리서리 넣어 두었던 세세한 사연들을 죽을 때까지 굽이굽이 펼쳐 곱에 곱으로 받아내고 싶어요! 그때는 단단히 각오를 하셔야 할 거예요! 그렇더라도 저를 두고 나쁘다 모질다 원망은 하지 말아주세요! 하는데

그래요! 알아요! 똥 뀐 놈이 성낸다고 나라면 더하면 더했지 현숙한 부인처럼 이렇게 너그럽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미 마음속으로 단단히 각오하고 있어요! 여보의 가슴에 쌓인 한이 그렇게 해서라도 다소 나마 풀어지고, 내 마음의 짐을 얼마간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까짓 닦달과 원망 정도야...!, 이미 원하고 바라는 바라 내 어찌 아니 기쁘지 아니하겠소!

고마워요! 두말 않고 받아주셔서! 그런데 세월이 참 야속했나 봐요? 나도 울고 아가도 울 때 아가야 나도 너도 너무 서러워서 목이 맵지! 그런 날들이면 이 어미는 더없이 외로웠지!, 아가야 너라고 어찌 다를 수가 있었을까? 그런 날에는 너도 얼굴 모르는 네 아버지가 가슴 저리도록 보고 싶어서 목 놓아 울었지? 그리고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이 어미가 밤이면 밤마다 눈물로 지새운 날들을! 적적하게 밤이 흘러 삼경 일제 새만 울어도 외로워서 눈물 흘렸다는 것을! 나뭇잎만 떨어져도 슬퍼서 흐느꼈다는 것을! 그 세월이 쌓이고 쌓여 가슴이 문드러져 내리던 밤을 아가야 너는 보았지! 그 날 수에 당신이 진정 야속했어요! 지난 번 그냥 가실 때는 하늘이 까맣게 내려앉은 기분이었어요! 한 떨기 새하얗게 여린 민들레꽃이 억센 말발굽 아래서 산산이 부스러지는 모양으로 참담했어요! 가슴속이 짓물러 바닷물로 일렁이는 것 같았어요! 나에게 뼈를 내준 아버지가 진정 원망스러웠어요! 나에게 살을 빌어주신 엄마가 미웠어요! 귀엽고 앙증스러운 우리 아기만 아니었더라면 그날을 들어 황천길을 택했을 지도 모르겠어요! 한데 이제는 고맙고 감사해요! 이제 어쩔 거예요! 꼬집고 앙탈을 부려도 다 받아 줘야 해요! 오늘 밤에는 당신을 한없이 때릴 거예요! 내 가슴처럼 당신 가슴이 바닷물이 일렁거릴 때까지 때릴 거예요! 하여간 얄미워요! 하며 도끼눈으로 홉떠보지만 이미 눈가론 하염없는 정이 넘쳐 난다. 봄을 맞은 들판처럼 여린 연두색으로 눈이 웃고 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물 먹은 솜처럼 자꾸만 흐물흐물 풀어진다. 정신머리가 우주로 날아간 여자처럼 실없는 웃음이 끊임없이 입가로 흘러나온다. 참고 또 참으려 입술을 깨물어도 소용이 없다. 가슴속으로 도끼를 품고 칼을 품어도 소용이 없다. 도끼날이, 칼날이 삼복을 맞은 엿가락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베개를 끌어안고는 눈물 뿌려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그 밤들은 이미 흘러간 시냇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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